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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광야에 샘을 내는 법(To Make a Spring in the Desert)-와싱톤한인교회 김 영봉 목사

광야에 샘을 내는 법(To Make a Spring in the Desert)
                           --시편 8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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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2/audio082612kim_c.mp3

 

1.
뜨겁던 날씨가 많이 수그러져들고 있습니다.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 여름 동안 잘 견디셨습니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서 마음과 몸을 추스르고 결실의 계절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가을은 흔히들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여행의 계절'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로만 말한다면, 여름 방학 동안에는 젊은 가정들이 여행을 많이 하는 반면, 은퇴하신 분들은 가을, 특히 10월에 제일 여행을 많이 하십니다.

얼마 전, 책을 읽는데, '여행'(journey)과 '순례'(pilgrimage)를 비교한 대목을 읽고 잠시 머물러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순례는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거룩한 지역을 오랜 기간 동안 여행하는 것'(a journey, especially a long one, made to some sacred place as an act of religious devotion)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역을 돌아보고 오는 여행을 '성지 순례'(pilgrimage to the Holy Land)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제가 읽은 그 글의 저자는, '여행'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과거의 모습 그대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고, '순례'는 여행을 거치면서 중대한 변화를 겪고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고 썼습니다.

사실, 어떤 여행이든지 어느 정도는 그 사람에게 변화를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여행을 마치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알던 세상과 다른 세상을 보고 왔는데, 어찌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변화가 특별히 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느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변화를 느낄 정도로 심하게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변화는 방문한 그 장소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여행 과정 중에 뭔가 초월적인 세계와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가끔 성경에 나오는 지역들을 방문하는 순례 여행을 하곤 합니다. 3년 전에 약 30명 정도가 다녀 오셨습니다. 그 때,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교우들이 계십니다. 지난 봄에도 또 한 팀이 순례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저는 그분들 중 한 분에게서 진정한 순례 체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만큼 성공했고 또한 더 큰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순례에 참여했습니다. 성공과 번영의 정상에 서 있던 그분은 그 순례가 자신에게 마지막 출구라고 생각하고 유서를 써 놓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성공에 둘러쌓인 자신의 영혼이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떠난 순례 여행 길에서 그분은 꼼짝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처했고, 그래서 두 손 다 들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순례를 다니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제게 그 이야기를 하시는 그분의 눈가에는 끊임없이 이슬이 맺혔습니다.

모름지기, 순례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번 가을에 여행을 떠나는 분들에게 이러한 순례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목적지가 성경에 나오는 장소가 아니라도 그러한 변화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좋은 구경하고, 좋은 음식 먹고, 유쾌한 잡담을 나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며 하나님의 손길에 자신을 열고 여행을 하다 보면, 초월적인 세계와 마주치는 순간이 번개처럼 임할 수도 있고, 새벽처럼 열릴 수도 있습니다.

2.
교회력에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은 어느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이 순례의 경험을 기억하면서 쓴 시편입니다. 이스라엘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자의로 혹은 타의로 주변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생전에 조국 땅에 돌아가 사는 것을 늘 염원했고, 특별히 명절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드리기를 꿈 꾸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는 적어도 일 년에 세 번은 순례를 가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습니다. 타국 땅에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가장들에게 일 년에 세 차례나 순례를 한다는 것은 웬만해선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순례 여행은 주로 카라반 여행이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순례길에 오르는 것만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이민자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듯,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평생에 한 번 순례길에 오르는 것만도 특별한 축복으로 여겼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의 시편을 쓴 사람은 과거에 한 번 혹은 몇 번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순례길에 오를 형편이 아닙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늙고 병들어 더 이상 그렇게 고된 여행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심정이 그렇습니다. 갈 수 있을 때는 별로 갈 마음이 없다가도 막상 갈 사정이 되지 않으면 더 간절히 가보고 싶어집니다. 지금 이 시인이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이 시를 쓸 때, 그 시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개 그렇게 했듯이 예루살렘 성전 쪽으로 머리를 두고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눈을 감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땅을 밟고 그 영광스러운 성전에서 제사드리던 일을 기억합니다. 사정이 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보고 싶습니다. 아니, 사정만 된다면 그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습니다. 그러한 열망으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1-4절)

