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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6.25 참전용사 김석춘 선생의 인생과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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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용사 김석춘 선생
사진-김석춘 선생 제공

 

한국전쟁 참전용사 김석춘 선생은 2011년 김익창 박사가 발간한 사선을 넘어서 책 부록에 한국전쟁 참전용사 김석춘의 전투일지로 한국 전쟁의 참화를 2세들에게 알렸는데, 김석춘 선생은 전투일지를 포함한 자신 삶을 뒤돌아보는 책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를 작년에 발간했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살면서 학창시절 이야기와 해방 의 어려웠던 삶도 진솔하게 전하고 있다. 김석춘 선생은 1987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 현재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6.25 참전용사 김석춘 선생의 인생과 지혜 이야기로 함께한다.

김석춘 선생은 1929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무순 영안소학교와 남만 공업 중등학교를 다니다가 해방을 맞았으며, 해방 직후 인천 부둣가 짐꾼과 자유노동조합트럭운전수로 생활전선에서 억척의 삶으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1948년 육군에 입대해 수도사단 독립기갑연대 장갑 대대에 배치돼 625 한국전쟁에 참전해 1951년 명예 제대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참전용사이다. 김석춘 선생은 자신의 회고록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들려준다.

김석춘 선생: 전투일지를 쓰고 보니까요. 전투일지가 김익창 박사 자서전에 올려 졌어요. 이 전투일지가 앞, 뒤가 없어서 제일 처음에 제가 태어나서 군대에 갈 때까지 하고, 군대 갔다 와서 오늘까지가 없기 때문에 쓰기 시작했지요.

김석춘 선생에게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책 제목이 특이해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물어봤다.

김석춘 선생: 이것이 잘될지, 저것이 잘될지, 둘 다 잘될지, 알지 못하고, 내 삶의 오르막길, 내리막길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안배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매일 최선을 다해 일 할 뿐입니다라는 그런 의미에서 제목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도서 11장 6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김석춘 씨는 1950년 6월 24일 휴가를 받아 인천 선화동에서 하룻밤을 자고 6월 25일 아침을 먹고 인천 시내 극장에 간다고 나왔다. 인천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부대 주번 사령들이 군인들은 자기 본부대로 즉시 들아가라며 마이크로 외치고 다녔다고 회고한다. 바로 그날이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김석춘 선생: 우리가 살기로 인천시 선화동에 살았는데 우리 형제간이 5형제라서 동사무소에서 5형제 중에 누구라도 하나는 군에 가야 된다고 이야기해서 그래 내가 생각해 볼 때 형님 두 분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될 거고, 동생들은 학교에 다녀야 될거고, 이래서 내가 부득이 육군 독립 기갑연대에 입대했습니다. 입대하고 훈련을 마친 다음에 외출이라고 한 번 보내 줬는데 1년 가까이 돼서 외출을 갔는데.

김석춘 씨는 당시 어머니가 ‘석춘아, 점심때가 다 되어가니 점심은 먹고 가라.’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단다.

김석춘 선생: 인천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극장 구경하러 간다고 가다가 지방 사령관님 들이 군인은 전부 본대로 돌아가라! 해서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하는데 어머님은 그냥 가서 안 된다고 점심을 먹고 가야 된다고 붙잡지마는 억지로 뿌리치고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남동 기차역에서 내리니까 택시 운전기사가 군인 아저씨 빨리 차를 타시요. ‘부대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택시 운전기사가 한남동 우리 부대까지 데려다 줬습니다. 그래서 택시 운전기사가 고마웠습니다.

김석춘 씨는 전투에 나가던 날 장갑차 시동이 걸리지 않아 어려움도 있었단다.

