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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전 미 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인생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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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전 미국 연방 하원의원. 사진 제공: 김창준 정경아카데미

 

한국인으로 미국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사람은 대한민국 5,000년 역사상 김창준 씨 단 한 사람뿐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교포 2세도 아니요,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해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한인 1.5세도 아니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까지 다니고 육군에 입대해 제대한 뒤 단돈 500달러를 들고 혈혈단신, 당시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꽃힐 정도로 가난했던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와 접시를 닦으며 고생했던 1960년대 초의 전형적인 한국인 고학생에서 연방하원의원이 된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창준 전 의원은 한인 2세들은 더 큰 정치력이 발휘되기를 바라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최초 미국 연방 하원 김창준 전 의원의 이야기로 함께한다.

김창준 씨의 이력서이다. 1939년생 보성고 졸업, 1961년 도미, 1967년 남가주대(USC) 졸업, 1969년 남가주대(USC)대학원석사, 한양대에서는 명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제이킴엔지니어링 설립,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 바 시 시의원, 1991년 다이아몬드바시 시장, 1992년 캘리포니아주 제41지구 연방하원의원 당선, 1999년까지 3선 연임하는 동안 한인교포로서는 최초라는 기록을 세웠다. 2007년 워싱턴 한미포럼을 설립하여 한미 FTA가 성사되는데 기여했고, 2011년 한국서 사단법인 김창준 미래 한미재단 설립, 2012년엔 김창준 정경 아카데미를 설립해 한미정치 선진화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한국 대통령실 국민경제자문회의 자문위원이기도 하다.

김창준 씨의 미국 생활 시작이 궁금하다. 그는 고향 향수병도 억척같이 이겨내고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굳게 일어선다.

김창준: 그때 캘리포니아의 단칸방에 살면서 낮에는 Chaffey College에 다니고 밤에는 식당에서 밤늦도록 일하며 서툰 영어에, 모든 게 색다른 이역만리에서 고독과 향수병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거의 매일 저녁, 조국에 두고 온 부모님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미국행을 후회한 적도 많았습니다. 괜히 왔구나 하고요. 나중에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공과대학에 편입하면서 다행히 온타리오 시의 신문사(The Daily Report)가 있습니다. 로컬신문사인데요. 사장이 저를 불러서 아침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일해라 해서 정말 행운이지요. 그래 배달 책임자 일을 맡게 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김창준 씨가 굳은 의지로 일구어낸 건설회사 지역의회 의원, 시장 그리고 연방하원에 등단하기까지 감동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김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 개인의 영광이자 한국이민사에 새 장이 펼쳐진 날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던 코리아를 떠나 빈털터리로 낯설은 이역만리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딘 지 꼭 32년. 미국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미 합중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관광객이 아닌 의원의 자격으로 의사당을 향해 걸어가는 내 마음속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창준: 대학 졸업 후 토목기사로 경험을 쌓은 뒤 39살에 설립한 제이킴엔지니어링(Jay Kim Engineering)이란 설계회사를 세웠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삶이 바뀐 거지요. 회사가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사회활동도 많아지고 바빠지면서 아시아 기업인협회 (Asian Business Association) 의 첫 한국계 회장이 됐습니다. 이후 기업활동을 하면서 중소기업청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으로 부터 자랑스런 기업인 상 등을 수상하면서 김창준이란 이름이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다이아몬드바 시의회 의원과 시장을 거쳐 1992년에 미 역사상 최초의 한국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연달아 3선에 성공하게 됩니다.

지난 2009년에 발간된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책에는 감격적인 미 연방의회 하원의원 선서식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날 32년 전 미국 땅에 도착할 당시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단다.

“귀하는 미 합중국 헌법을 지지하고 국내외의 모든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것이며, 이를 위해 충성과 신념을 다할 것이며, 어떠한 정신적인 유보나 회피할 생각 없이 자유스럽게 이 의무를 맡으며, 지금부터 귀하가 시작하는 직무를 충실하게 집행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합니까?” “네”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김창준: 참으로 감명 깊은 순간이었습니다. 토마스 폴리 하원의장(얼마 전에 돌아가셨음.)이 낭독하는 의회법상의 선서문에 따라 “네” 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저는 미 연방 의회 하원의원으로서의 공식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제103차 미 연방 의회가 개회된 1993년 1월 4일의 일이었습니다.

김 씨는 미 의사당의 웅장함도 소개해준다.

