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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1) 김 영봉 목사

2012년 11월 25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방송듣기

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2/audio112512kim_c.mp3


연속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1)
"크레도 에르고 숨"
(Credo Ergo Sum)
--히브리서(Hebrews) 11:1-3



1.

여러분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십니까?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근거로 결정하십니까?

"나는 보는 것으로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유물론자들(materialists)이 그들입니다. 과학이 진리의 최종 심판자의 자리에 올라 선 지금, 유물론적 세계관(materialistic world-view)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아는 것으로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성주의자들 (rationalists)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일수록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집니다. 그런 자기 확신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완고한 고집과 아집 안에 갇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자신의 이성의 틀로 걸러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은 '자신만의 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편, "나는 느낌으로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각주의자들 (sensualists)입니다. 포스트모던시대라고 불리는 우리의 시대에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느낌이 좋으면 그만입니다. 지금 당장 기분 좋게 해 주면, 그것이 환각이든, 거짓이든, 속임수이든, 악한 것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에 일치하는 것인지, 성경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인지를 따지지 않고, '값싼 은혜'(cheap grace)만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인생의 토대를 형성해 주고, 방향을 결정해 주며, 성격을 결정해 주고,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세계관(worldview)에 관한 질문이며, 인생관(view of life)에 관한 질문이며, 가치관(value system)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고후 5:7)

믿음으로 산다? 얼른 생각하면, 매우 위험해 보이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무엇이든 덥썩 덥썩 믿는, 그래서 자주 속임을 당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그런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을 생각한다면, "나는 믿음으로 삽니다"라는 말이 결코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와 영원한 생명에 관한 믿음입니다. 이같은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을 가리켜 영어로 the mystic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로 '신비주의자'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겠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롭고 광활한 세계 즉 하나님 나라가 열립니다. 그 신비로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the mystic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2.

우리가 예배 드릴 때 사도신경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울 사도처럼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고백하고 확인하고 선언하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행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아는 것으로 살지도 않습니다. 느끼는 것을 따라 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삽니다.

사도신경의 원문은 라틴어로 되어 있습니다. 라틴어 원문에 보면 Credo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Credo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영어 번역에도 그렇습니다. "I believe"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과거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 문구가 숨어 버렸습니다. 다행히, 새 찬송가를 출판하면서 발표한 새번역 사도신경에서는 원문의 강조점을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나는 믿습니다"라고 거듭 고백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합니다. 세상에 나가면 보는 것으로 사는 사람들, 아는 것으로 사는 사람들 그리고 느끼는 대로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과 섞여 살다 보면,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옳은 것 같고, 더 이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 같고 영 가망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보면 믿음이 점점 약해지기도 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배로 모여 사도신경으로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살겠습니다"라고 확인하고 고백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라는,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이라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philosophical statement)를 남겼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생각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크레도 에르고 숨"(Credo ergo sum) 즉,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I Believe. Therefore I Am)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믿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두뇌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성을 부정하는 셈입니다.

현존하는 인간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천재 물리학자 스테펜 호킹(Stephen Hawking) 박사라고 합니다. 그는 우주에 관한 인간의 이해를 끊임없이 확장시킨 우리 시대의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을 부정하고 인간의 두뇌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인 그가 70세 생일에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여자, 그것은 나에게 완전한 비밀입니다"(Women. They are a complete mystery). 저는 이 기사를 읽고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사람이 여자를 모르겠다고 말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현존하는 인류 중 생각으로 우주의 가장 먼 곳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사람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가 다른 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하러 가던 중에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아이에게 약도를 보여 주면서 길을 물었습니다. 그 아이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자, 목사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그 교회에서 내가 오늘 천국 가는 길에 대해 설교하려는 참인데, 너도 와서 들어보지 않을래?" 그러자 그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니, 교회 가는 길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국 가는 길에 대해 안내를 하세요? 비슷한 얘기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호킹 박사의 주장을 부정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머리로 다 알 수 있다는 지적 교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그의 말은 인간의 신비성을 반증하는 말로 들립니다. 인간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질로 된 우주는 추론과 실험과 계측으로 그 끝까지 알아갈 수 있는데,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수 십 년 동안 함께 살았는데도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증거가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존재 자체가 신비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찾고 그 안에서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그 세계 안에서 살기까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이 비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종교성(religiosity)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존재의 구멍'을 발견하고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어거스틴(Augustine)이 그의 <고백록> (Confessions)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오, 주님,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저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 머물 때까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O Lord,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rests in you.