아마도, 순례의 경험을 했던 분들이라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 기억을 되살릴 것입니다. 굳이 성경에 나오는 지역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거룩하고 초월적인 세계와 접속하는 경험을 하게 해 준 여행의 기억을 회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회상하다 보면, 다시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 그 거룩하고도 신비로운 경험을 다시 하고픈 마음, 항상 그러한 설레임 안에 머물러 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 오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열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다시 가는 것도 쉽지 않고, 그곳에 다시 간다 해도, 과거에 가졌던 그 설레임을 다시 경험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다 내려 놓고 그곳에 이주하여 살아갈 수도 없고, 그런다 한들 그 삶이 상상하는 것만큼 황홀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은 그곳에 다시 가서 과거의 그 경험에 젖어 보고 싶지만, 그것이 해답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편 84편의 시인도 알고 저와 여러분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3.
바로 여기에 영적 생활의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순례 체험이었든 성령 체험이었든, 과거의 영적 경험을 회상하며 그것을 다시 경험해 보기를 갈망하는 것은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실은 영적인 함정입니다. 만일 이 시인이 과거의 순례 경험을 회상하며 다시금 순례길에 오를 날만 손 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 날이 다가오기 전에 그의 영적 삶은 메마른 불모지가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영적 체험이라는 것이 본질상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의 오감으로 늘 확인하지 않으면 그것을 곧 잊습니다. 영어 표현에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한계와 속성을 아주 잘 요약한 말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든, 맛을 보든, 손으로 만지든, 코로 냄새를 맡든 혹은 귀로 들어야 합니다. 항상 그렇게 확인해야만 그것을 기억하고 인정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적 체험을 쉽게 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눈 뜨는 사건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하는데, 그 때의 감흥은 쉽게 사라져 버립니다. 당시에는 마치 하나님 나라를 손에 잡은 것 같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긴기민가 해 집니다. 심하면 "그 때 내가 뭔가에 홀렸었나?"라고 의심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잊어 버리는 사람도 있고, 과거의 감동을 다시 회복하고 싶어서 또 다시 순례길에 오르기를 학수고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적 체험은 매일을 순례자처럼 살도록 부르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 체험했다면, 매일같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머물러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체험의 감동은 가라앉고 또 다시 같은 감흥을 추구하게 됩니다. 순례 체험을 한 사람은 또 다시 순례의 길을 떠나려 하고, 부흥회에서 체험한 사람은 또 다른 부흥회를 찾아 두리번 거리게 되며, 영성 수양회에서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은 또 한 번의 수양회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그의 영혼은 파리하게 야위어 버리고 그의 삶은 메마른 황야처럼 되어 버립니다.

시편 84편을 쓴 시인은 그 위험을 알았습니다. 그는 과거의 순례의 경험을 회상하며 또 다시 순례길에 오를 것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곳에 간다 해도 과거와 같은 그런 영적 감동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상을 떠나 순례길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순례길로 만들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5-7절)

여기서 시인은 마치 순례길에 오른 사람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이 선 곳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참된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음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일상 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찾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수백만리 떨어져 있다 해도 마음은 늘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순례자입니다.

4.
그렇게 살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6절은 조금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 골짜기'라는 말은 직역하면 '바카 골짜기'(the valley of Baca)입니다. 히브리어 '바카'가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그 모든 의견에 공동적인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메마른 광야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것은 눈물 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눈물 골짜기'라고 의역을 한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분을 예배하는 사람도 메마른 광야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여, 혹은 늘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여, 걷는 곳마다 낙원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매일을 순례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6절은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이라고 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마치 샘물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처럼 번역을 해 두고 있습니다만, 이 구절에 관한 한 <개역성경>이 번역을 더 잘 해 놓았습니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일상의 순례자들은 메마른 광야에 샘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만이 아니라 이곳 저곳에 샘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샘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물을 마시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메마른 광야에 샘을 파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며칠동안 땀 흘려 파다가 거대한 암반을 만나는 바람에 덮어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입니다. 하지만 일상의 순례자들은 결국 샘을 만들어내고야 맙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은 결국 그같은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6절 마지막에 덧붙여진 말씀이 참으로 귀합니다. 일상의 예배자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면서 그곳에 샘을 내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구절은 <새번역>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에 샘을 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샘에 물이 가득 차도록 비를 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샘물에 생수가 가득 넘쳐 흐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과 함께 하며 그분을 예배하며 살아가면 마침내 그분을 환히 보게 되는 축복을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듯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5.
그러므로 과제는 과거의 영적 체험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적 체험을 출발점으로 하여 우리의 일상을 순례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광야에 샘이 만들어지고, 그 샘을 통해 영적 생명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매일의 삶을 영적인 순례로 만들어 때로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일상에 샘을 파기 위해서는 연장이 있어야 합니다. 저절로 열린 샘을 찾는 데는 아무 도구가 필요 없지만, 마른 땅에 샘을 파려면 좋은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 샘을 파는 데 꼭 필요한 도구 네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공적 예배(communal worship)입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는 영적 순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예배를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성도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를 대신할 것이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기 어렵습니다.

'설교 듣는 것'을 '예배 드리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절대로, 절대로 설교 듣는 것으로 예배 드렸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는 예배의 일부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 안에 담긴 순서들이 모두 중요합니다. 건강의 이유로 불가능하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성도들이 몸으로 함께 모여 정성들 다해 예배 드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일상에 샘을 파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장입니다.

