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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사랑의 터키 한미재단의 전상복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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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터키 한미재단의 전상복 회장.
사진 제공: 사랑의 터키 한미재단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28년여 동안 ‘사랑의 터키 한미재단’을 운영해온 전상복 회장이 있다. 그는 뉴욕과 뉴저지 무료급식소 250여 곳에 터키를 선사해 온 장 본인이다. 6.25때 영국군 하우스 보이로 취직해 무료숙식하며 받았던 고마움을 지니고, 미국 유학을 온 후 자신이 받은 사랑과 혜택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미국에 감사하며 나누는 삶을 살고 자 사랑의 터키 운동을 펼치게 됐다고 말한다. 전상복 씨는 지금도 여름 계절학기에 중국 연변과기대 국제경제학과에서 부동산 증권투자 강의를, 부인 전송희 씨는 수채화 미술강의를 하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사랑의 터키 한미재단 전상복 회장의 삶의 현장으로 함께한다.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사랑의 터키 한미재단 전상복 회장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이웃을 돕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함께 들어보자!

전상복 회장: 6.25가 나면서 대구로 피난 가서 영국군 하우스 보이로 취직했습니다. 그때부터 배고프지 않고 무료숙식하며 받았던 고마움을 늘 기억하며 나도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겠다고 은연중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유학을 온 후 내가 받은 사랑과 혜택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미국에 감사하며 나누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36년 전인 1987년 스태튼아일랜드의 한 교회에서 15년 동안 봉사하면서 교회차원에서 주위 빈민층, 특히 흑인과 스페니시에게 추수감사절 터키 전달을 시작했습니다.

전상복 회장은 사랑의 터키 한미재단은 비영리 단체(FTKAF)로 활동이 시작되면서 활발해졌다고 들려준다.

전상복 회장: 1987년부터 3년간 터키 전달행사를 한 후, 뉴욕과 뉴저지로 확대하면서 본부장으로 활동했고, 창립 12년 만에 완전독립단체로서의 필요성을 느껴 이사회를 조직하고 비영리단체로 인가받았습니다. 뉴욕, 뉴저지의 교회 600군데에 편지를 보내고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영락교회, 명성교회, 부산의 교회까지 이 행사를 홍보했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돈 걷으러 왔나 하는 시선이더니 점차 알려지면서 도움이 손길이 많아졌습니다.

전상복 회장은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도 펼치고 있다고 들려준다.

전상복 회장: 북한은 약 18년 전부터 돕고 있습니다. 1998년 미국장로교 평화사절단으로 ‘1인당 50전씩’ 장로교 교인들이 모은 기금으로 쌀 300톤을 사서 평양 보육원을 찾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2012년 4월 북한, 연변 어린이를 위한 사랑의 자선음악회에서 모은 기금 약 2만 달러로 2012년 6월 12일 연변에 도착, 26일부터 29일까지 3박 4일간 북한 나진, 선봉을 방문했습니다. 밀가루 15톤, 비타민, 감기약, 소화제 등 의약품 200여 통, 사탕 20킬로그램, 과자 20상자, 아코디언 드럼 등을 3개 보육원에 전달했습니다. 그 외 병원에 폐결핵약과 항생제, 종합비타민을 전달했습니다.

전상복 회장이 지난 28여 년간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한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해준다.

전상복 회장: 한인들의 따뜻한 애정과 사랑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진 것 없이 열심히 사는 제게 적재적소마다 중요한 인물들이 나타나 도와주니 인복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인교회와 한인단체, 자영업자들, 개인, 한인들의 순수한 동참이 정말 고맙습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불경기인데도 많은 이들이 참여해오고 있습니다. 터키 한 마리 값인 단 10달러부터 시작된 작은 정성이 모여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터키 재단은 이제 한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닌, 전 한인들이 참여하여 이웃을 돕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한인단체와 개인이 십시일반으로 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인교회마다 지역 불우이웃과 홈레스에게 터키 전달 행사를 파급시킨 전상복 회장은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그리고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전상복 회장: 아내가 오랫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1936년 경북 예천에서 가난한 농민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고학으로 학업을 마쳤습니다. 경희대 경제학과를 나와 1963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후 경희대에 강의를 나가던 저는 1966년 웨인 주립대(WAYNE STATE UNIV.) 대학원에 경제학을 공부하러 도미해,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살았습니다. 6개월 후 아내도 미국으로 뒤따라 왔고, 공부를 마친 2년 후에는 꿈의 도시 뉴욕으로 왔습니다.

전상복 회장에게 미국에 와 어떤 일을 했는지 물어봤다.

