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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재미한인 최연홍 교수의 삶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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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홍 교수의 영문 회고록 ‘나의 노래: 코리안-아메리칸의 삶(Song of Myself: A Korean-American Life)’ 출판기념회가 지난 2010년 4월 11일 열렸다. 최 교수는 1968년 70달러를 들고 시애틀에 유학을 와서 80년대 초반 워싱턴으로 이주, 이곳에서 36년을 살았으며, 가난한 시대를 살아온 이민 1세대의 꿈과 아픔을 2세, 3세들에게 전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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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DC 제퍼슨 기념관을 둘러 보는 최연홍 교수.

 

최연홍 교수는 시인, 영문학자, 정치학자, 환경학자, 문필대사 등 따라다니는 그의 명성은 많지만, 시인으로의 삶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2013년에 12명 한인의 영시를 모은 I Am Homeland를 발간해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재미한인 최연홍 교수의 공직에서의 삶과 행복의 이야기로 함께한다.

최연홍 교수의 이력이 궁금하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함께 들어보자!

최연홍 교수: 저는 1941년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에서 태어나서 국민학교 시절인 10살 때 한국전쟁을 경험했고, 수복 후에는 서울 중앙중학교에 유학해서 공부하다가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에 입학해 졸업했고, 졸업 후에 ROTC 1기생으로 육군 소위로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연세대학교 대학원으로 돌아와서 석사 학위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 후에 필리핀 국립대학에 장학생으로 뽑혀서 1년 유학생활을 했고, 그 후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 와서 72년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에 정치학, 행정학 공부를 했던 과정 중에 제가 전공했던 분야는 환경정책 분야였고, 졸업 후에는 위스콘신 대학에서 가르치고 노폭에 있는 버지니아 OLD DOMINION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1981년 와인버거 국방장관실에 환경정책 보좌관으로 워싱턴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 후에 워싱턴 시립대학에서 강의하다 1996년부터 2006년까지는 서울시립대학에 가서 마지막 제 커리어의 10년을 서울에서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전공은 환경정책, 정치학, 행정학 분야이지만 제가 유년 시절부터 사랑해왔던 문학으로 제 인생을 지배해 왔기 때문에 지금도 제가 시인이나 문필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 학자로서 그리고 한 시인으로서 살아왔다고 본다면 아마 시인의 무게가 학자의 무게보다 조금 더 많은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연홍 교수가 인디애나 대학에서 환경행정을 공부하게 된 계기를 들어본다.

최연홍 교수: 처음 68년 인디애나에 와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제가 한국에서 컴퓨터라는 말도 들어보지도 못했고 환경 정책이나 행정이란 말도 들어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인디애나 대학에 환경행정이라는 과목이 있어서 이 과목에서 무얼 공부하는가? 스승에게 찾아가서 물었더니 제 얼굴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자기 BRIEF CASE(서류가방)에서 NEWYORK TIMES를 꺼내 시더니, “너 한강에서 이상한 물고기가 잡히고 환경이 극심한 나라인지 모르고 여기를 왔느냐!”라는 얘기를 미국 교수로부터 듣고, 제가 떠났던 한국이 이미 환경오염이 심각하고 영등포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대기 오염이 심각한 지대라는 것을 인디애나 대학에 와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앞으로 이 분야를 개척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아마 제가 한국의 사회과학자 중에서는 처음으로 환경정책 환경행정을 전공한 한국인 학자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 교수는 인디애나에서 함께 수영하던 친구가 멕시코 올림픽에서 금메달 8개를 따왔다는 이야기는 문화적인 충격으로 간직하고 있단다.

최연홍 교수: 물론 제가 한국을 떠났을 때는 한국은 참 가난한 나라였고 인디애나에 와서 많은 문화적인 충격을 받은 것 중의 하나는 아직도 안 잊어버리고 있는데 (Mark Andrew Spitz) 마크스피츠라는 수영선수가 저하고 같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올림픽 선수로 뽑혀서 그때 멕시코 올림픽에 가서 혼자서 금메달 8개를 받아왔을 때 아직 한국은 금메달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이런 충격, 인디아나 대학의 전체 예산이 한국의 예산보다 더 컸던 시대를 저는 경험하면서 미국이라는 사회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돌아가겠다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처음에 미국에 올 때는 방랑하는 김 삿갓처럼 가장 가난하고 모자라고 어려운 나라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에 와서 한 4년 유람하고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어쩌면 한 젊은 시인의 객기로 미국 유학에 나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중에는 더 학문적으로 전문적으로 제가 공부하는 분야를 심층 있게 파고들었습니다.