둘째, 개인 경건 생활(personal daily devotion)입니다. 매일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여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떼내어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일상의 순례자는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한 시간을 하나님께 떼어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 시간에 홀로 말씀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중보해야 합니다. 매일 경건 생활로 인해 우리가 파는 샘은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셋째, 영적 사귐(spiritual fellowship)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진실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영적 사귐이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열 대상이 없으니 대낮에 닥치는 대로 칼부림하는 사람이 나오고, 눈 감고 총을 쏘아대는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즈음 뉴스를 읽고 있으면 참으로 두렵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폭탄을 제조했는데, 이제는 이 시대가 사람들을 폭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한 두 가지이겠습니까만, 가장 큰 이유는 참된 친구, 참된 소통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에게는 이 같은 참된 영적 사귐을 나눌 대상이 있습니까? SNS(Social Network Service)로 인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살고 있습니다만, 과연 내 옆에 진실된 사귐을 나눌만한 대상이 있습니까? 트위터의 팔로워가 수천명이 된다고 자랑하면 무엇합니까? 페이스북에 친구가 수백명이라고 좋아할 이유가 없습니다. 카카오톡으로 수백명과 연결되어 있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나에게 있느냐는 데 있고, 내가 내 속 이야기를 할 친구가 있느냐는 데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이들과 함께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데, 주문한 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모두가 자기 스파트폰으로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순간 "아, SNS가 수 많은 사람들과 연결시켜준다는 허울로써 우리를 속여 정작 옆에 있는 사람과의 사귐을 방해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SNS가 우리 시대에 피할 수 없는 생활의 도구가 되었지만, 영적 생활에 가장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판 영적 샘을 말라버리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사랑으로 행하는 봉사(service)와 선교(mission)입니다.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앙적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몸을 낮출수록 더 잘 보이고, 자신을 비울수록 더 가까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거친 음식을 먹고 와서는 그곳에서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것이 신앙의 진리입니다.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고 희생할 때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은 더 잘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굳이 선교지에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허리를 숙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이제 9월부터 시작되는 성인 신앙 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우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다 각기 다르고 가르치는 사람도 다르지만, 초점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일상을 순례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다 해도 그곳에 마르지 않는 샘물을 파도록 서로 배우고 기도하고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6.
오늘 우리가 만난 시인은 또 다시 순례길에 오를 기회를 얻었는지, 아니면 그대로 생을 마쳤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육신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성전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온에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삶은 어떻습니까?

혹시, 최근에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고 그 황홀한 감동에 젖어 살고 계십니까?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그 체험에 붙들려 있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보다 더 깊고 희한한 체험을 하려고 두리번 거리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셨으니, 그 눈으로 매일의 일상을 영적 순례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밤의 이슬과 낮의 비를 받아 담을 수 있는 샘물을 파셔야 합니다.

혹시, 멀지 않은 과거에 하늘이 활짝 열리는 체험을 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되어 버린 상태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 콧물 쏟으며 감격했었는데, 이제는 그 감격이 거짓말 같이 느껴집니까? "그 때 내가 뭐에 홀렸던 것은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고 빨리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는 사탄의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와 같은 경험을 다시 맛보고 싶어서 이곳 저곳으로 전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해결책은 단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메마른 영적 광야에 샘을 파는 일입니다.

혹시, 예배에 자리에 나와 있지만, '하나님 나라', '성령 체험' 혹은 '영적 체험'이라는 말들이 모두 남의 이야기와 같습니까? 아직 그 나라를 탐색만 하고 계십니까? 초월적인 세계와 접속되는 경험을 아직도 해 보지 못했습니까?

그렇다면 영적 샘물을 파는 네 가지의 연장을 단단히 잡고 샘을 파보시기 바랍니다. 이럭저럭하다 보면 저절로 샘이 터질 거라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샘을 마련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의 빗물이 모두 땅에 스며들고 맙니다. 저절로 샘이 터질 것을 기대해서도 안되고, 가끔씩 내리는 빗물에 기대서도 안 됩니다. 진실로 영적인 생명수를 원한다면, 우리의 일상에 샘을 파야 합니다. 예배로써, 매일의 경건 생활로써, 진실한 영적 사귐으로써 그리고 사랑의 섬김으로써 샘을 파야 합니다. 그렇게 파들어갈 때, 필경 샘물이 터지고 하나님께서 은혜의 빗물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참 귀한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이 계절에 우리가 마음을 다잡고 할 일이 많지만, 일상을 순례로 삼아 마르지 않는 샘을 파는 일이 가장 우선 순위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이 계절은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계절이 될 것입니다. 매일, 매 주일,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영적 샘을 파는 일에 땀 흘리기를 마다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충만한 가을비를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