김석춘 선생: 부대에 가니까? 쌀과 부식과 실탄 등 모든 것이 장갑차에 실려 있어요. 그래 장갑차 시동을 거니까 시동이 안 걸려요. 그래서 다른 차로 끌어와 시동을 걸었어요. 시동 걸어 출발하는데 또 한남동 고개 중턱에 가서 덜거덕 서버렸어요. 그래 왜 그런지 진단해 보니까 휘발유에 물이 섞었어요. 그래 물을 다 빼내고 다시 시동을 걸어서 가는데

김석춘 씨는 당시 서울 시가를 벗어나자 물결처럼 밀려 내려가는 피난민들로 가득했다고 전한다

김석춘 선생: 독립문을 지내서 서울 시가를 벗어 나가는데 농촌 길에 가니까 모를 심다가 오는 사람, 어린아이를 업고 오는 사람, 어떤 사람은 강아지를 안고 오는 사람, 어떤 사람은 보따리 하나 짊어진 사람 등 수 없는 피난민들이 가득했는데, 우리 군인들은 길 양 옆으로 행군해서 걸어가고 있었고 우리 장갑차가 가면 반드시 이길 거라고 민간인 군인 모두 만세를 불렀댔는데

김석춘 씨가 후퇴하면서 본 전쟁의 참화 이야기다.

김석춘 선생: 하여튼 이남에 있는 모든 자동차가 그쪽에 다 몰린 것 같았어요. 걸어오면서 보니까요. 버스 택시 안에는 환자들이, 부상병들이 가득 타고 있고, 문은 열어보니 애통해 하는 마음, 말도 못합니다. 그 하나님이나 알까? 인간으로서 다 말할 수가 없어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말로써 표현할 수 없게끔 들었는데 애통하며 살려주소 하는 사람도 있고 아프다고 고함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여기저기서 애통해 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 어쩔 수도 없고 저희야 보고만 왔지요. 와서 한강에 도달해서 풀이 많이 나 있는 사이사이로 해서 영등포까지 나오게 됐지요.

김석춘 씨는 충청도 보은 지방의 전투에서 장갑차를 구하려 적진을 돌파하던 이야기나 경주 쪽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맞았었다고 들려준다.

김석춘 선생: 장갑차 2대가 적진에 갇혀 있는데 적진 안에는 전부 인민군이 둘러싸여 있는데 저보고 짚차를 가지고 내려가서 장갑차를 구해 오라고 해서 장갑차 구하러 내려가는데 집중 사격을 받아서 그냥 머리를 조금만 들면 차는 차대로 내려가 있고 버려두고 제일 포복으로 넘어오는데 내려가는 길이 한 1,500미터 가까이 되는 걸 제일 포복으로 올라왔지요. 올라와 산을 넘어오니까 우리 장갑차 안에 운전병이 철판이 관통되어서 머리를 맞아 즉사 한 적도 있었고요. 경주 쪽 전투에서 어느 호 속에 장병을 배치해 놓고 잠자지 말고 잘 보라고 했는데 잠자면 코 비어가든지, 귀 비어가 죽는다. 이랬는데 이 두 놈이 누워 자 버렸어요. 인민군이 와서 호 속에 따발총을 쐈는데 자는 두 놈의 죽는 신음 소리에 깼는데 저는 한 5미터 떨어진 곳에 밤이었는데. 그 신음소리를 들을 적에 참 그 말도 못합니다. 그런 사건도 있었고요.

김석춘 씨가 지금도 기억하는 전투 중에 이야기다.

김석춘 선생: 인부가 밥을 지고 산으로 올라왔거든요. 배식하려고 가마니에 손을 집어넣는데 그 당시에는 비닐도 없고 해서 가마니에다 주먹밥을 해서 주먹밥 하나에다가 소고기 조그마한 것 붙여서 동그렇게 뭉처 있고 아무 종이에 싸지도 않고 빈 가마니에 넣어서 가져온 밥인데, 인부가 배식하려고 엎드려서 가마니에 손을 넣고 밥을 들어 올리는 데 인민군 포탄이 인부 등에 맞아 터졌어요. 그래서 인부의 온 시체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서 그걸 거둬서 호에 넣고 그를 묻어 주었습니다.

김석춘 씨는 군인으로서의 의무로 명령에 잘 따랐다고 들려준다.

