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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6.25남침 최초 방송 아나운서 위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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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연합뉴스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해온 '뉴욕타임스(NYT) 자료'를 입수했다. 한국 전쟁 당시 러시아 타스통신의 워싱턴 주재기자인 미카엘 프드모프도가 트루먼 대통령의 발표 내용을 본국으로 전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1950년 6월 25일 오전 6시 당시 중앙방송( 현 KBS) 라디오를 통해 임시 뉴스를 처음 전해준 아나운서는 재미동포로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사시는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 씨이다.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당시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 괴뢰군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위진록 션생은 6.25전쟁과 9.28서울수복 첫 방송뿐 아니라 1948년 5.10선거, 1949년 백범 김구 선생 장례식 실황중계를 역사의 현장을 지킨 언론의 파수꾼이기도 하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6.25남침의 최초 방송한 위진록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로 함께한다.

위진록 선생의 삶의 현장을 찾아간다.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으로 63년여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셨다고 회고한다.

위진록 선생: 저는 1928년생이니까? 86세 노인이지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고요. 태어난 곳은 황해도 재령이지만, 소학교다 사범학교다 일제때 교육을 받은 도시는 여러 군데를 다녔어요. 가정 사정에 따라서요. 개성에도 갔고, 평안북도 선천이라는 곳에서도 공부하고 남신의주라고 압록강 근처에도 가고, 함흥 평양 이렇게 북한을 여러군데 다녔기 때문에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는 황해도 재령이다. 이렇게 대답하기가 좀 뭔가 억울한 것 같아서 북한 전체가 고향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제 때 사범학교에 다녔고요. 열입곱 살 때 해방을 맞이하지요. 해방 2년 후 1947년에 KBS 아나운서가 되고 그다음에 625를 당하고 공산주의도 체험하고 그리고 어떻게 한 달 예정으로 일본에 있던 유엔군 총 사령부 방송국(VUNC-Voice of United Nations Command)) 파견을 갔었는데 어떻게 그 직장에서 22년을 일하고 그리고 그 후에 1972년에 미국에 이민 와서 지금까지 미국에서 살고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한국을 떠난 지 63년이 됩니다. 63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는 거지요.

위진록 선생은 어떻게 아나운서가 되셨을까? 궁금하다.

위진록 선생: 아나운서가 된 건 말이지요. 1947년이니까? 해방 후 2년 동안인데 저는 그 일제 때 교육을 받아서 우리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 내가 이젠 한국사람이다. 우리나라 말을 알아야겠다. 한글을 공부해야겠다. 한자를 다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2년 동안 독습했습니다. 한국말을 발음이라든가. 자고 저라든가 한국어에 관한 전문적인 것을 공부했어요.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우리말을 터득해야겠다고 생각해 우리말을 공부하는 중에 어떤 날 라디오에서 아주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더라고요. 그걸 듣고 있으면서 아! 이렇게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방송 프로그램이 뭐였나 하면 말이죠. 우리나라 최초의 시 낭송 프로그램이었고, 음악은 주제음악인데, 차이콥스키의 비창이라는 교향곡 제6번 그 제1악장에 제2주제가 안단테라는 것이 나오는데요. 그 아름다운 라라라리 라리라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데요. 이 음악을 듣고 내 방송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터에 아나운서 모집을 한다고 해서 아나운서 시험을 쳤지요. 아나운서 시험을 보는데 뭐 경쟁률은 세 사람을 뽑는데 150명인가 그 이상이 왔던 것 같아요. 그 경쟁을 뚫고서 아나운서가 됐는데 그때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공영방송에 아나운서가 19살에 됐다고 하는 것은 아마 기네스북 감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아주 어려서 아나운서가 됐습니다.

아나운서가 되신 후 6.25남침 시작되던 날 남침소식을 최초로 방송하셨다는데 그날을 회고해 달라고 했다.

위진록 선생: 그때는 뭐 삼팔선 여러 군데에서 남북 군인들 사이에 충돌이 참 많았어요. 그 옹진반도라든가, 철원 부근이라든가, 밤낮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그러는 거에 대해서도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제가 숙직 방송을 하고 있었어요. 새벽에 누가 문을 두들기고 깨우는 데 한 육군 장교가 박이라고 하는 육군 대위가 종이쪽지를 주면서 방송을 당장 하라고 해 보니까? 공산군이 남침을 시작했다는 그런 내용인데 방송을 하라고, 그래서 새벽에 방송해도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방송이 6시부터 시작인데 새벽 4시에 찾아온 사람의 방송을 제가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부에 알아봐야겠다고 그래서 방송을 시작한 것이 6시입니다. 그때 제1보를 제가 방송을 했는데요. 그 제1보 기억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지마는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이 삼팔선 전역에 걸쳐서 남침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안심하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이런 식의 아나운서 멘트를 써 가지고 몇 번을 방송했는지 모르겠어요. 여러 번 방송을 했지요. 그러고 저 자신도 말이지요. 전면 공격이라는 것이 뭔가 지금까지 있었던 공격하고 비슷한 공격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서 방송이 끝난 다음에 서울 운동장으로 축구 구경을 갖던 기억이 있습니다. 축구 구경을 하고 있는데 오후 1시쯤 되니까? 정세가 자꾸 급박해지는 정보가 들어오면서 축구경기도 중단되고 또 이제 북한 공산괴뢰군의 삼팔선 전역에 걸친 그 공격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해서 그래서 황급하게 집으로 돌아간 기억이 있습니다.