이 문장은 성경 구절의 하나처럼 대접받아 왔습니다. 그만큼 인간 존재의 핵심을 꿰뚫은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저희를 만드셨습니다"라는 말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 인간됨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진정한 만족이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우리의 인간됨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3.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읽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장'이라 불리고, 고린도후서 15장이 '부활장'으로 불리듯,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으로 불립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데, 서두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새번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개역개정)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공동번역)

세 개의 번역을 소개한 이유는 '확신'(assurance), '실상'(reality) 혹은 '보증'(guarantee)으로 번역된 '휘포스타시스'(hupostasis)라는 헬라어(Greek) 단어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세 가지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의미를 포괄하여 생각하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적극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을 전파했던 노만 필(Norman Peale)이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는 믿음을 그런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현대판 노만 필'이라고 불리는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 역시도 무엇이든지 바라고 구하고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매사에 적극적(active)으로, 긍정적(positive)으로, 낙관적(optimistic)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혹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철저히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며, 그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바라는 것이 있으며, 하나님을 믿기에 바라는 것이 결국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기에 그것을 이미 얻은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면 바라는 것을 이미 손에 넣은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므로 반드시 얻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보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한, 바라는 것을 필경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속해 있는 하나님 나라는 지도에 그릴 수 없는 나라입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으며, 오감으로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실재한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믿고 나면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앎으로써 믿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알아가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해를 위해 <새번역>의 어순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믿음으로 깨닫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은 논리적인 추론으로 확인할 문제가 아닙니다. 실험실에서 결론 지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야만 알게 되는 진리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했는데,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는 믿음으로써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관한 한,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입니다.


4.

이 지점에서 이렇게 반론을 펴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당신은 쳇바퀴 논리(circular reasoning)에 갇혀 있는 것이오. 하나님이 있다고 믿으니 다 그런 것처럼 보이는 거지요." 현대 무신론 운동의 대제사장격인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에서 이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은 어떤 가설을 세우고 여러 가지의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그 가설이 맞는지를 확인함으로써만 진리에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온 우주보다 큰 존재만이 우주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우주 안에 살고 있는 미세 먼지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보다 더 큰 무엇에 대해 알려면 가장 그럴 것 같은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이 맞는지를 확인하면서 수정해 가야 합니다.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모두 이 같은 방법이 아니고는 진실에 접근해 갈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들이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그 입장에 선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같은 것은 없다고 가설을 세운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세상을 보니 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쳇바퀴 논리에 갇혀 있는 점에서는 무신론자나 믿는 사람이나 같습니다. 문제는 어떤 가설이 좀 더 많은 현상들을 좀 더 설득력있게 설명해 주느냐에 있습니다. 그 판단에 따라 어느 하나의 가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선택한 사람들 중에는 갬블링을 하듯 그렇게 한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실 가능성과 없을 가능성이 반반으로 보였답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따져 보았답니다. 만일 있다는 쪽에 인생을 걸었다가 죽고 나서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별로 손해 볼 것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반면, 없다는 쪽에 걸었는데 죽고 나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드러나면 큰 낭패를 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믿음의 길에 들어서고 보니, 제대로 선택했다는 마음이 생기더랍니다. 믿고 보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눈에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부인할 수 없는 전환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합니다. 무신론자로 살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도 있고, 모태신앙인으로서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던 중에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뜨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연으로 치부해도 될만한 소소한 영적 자각을 통해 혹은 부정할 수 없는 영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에 눈 뜨고 그 나라를 믿게 됩니다. 그렇게 믿음의 길에 들어서 믿음 안에서 자라가다 보면, 전에는 도대체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깨달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 안에 머물러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자라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바라는 것을 이미 손에 넣은 것처럼 느끼도록 믿음이 깊어지기 어렵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아는 것만 믿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으면 코를 베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기에 우리는 어릴 적부터상대가 사람이든 사건이든 확인과 재확인을 통해 틀림 없다 싶을 때만 믿도록 훈련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손에 물증(physical evidence)을 쥐고도 믿기 어려워 할 정도로 의심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5.

