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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창조주 앞에 서다" Stand Before the Creator-김영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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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3/audio042813kim_c.mp3

 

 

"창조주 앞에 서다" Stand Before the Creator
--나는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 시편 Psalms 33:1-9
1.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해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립니다. 한 편에는 우주와 생명에는 처음도 끝도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상태였고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 편에는 우주와 생명이 시작된 때가 있으며 따라서 끝날 때도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주와 생명이 어느 때인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크게 두 편으로 갈립니다. 한 편에는 저절로, 우연히, 자연 선택의 법칙에 따라 진화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 편에는 우주와 생명은 초월자(the Transcendent Being)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의 입장을 '진화론'(evolutionary theory or evolutionism)이라고 부르고, 뒤의 입장을 '창조론'(creationism)이라고 부릅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진화론과 창조론은 치열한 혈투를 벌여 왔습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싸움 사이에서 저는 한 참 동안 갈팡질팡 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정직한 연구 결과들을 무시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옳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과학은 다른 지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진화론도 과학을 통해 얻은 지식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진화론을 포함하여 과학 전체를 신앙의 적인 것처럼 가르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것은 아주 큰 아이러니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세월 동안 축적된 과학적 지식으로 인해 발달된 문명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아미쉬(Amish) 공동체 사람들이 아닌 다음에야, 기독교인들도 모두 과학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과학의 혜택을 입고 살아가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신앙의 이름으로 과학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그렇다면, 진화론에 대해 교회가 제시하는 대안은 과연 받아들일만 합니까? 그것을 소위 '창조 과학'(creation science)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성경을 과학 텍스트로 간주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하나의 이론'(a theory)입니다. 창조 과학자들은 그들의 입장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그 입장은 '하나의 해석'이요 '하나의 이론'입니다.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들이 대부분 창조 과학을 유일한 신앙적 대안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도 한 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에 이 분야에 대해 얼마간의 연구를 하고 나서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창조 과학'은 유일무이한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는 무시하지 못할 여러 가지 결함과 함정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자동적으로 창조 과학의 이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화론(evolutionism)은 무신론(atheism)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믿으면 자동적으로 진화론을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과학자들 가운데 진화론을 연구하며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탐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화론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위협이 아닙니다. 물론, 리차드 도킨스와 같이 진화론을 가지고 무신론을 증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화론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우주와 생명 현상 배후에 창조자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우주와 생명 현상의 배후에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의 문제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증거를 보고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과학이 더 발전되면 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입증하거나 부정할 때가 올지는 모릅니다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리고 앞으로 오랫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창조자를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각자의 경험과 지식과 직관과 통찰과 영감을 총동원하여 선택할 문제입니다.

인간이란 참 간사합니다. 또한 매우 유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입장을 선택하고 보면 다 그렇게 보입니다. 누군가를 의심해 보았습니까? "저 사람은 믿을 수 없다"라는 입장을 정하고 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어 보입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좋게 보기로 마음 먹으면 매사가 예뻐 보입니다. "아내가 예뻐 보이면 처갓집 말뚝까지 예뻐 보인다"는 속담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창조자가 있다는 입장을 선택하고 보면,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줍니다. 반대로, 신을 부정하는 입장을 선택하고 보면, 그런 증거들이 끊임없이 눈에 나타나게 됩니다.

때로, 스테펜 호킹(Stephen Hawking)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신의 존재에 대해 어떤 말을 하면, 언론에서 그것을 대서특필합니다. 마치 그것이 그 사람의 과학적 연구의 결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에 대한 입장은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그 사람이 선택한 세계관입니다. 과학자는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과학자가 하나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면 맹목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과학이 현대인들의 우상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의 존재에 대해 누가 어떤 말을 했다 해서 그것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학적인 연구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우주와 생명 현상의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기에 그렇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며 지금도 성령을 통해 온 우주를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입장이십니까? 혹시, 진화론에 대해 기독교가 취해 온 잘못된 태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을 무조건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현대 과학을 모두 부정할 수 없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문제는 진화론을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있습니다. 창조주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분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분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비밀이 계시되었다고 믿는다면, '창조 신앙'(creation faith)은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창조주를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얼마 전에 제가 겪었던 경험을 통해 그 의미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저는 지난 해 3개월 동안의 안식월을 지내면서 새로운 취미를 하나 개발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멀리 여행할 수가 없어서 어찌할까 궁리하다가 쉐난도(Shenandoah)에서 등산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걷기를 즐겼지만, 본격적인 등산은 별로 한 적이 없습니다. 안식월 동안에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제일 큰 과제라고 생각했기에 아내와 함께 자주 산을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서 너 시간으로 단련한 후 나중에는 다섯 시간에서 일곱 시간 정도를 걸었습니다. 경험을 해 보니, 등산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가끔씩이라도 등산을 하지 않으면 몸이 쑤시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등산할 곳을 찾아 다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입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산에 올랐는데, 세 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정상에 닿았습니다. 산 위에는 아직도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정상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가슴이 확 트였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 마땅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참을 감상하는데, 문득 예배를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대자연의 성전, 그 성전의 지성소인 정상에서 예배 드리는 것처럼 멋진 것은 없다 싶었습니다.