위진록 선생에게 피난 가신 이야기 들려달라고 했다. 영화배우 최무룡 선생 댁에서 숨어 살았다고 증언해준다.

위진록 선생: 북한군에 남침이 시작되자마자 방송국에서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해서 남하했어요. 부산 대전 쪽으로 남하를 했는데 저는 가정사정도 있고 그래서 우리 국군하고 미군이 지금은 후퇴는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해 저는 서울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90일 동안을 서울에서도 있기가 어려워서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됐었는데요. 그때는 청취자분들도 아시는 분이 게시겠지만, 우리나라의 유명한 신극 배우 장민호, 유명한 극작가 조남사 이런 친구들이 다 같이 공부도 하고 그런 사람들이었는데요. 이들하고 같이 역시 친구였던 최무룡이 나중에 영화배우로 유명해 지지요. 최무룡이의 집이 문산, 서울과 개성 사이에 문산이 있잖습니까? 문산에 집이 있었는데 그 문산으로 피난을 가서 숨어 산 생각이 납니다. 하여간 공산치하에서 살아남는다는 거 아나운서들은 잡히기만 하면 처형한다고 해서 그런 소문이 들리던 때이니까? 정말 목숨을 걸고 피난 행을 감행한 거지요. 그러니까 구사일생 정말 위험한 고비를 많이 겪었습니다.

최무룡 씨 댁에서 피난생활하면서 에피소드도 들려준다.

위진록 선생: 최무룡이라는 친구는 그때 중앙대학 연극과의 학생이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이 하는 무대극을 제가 중계방송을 했어요. 제가 아나운서를 하기 시작해서 젊었지만, 클래식 음악이라든가, 연극이라든가, 연주회 등 이런 것들을 많이 중계했어요. 그래서 그 최무룡 씨하고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무룡 씨 집은 문산에서 좀 부유한 농가였습니다. 그래서 거기 찾아갔는데요. 그 집에서 신세 많이 졌습니다.

위 선생은 유엔군 총 사령부 방송국에서 방송 하게 된 동기도 들려준다.

위진록 선생: 그때 한국의 방송망 그러니까 그때 방송국이라는 게 KBS밖에 없었지요. KBS 방송망이 전멸 상태였습니다. 서울 방송국도 파괴되고 여러 지방방송국에 기능도 없어지고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면 한국의 방송망을 살릴 수 있느냐는 생각으로 맥아더 사령부에서 방송국을 시작한 거에요. 그것이 유엔군 총 사령부의 방송입니다. VUNC(Voice of United Nations Command))라고 하는 일본에 NHK 방송망을 이용해서 방송했습니다. 제가 거기 가게 된 것은 심리작전 관계 미국 장교가 제가 한국에서 방송하는 것을 듣고 제 목소리가 미국 CBS 방송 월탁크롱 가이트 아나운서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일본 동경에 가서 한 달만 일을 할 수 없겠느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거에요. 그래서 한달 약속을 하고 일본에 가게 된 겁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전쟁은 계속되고 일은 계속하면서 일본에서 한달 약속하고 간 사람이 22년 동안을 방송하게 된 거에요.

위진록 선생은 진행하던 프로그램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위진록 선생: 많지요. 제가 직접 쓰고 방송하던 방송극 ‘자유의 종’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울려라 자유의 종’ 그렇게 시작되는 방송극이 있었고요. 또 뭐 모란이라고 그러는 디스크자키 프로그램이 있었고 백선엽 장군이 가면 인터뷰도 하고 그때는 상당히 활발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 최초의 TV 아나운서이신 최창숙 사모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봤다. 위진록 선생: 이 사람은 원래 KBS에서 아나운서를 하다가요. 저하고 결혼한 것은 1952년입니다. 부산 시절입니다. KBS가 부산에 와 있을 때에요. 그전부터 아는 사이 지먄 그때 결혼을 하고 1956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TV 방송이 시작됐지요. 일본에 있으면서 잠깐 다니러 갔을 때 부탁을 받고서 최초의 TV 아나운서를 했습니다.

위진록 선생의 평생 방송인으로서의 회고도 들어본다.

위진록 선생: 제 기억에 남는 건, 지금도 감회가 남다른 방송 프로그램은 역시 김구 선생님 장례식 때 하관식을 담당했습니다. 민재호 선생님이라고 유명한 아나운서가 계셨지요. 우리의 대 선배이신데요. 그분은 서울운동장에서 장례식 중계를 하고 홍양보 아나운서라고 저희 선배님이 을지로에서 장송 행진을 중계방송하고 제가 효창공원에서 하관식을 중계했는데요. 김구 선생님 관이 땅에 묻히던 때 흑을 삽으로 떠서 묻을 때에 관 뚜껑을 치던 소리 ‘또 땅땅 ‘거리던 소리를 제가 엎드려서 중계방송 하면서 전국 국민에게 이 소리를 들으라고 그렇게 부르짖던 생각이 지금 제일 감명 깊게 생각납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6.25남침의 최초 방송한 위진록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