최연홍 교수가 학창시절 정치학을 공부한 이야기다.

최연홍 교수: 제가 소속된 과는 정치학과였는데 정치학을 영어로 POLITICAL SCIENCE 정치과학이라고 표현을 하는 그 대목에서 미국에 정치학은 과학화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요. 컴퓨터로 계량화하는 과학적인 정치학, 그러니까 언어나 철학적인 정치학보다는 실증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분야, 학문적인 사회과학의 한 분야, 증명할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계량화 할 수 있는 학문은 과학이 아니다 이런 모토가 지배적이었던 60대 후반, 70년대 와서 저는 정치학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만, 그 방법론적인 접근, 그런 쪽에서 수량화 계량화 콤퓨터라이즈 할 수 있는 통계분석 쪽에 많은 공부를 했고 다양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때 만난 교수 중에 한 분은 몇 년 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고 작고하셨습니다만, 최근에요. 엘린 오스트람이라는 여자 교수가 저에게 처음 계량화된 공부 해야 된다. 수량화된 정치학을 공부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까 거의 통계적인 처리 방법론적인 접근, 증명할 수 있는 가설을 어떻게 세우고 증명해 나가나 이런 전공 분야에 학문적인 그런 마인드라고 할까 접근 방법을 새롭게 많이 배웠던 시대였습니다. 학생 시절에요.

최 교수는 1981년 한인 이민자가 그렇게 많지 않던 시절, 미국 국방장관 환경정책 보좌관으로 일하게 된다.

최연홍 교수: 제가 케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이었던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대학에서 국방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때 저의 직위는 환경정책 보좌관이었고 제가 주로 맡았던 분야는 방사성 폐기물 처리를 어떻게 해서 주 정부와 함께 협력체제를 갖추어서 저 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주 단위로 움직이는 폐기물 처분장에 보낼 수 있는가, 이런 외교관적인 조금은 학문적인 미션을 가지고 50개 주의 대표들과 주의 연합체 인사들과 교류했던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고요.

최연홍 교수는 미국에서 관리로서 기여한 일도 소개해준다.

최연홍 교수: 제가 국방장관실에서 환경정책보좌관으로 있을 때만 해도 아직 한국인이 장관실에서 근무하는 분이 없었을 때여서 그랬는지 많은 주목을 받았었습니다만, 제가 국방부 안에서 크게 기여했다면 국방과 환경이라는 논문 여러 편을 환경 전문 학술지에 발표하면서 군인도 사람이고 군 기지도 하나의 작은 도시와 같은 사이즈이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이라든가 화학 폐기물이라든가 그리고 일반 쓰레기가 가 같은 거다. 군인들도 물을 마시고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지만, 모두가 다 쓰레기는 감량화해야 하고 재사용 가능한 쓰레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면서 현대적인 환경 법이 제정되기 전에 미국의 무기 창고나 무기상에서 만들어졌던 거기서 쏟아졌던 화학 폐기물 같은 것은 그냥 아무 기록이 없이 군기기 근처 야산에 묻고 했던 것을 다시 찾아내서 어떻게 하면 지하수 오염을 가능한 한 줄일 수 있는가! 완전히 청소하기는 너무 많은 비용이 들었고 그래서 더 이상 지하수나 토양을 오염하지 않는 콘테인맨트 정책을 제가 수립했고 환경 국방 기지 중에서 육해공군 해병대 기지에서 환경을 잘 관리하는 기지를 선정해서 매년 환경상과 자연보존상을 마련했던 것이 제가 80년대 초반에 국방부의 한 관리로서 기여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최연홍 교수는 아직도 해야 될 과제가 있다고 한다.

최연홍 교수: 제 꿈이 글 쓰는 거지만, 친구들한테 당신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고 미국에서 시집으로 내는 것을 우리가 더 늙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이고요. 미국 안에 들어와서부터 쓴 것은 시애틀에 돈 70달러 들고 와서 살았던 것은 SONG OF MY LIFE: A KOREAN-AMERICAN LIFE 라고 몇 년 전에 제가 70살이 됐을 때 펴낸 책이 있는데 한국에 가서 살았던 10년이 제가 젊은 시절에 한국을 떠나서 다시 55살에서 65살까지 한국에서 살았는데 그 기간이 한국에도 격동기였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래서 그런 조국의 내가 가서 봤던 마지막 10년을 어떻게 적어 나갈까 하는 게 저 하나 미래 과제라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재미한인 최연홍 교수의 공직에서의 삶과 행복의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