제 아내와 저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잠시 묵상으로 기도 드리고,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과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의 가사가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 찬송은 예배당 안에서 부르라고 지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찬송을 끝내고, 아내가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아내가 목이 메어 멈칫 거립니다.

기도를 마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창세기 1장을 읽고, 이어서 요한복음 1장을 읽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창 1:1-2)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창 1:11-12)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 1:1-5)

아, 이 말씀들도 예배당 안에서 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구실에서 책을 붙들고 씨름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대자연의 위엄에 둘러 싸인 채로 읽어야 할 말씀인 것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이요, 수 없이 읽은 말씀인데, 그 날, 이 말씀들이 제게 전혀 새로운 무게와 빛깔로 다가왔습니다. 마치, 저를 둘러싼 산과 나무와 새들이 "아멘! 아멘!"하고 응답하는 것 같았습니다. 시편 19편의 말씀이 제 마음에 메아리쳤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시 19:1-4)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자연의 성전 안에서 창조에 관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니, 몇 가지 제 마음에 차오르는 감정과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니 겸손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앉아 있는 바위는 수백만년 전에 바다 속에 있었습니다. 거대한 지형 변화로 인해 바다 바닦이 산이 되고 산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로부터 또 수백만년이 흐른 후, 거대한 빙하가 밀려가면서 계곡이 만들어지고 기암괴석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산 꼭대기에서 주은 조개 껍질은 백만년의 신비를 담고 있는 듯하여 보석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자연 앞에서 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가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춘다 해도 이 세상은 무심히 제 갈 길을 갈 것입니다.

보통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깎아 내리는 것을 마음 아파하십니다. 자식이 자신을 비관할 때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하나님도 같은 마음이십니다. 겸손을 행한다는 구실로 자신을 비관하고 비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슬퍼하실 일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위치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대자연의 성전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니, 제가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도 선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창조주의 임재 앞에서 저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오, 주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이 얼마나 저 자신을 자유하게 하던지요! 마치 새털처럼 저의 존재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면 날아갈 듯했습니다. 팔을 흔들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아무 것에도 매어있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주님, 지금 데려가셔도 좋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니 저절로 찬양이 흘러 나왔습니다. 우리는 작가를 직접 보지 못해도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을 때 그 작가에게 영광을 돌리고 찬양합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위대한 성화를 보고 감동할 때, 우리는 그 작가를 생각합니다. 전원교향악(The Pastorals)을 들으면서 봄의 풍경이 선명하게 연상될 때, 우리는 베에토벤을 찬양합니다. 감동스러운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을 칭찬합니다. 그것처럼, 대자연의 성전에 서서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 압도 당하고 보니, 저절로 "오, 주님, 당신이 어떤 분이시기에!"라고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부르고 "참 아름다와라"를 부르니, 제 눈 앞에 보이는 자연이 모두 함께 찬양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찬양은 모름지기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느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시편의 말씀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의인들아, 너희는 주님을 생각하며 기뻐하여라.
정직한 사람들아, 찬양은, 너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수금을 타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열 줄 거문고를 타면서,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면서, 아름답게 연주하여라.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올바르며, 그 하시는 일은 언제나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온 땅에 가득하구나.(시 33:1-5)

여기에 나오는 명령형들을 보십시오. "기뻐하여라", "찬양하여라", "노래하여라", "연주하여라"--이것이 명령한다고 되는 일입니까? 억지로 기뻐해 보았습니까? 억지로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까? 노래와 연주는 신나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명령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명령을 합니까? 이 명령은 기뻐할만큼, 찬양이 터져 나올만큼, 노래하고 연주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라는 말입니다. 온 땅에 가득한 창조주의 위엄과 영광을 볼 때, 찬양은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5.