김창준: 미 의사당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그 웅장함에 모두들 탄성을 자아냅니다. 이 어마어마하게 웅장한 건물이 160여 년 전인 1846년에 준공됐다는 게 놀랍지요. 컴퓨터는 물론 전기, 전화도 없던 그 시대에 말과 밧줄로 이처럼 웅장한 건물을 세웠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남쪽 길 건너에는 세 개의 하원 건물, 그리고 북쪽에는 세 개의 상원 건물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는 미 연방 대법원이 웅장하게 서 있고, 그 옆에는 두 개의 의회도서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 모든 건물들은 지하로 연결돼 있는데 지하 벽은 원자폭탄에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워낙 오래된 데다가 통로가 너무도 복잡해 지하에서 헤매는 관광객들이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나도 자그마치 처음 1개월 동안 지하통로에서 방향을 잃은 적도 있었습니다. 상원과 하원 건물들을 연결하는 지하 전기 기동차도 있습니다. 본당에서 투표가 없는 한 관광객들도 이것을 탈 수 있습니다. 국회의사당 빌딩 안은 항상 관광객으로 붐비는데 아시아계 관광객들은 으레 바삐 걸어가는 나를 붙잡고 함께 사진찍기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김창준 전 하원의원이 의회에 첫 등원하던 날 이야기다.

김창준: 의회에 첫 등원한 날, 나는 공화당 의원들이 열렬히 환영을 하면서 의사당으로 신 나게 들어갔었지요. 내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2층 방청석도 꽉 찼고요. 더욱 놀라웠던 것은 본회의장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온 의원들이 많았습니다. 국회의사당이 아이들까지 올 수 있을 줄 몰랐는데 아주 좋더라고요. 어린이들도 그 안에서 같이 아버지와 선서하는 것이요. 저는 7년 전에 사업관계 일로 워싱턴에 왔다가 관광 겸 의사당에 들렀던 적이 있었죠. 그때 2층 방청석에서 웅장하고 화려한 본회의장을 내려다봤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내가 의원이 돼서 아래층 의사당에서 2층 방청석을 올려다보게 되다니 참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김창준 전 의원은 초선의원에게 발언권을 주는 관례도 만들었단다.

김창준: 취임선서가 끝나고, 공화당 원내대표의 권고로 103차 회기 개원 첫 발언을 내가 하게 됐습니다. 취임선서를 한 지 40분 만에 발언권을 얻어 단상 앞으로 나갔습니다. 개회식 첫날 초선의원이 제일 먼저 발언을 한다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내가 새로운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개회식에서 초선의원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습니다.

김창준 전 의원이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다는 이야기다.

김창준: 1993년 11월 어느 날, 의회 사무실에서 지역구로부터 올라온 여론조사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을 때 마침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가 왔다고 해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 오후에 백악관 집무실에 들려달라! 그래서 백악관에서 보낸 리무진을 타고 대통령 집무실 앞에 도착했습니다. 경호원들의 절도 있는 경례와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면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서 클린턴 대통령이 손을 맞으며 반갑게 맞아주었지요. 클린턴 대통령이 나를 백악관에 초청한 것은 바로 내가 NAFTA 비준안에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공화당이 당 정책인데 그중에서도 30명이 아직 결정을 안했다. 내가 그중에 하나다. 그래 단독으로 초청해서 뭐가 문제인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변할 수 있는지 그거를 물어보는 건데, 우리 지역구가 멕시코 경계선에 가깝게 때문에 트럭들 안전을 위해서 미국 국경 쪽에서 하나하나 조사하기를 원한다. 그거지요. 우리 지역구 여론조사를 보니까 문제더라고요. 그걸 이야기했더니 당장 전화를 하더니 됐다고---NAFTA에 조건으로 포함시켰다

김창준 씨는 최근 한국 박근혜 정부하에 국민경제 자문회의에 임명됐다고 한다. 김 씨는 미국 백인 도시에서 시장도 했고, 미 의회에서 건설교통소위 위원장을 하면서 위원회 회의도 직접 운영해 본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이 국민경제자문회의 역할을 잘 수행할 것으로 내다보인다.

김창준: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경제 자문회의에 임명하셨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중소기업들을 위한 제도 개선에 힘쓰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1년 전에 전경아카데미를 시작했습니다. 정치보다는 경제를 다루는 많은 장관들도 초청해서 들어보고 저도 미국이야기를 하고요.

2세 정치 지망생에게 주는 충언을 말해달라고 했다. 김창준 씨는 한민족의 근면함으로 미국 속에 깊이 뿌리내리는 강한 신념으로 전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은 백인지역에 출마해 당당하게 성장해 나가기를 바랐다.

김창준: 우리 한인들은 결국 백인 지역구에서 출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흑인 지역구에서는 당선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사람은요. 히스패닉 지역도 스페인 어를 유창하게 하기 전에는 힘들고 중국지역도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한인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구가 이상적인데 그런 지역구는 없습니다. 한인타운이 여기저기 있지만, 그곳에서는 비지니스만하지 살기는 대개 학군이 좋다는 백인 지역구에 거주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2세 정치 지망생에게 주는 말은 이겁니다. 한인타운보다는 백인 지역구를 선택하라!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최초 미국 연방 하원 김창준 전 의원의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