믿으려고 노력해도 잘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믿는다고 하지만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진짜라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과 질적으로 달라야 마땅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정말 우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삶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면, 그분의 성품과 정신이 내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야 옳습니다.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난 사람이라면, 과거와 같은 실수와 죄를 반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으려는 의지는 있을지 몰라도, 마음 다해 믿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 같은 모습은 있지만, 참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것이 이미 손에 쥐어진 듯이 느낄만큼 믿음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실재라는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에서 믿음의 위인들을 소개하면서 믿음이 살아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모세를 소개하면서 광야에서의 40년 동안의 고통을 이긴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냈습니다. (27절)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듯이 믿는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처럼 믿는다면, 그리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실제로 내 몸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모세처럼 혹은 다니엘처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짓눌리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목숨보다 더 큰 생명이 있고, 눈에 보이는 우주보다 더 큰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원리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읽은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LA에서 열린 영성 세미나에서 강의를 하셨는데, 그곳에는 다양한 종교인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법복을 입은 여성 불자를 만났는데, 자신이 과거에 기독교를 믿었다가 불교로 개종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더랍니다. 개종 이유는 간호사로서의 경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암병동에서 일했는데, 기독교인 환자들이 가장 불평불만이 많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으며, 하나님을 저주하며 가장 지저분하게 죽음을 맞이하더라는 것입니다. 반면, 불교 신자들은 매우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불교에 귀의했다는 것이지요.

많은 생각을 해 주는 일화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험은 그분의 경험과 많이 다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수 많은 임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임종을 지켜 볼 때마다 자주 저는 인간이 과연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첫째, 그분이 만났다는 기독교인 환자들은 명목상의 교인이지 참된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참되었다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았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이미 얻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는 가짜다"라고 결론을 내는 것은 성급하고 미숙한 태도입니다.

고 양승길 장로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지독한 고통으로 인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갈 때, 의사가 "Where are you, Mr. Yang?"이라고 묻자, 싱끗 웃으며 "I am in heaven!"이라고 답하셨습니다. 호스피스 의사가 놀랄 정도로 양 장로님은 깊은 믿음에서 솟아나는 평안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이런 모습을 보고 판단해야 옳습니다.

둘째, 그분이 과거에 기독교인이었다고 말했다지만, 그분 역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던 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흔들리는 기독교인 환자들을 참된 믿음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분은 자신이 과거에 기독교인이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참된 믿음에 이르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증명해 줍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으려는 의지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믿음의 형식만으로도 안 됩니다.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참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서 "크레도 에르고 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6.

교회가 예배로 모여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선포하고 고백하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임을 확인하고 선포합니다. 크레도 에르고 숨! Credo ergo sum! 우리는 믿을 때 진실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수 없이 반복하여 외운다고 해서 믿음이 저절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신조 하나 하나를 참되게 믿기를 구해야 합니다. 믿음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기는' 것입니다. 믿어져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하고 생각하고 연구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더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구할 때 성령께서 마음을 만지십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만지실 때 '믿어지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믿음은 나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고 시야를 활짝 열어줍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나의 두뇌보다 훨씬 큰 진리가 내 마음을 내리 덮는 것입니다. 한 번 내리덮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다 되지 않습니다. 늘 그 상태에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새 영적 세계가 새빨간 거짓말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생활을 하루도 거르지 말아야 하고, 더 깊은 믿음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부디, 사도신경을 따라 걷는 이 영적 여정을 통해 참된 믿음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물질의 유혹 앞에서 꿈적하지 않고, 인생의 풍랑에 요동하지 않으며, 마침내 죽음의 위협 앞에서 흔들림 없는 믿음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그 믿음으로써 이 땅을 천국처럼 살고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주소서.
참된 믿음을 주소서.
믿음의 능력으로써
현세의 유혹과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죽음과 심판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