김석춘 선생: 공산군이 얼마나 악랄하다는 것을 직접 우리가 대면했을 때 누구나 다 느끼지만, 군인으로서 마음속에 애국심이 생긴다고요. 그래서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열심히 싸우고 명령을 잘 따르고 했지요.

김석춘 씨가 1951년 제대한 후 시보레 36년형 택시운전수를 한 이야기는 억척스런 김 선생의 단면을 보게 된다.

김석춘 선생: 시보래 36년형은 어떻게 됐냐면, 군에 제대하고 집에 와보니까 집이 형편이 없어요. 살 수가 없는 상태였는데 첫째는 양식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양식을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는데, 물론 동생들도 학교도 못 가고, 밀양에서 학교에 가려니까? 돈을 좀 많이 줘야 들어간다. 그러나 인천에서 다니던 본교로 가면 돈을 안 내도 되니까 너희 둘이는 가서 공부해라! 그러면 나는 부산에 내려가 벌을 벌어서 너희 학비를 붇처줄거마 이래서 참 호주머니에 돈 한푼도 없이 군복만 입고 상의 뺐지만 달고, 그래 길거리 서서 미군 장교들의 한 차를 같이 타고 동내에 내려 줬는데 동네도 처음으로 간 곳인데 거기서 새 마당까지 50리라고 해서 50리를 걸어서 대합실에서 3일을 견댔어요. 정말 망망하게 서 있는데 어떤 사람이 탄 택시가 내 앞에 섰는데 보니까 우리 기갑연대 있다가 전쟁이 일어나기 전 3개월 전에 제대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을 따라 그 사람 주인집에 갔는데 시보레 36형이 차고에 가둬 놨어요. 왜 나뒀느냐면 이 차는 운행하기만 하면 사고 나거나 고장이 나고 운전수를 아무리 바꿔도 안된다 이거에요. 그래서 지태원 씨라는 주인이 당신이 군을 제대하고 했으니 당신이 끌고 가라 그래 취직이 돼 일을 잘 했는데 내가 끌고 가니까 아무 고장도 없고 사고도 없고 너무 일을 잘해서 그 당시 주인에게 너무 신망을 많이 받은 일이 있어요.

김석춘 씨는 그 당시 어머니의 기도가 자신을 전쟁터에서 살려준 값진 대가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석춘 선생: 군대가기 전에는 신앙을 갖지 않았어요. 내가 군데에서 여러 가지 죽음 길에서 살아난 것을 가만히 생각하면 전부 다 어떤 분의 기도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누가 기도를 했느냐 하면 우리 어머님이 종교도 없으면서 매일 아침에 찬물 떠놓고 옷 갈아 입고 머리 빗고 기도를 하는데 해가 돋을 때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 어디다 기도합니까? 하늘이 제일 높고 하늘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늘에다 한다. 그래 절도 하늘 밑에 있고 사람도 하늘 밑에 있으니까 그런 기도의 효력이 어디서 있느냐하면, 아 엄마의 기도가 나를 살렸구나해서 제대하고 생활하면서 기독교를 열심히 믿고 아내와 같이 재미나게 살지요.

김석춘 선생이 젊은이들에게 주는 충언이다.

김석춘 선생: 국민들이 다 합심해서 단결해 충성심이 가득 차야하는데 우리 한국에 촛불시위 등을 볼 때에 너무 안타까워요. 자기 조국이 없고 자기 가정이 없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요즈음 젊은이들은 가정과 조국이 어떻게 되든 간에 생각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 편안해 지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북(탈북자) 사람을 만나봤을 때 너무너무 안타까운 것이 많이 있어요. 자유라는 것은 하나도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하는 일도 절대로 알지 못하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도 마음을 맞출 수가 없는 사회인데 그런 것을 모르고 이남의 일부 사람들은 북한도 자유롭게 사는 거다 생각하는데 북한실정을 알아 북한 동포들 아픔에 함께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6.25 참전용사 김석춘 선생의 인생과 지혜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