셋째, 대자연의 성전 앞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보니 무한한 감사가 제 마음에 들어찼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저를 있게 하신 것에 감사했고, 그 아름다움을 맛보게 하심에 감사했습니다. 한 번의 고귀한 인생을 허락하셨고,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마련하셔서 그것을 보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도 나를 아신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창조자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기에 그분 안에서 우리의 존재도 영원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넷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저의 자리를 찾고 창조주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나니, 저의 마음에는 거룩한 책임감이 들어찼습니다. 제게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그 은혜를 갚는 것이 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더욱 깨끗하게 살고, 더욱 거룩하게 살며, 더욱 사랑하며, 더욱 의롭게 살아야겠다는 결단과 고백이 제 마음에 들어찼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 학설이 분분합니다. 대표적인 학설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다른 민족을 점령할 때마다 자신의 동상을 그 나라에 세워 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서 창조했다
는 해석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해석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에게 당신의 형상을 주시어 당신을 대신하여 물질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주셨습니다. 그 성품을 따라 창조주의 뜻을 살피며 물질 세계를 돌보는 것이 인간의 과제였습니다. 그 형상이 깨어지기 전, 즉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의 세상에 대해 창세기 1장 31절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이 모든 조화와 균형이 깨어진 것은 죄가 인간의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는 단순히 인간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자기의 욕심대로 하나님의 걸작인 이 물질 세계를 오염시키고 훼손시켰습니다. 이제는 돌이키기 어려울만큼 인간의 죄는 깊어졌고, 그로 인한 질병도 심해졌으며,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은 훼손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겪은 몇 가지 사건 만으로도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으며,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이 생겨나고 있고, 우리가 사는 피조 세계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과학 저널에 실린 보고서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항우울제(anti-depressent)의 소비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결과로 바다로 유입되는 항우울제의 화학 성분도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환자들이 약을 먹지 않고 화장실에 버리는 양도 엄청나고, 소변이나 다른 분비물을 통해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것을 물고기들이 먹고는 이상 행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같은 어종끼리 집단으로 몰려다니던 물고기들이 이탈하여 혼자 다니기도 하고, 전혀 나타나지 않던 곳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통계로는 물고기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죄로 인해 심각해진 인간의 정신 질환이 물고기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6.

이렇게, 대자연의 성전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한 다음, 축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축도할 때 제 앞에는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실은 온 세상 사람들과 모든 생명을 두고 축도를 한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축도할 때는 예배당 안에 모여 있는 사람만 생각하게 되는데, 산 정상에서 축도를 하니, 모든 인류를 위해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유물론적 시각(materialistic view)으로 보면 착각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시각(spiritual view)에서 보면 진실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나니, '헌금은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감사를 느끼기만 하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포장해 놓고 주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으면, 구체적인 표현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어쩔까 생각했습니다. 그 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날 점심을 사 먹을 때 우리에게 시중드는 사람에게 두둑한 팁을 주면 하나님께서 기뻐할 것 같았습니다.

산을 내려와 가까운 멕시칸 레스토랑에 가니, 앳된 처녀가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마음 먹었던 대로 두둑한 팁을 남겨 두고 왔습니다. 난데 없는 두둑한 팁을 보고 기뻐했을 그 아가씨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 아가씨는 분명 의아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계산을 할 줄 모르나? 돈이 많아서 물쓰듯 하는 사람인가? 다시 오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기분은 좋았을 것입니다. 그 아가씨가 기분이 좋아졌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과 삶의 초점을 바로 잡으십시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굳게 잡으십시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굳게 잡으십시다. 창조주가 계시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그 증거입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그분이 바로 우리의 창조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그분, 그리고 나를 지으신 그분을 만나면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존재일 수 없습니다. 창조주 앞에서 우리의 분수를 찾고 겸손해질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에 즐거워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기에 마음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구원과 영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과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기뻐합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물질을 나누며 때로는 삶과 죽음의 한계까지도 넘어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온전하게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같은 믿음 그리고 이 같은 삶에 이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는 영원하신 창조주의 은총 안에 살고, 죽어서는 그분의 영원하신 품에 안기는 참된 믿음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주님 앞에 머리 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온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창조주 하나님,
저희의 삶을 드립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