전상복 회장: 저의 집사람 전송희 씨는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를 나왔습니다. 뉴욕에 온 후 여성의상 디자인회사의 패턴 메이커로서 대형 패션회사에서 장기간 일을 하며, 가정과 자녀교육을 위해 필요한 경제를 도왔고, 신학 공부를 마친 후에는 현재 뉴저지 참된 교회 선교담당 목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뉴욕증권거래소(AMERICAN EXCHANGES)에서 중책을 맡아 5년간 근무했습니다. 그 후 비즈니스에 관심이 있어서 헬스 앤 뷰티 (HEALTH AND BEAUTY)물품을 취급하는 JMS 회사 사장으로 비즈니스를 하게 되었습니다. 스태튼아일랜드(STATEN ISLAND) 한인 학교 설립 이사장, 극동아시아방송국 미동부지구 후원회장으로 섬겼습니다. 2003년부터 현재는 연변과기대 상경학부 겸직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일가친척들 이민 초청한 이야기 들어본다.

전상복 회장: 일가친척들도 다들 이민을 왔습니다. 여러 식구가 함께 살면서 이민의 터를 닦아주기까지 3일마다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워야 했고, 휴지 한 통을 하루에 다 사용해야 했습니다. 다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현재 목사, 의사, 약사, 초등학교 교장, 소방대원 등 다양한 직업을 지닌 150명의 대가족을 이루었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뿌리를 내리면서 이뤄진 대가족은 모두 기독교인으로 사랑의 터키 캠페인에 동참하고 후원하고 있습니다. 저의 아들 리차드는 건축설계사, 며느리 자스티나(JUSTYNA) 는 실내장식가, 딸 헬렌은 내과의, 사위 프랫(FREAD)은 암 전문의, 외손녀 아사벨라(ESABELLA)와 외손자 맥스(MAXWELL)를 두었습니다.

전상복 회장에게 언제까지 도움의 손길을 펼칠지 여쭤봤다.

전상복 회장: ‘이번만 가고 더 이상 가지 마세요.’ 하며 자녀들이 모자라는 기금 수천 달러를 내놓으면서 저의 건강을 걱정해도, 저는 앞으로도 대북지원사업을 계속 펼쳐나갈 것이고, 불우이웃 돕기도 멈추지 않은 것입니다.

질문: 전 회장은 지금도 길거리에 나가 모금하는 등 그래 자신은 늙을 새가 없다고 말한다.

전상복 회장: 특히 어느 해 추수감사절 터키 기금을 위해 고등학생을 비롯 21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거리에 나서 가두모금을 했고, 어느 가을에는 중견화가 11명 초청 그림전시회, 음악회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1년에 보통 2만 달러 정도를 모으면 80%는 맨해튼에 시티 하베스트(CITY HARVEST) 본부, 할렘 등지의 노숙자들과 브루클린(BROOKLYN) 빈민가, 뉴저지 센터 포 푸드액션(CENTER FOR FOOD ACTION)과 노인아파트, 무료급식소, 그리고 저소득층 한인 노인들에게, 20%는 북한과 중국 어린이를 위한 종합비타민 구입 등에 쓰입니다. 과거에는 99%가 미국인 노숙자를 위해 터키를 전달했으나 지금은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한인사회에도 여러 어른들 노인들에게 쌀과 음식으로 돕고 있습니다.

전 회장은 어디를 가든지 미국 자랑을 한단다.

전상복 회장: 저는 1972년에 시민권자가 됐기 때문에 한국에 가게 되면 조국에 대한 감사와 기쁨, 애국심이 있지만, 제2 조국인 미국에 대해서 어디를 가든지 미국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세금도 제대로 내야 한다고 이런 걸 강조합니다. 그래 미국은 대국이니까 농사를 짓게 되면 세계의 75억 명을 먹이고 남을 정도로 곡창의 국가가 아닙니까? 그리고 지하자원 많고 정말 몇백 년 몇 천 년 동안 일등국가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BRAIN이 있다는 것, 서로 위해준다는 것, 법이라든가, 모든 면에서 공정하지 않습니까? 예외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는 참 내가 많이 가졌다, 적게 가졌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간단히 하루 세끼 잘 먹고 건강하면 그걸로 감사하고, 성경에 바울 사도가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새벽기도에 갔다 와서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지냅니다.

전상복 회장은 자녀에게 신앙과 정직한 양심 한국의 얼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들려준다.

전상복 회장: 자녀에게 돈을 유산으로 주는 것보다 신앙이나 양심을, 그리고 한국의 얼을 심어줘야지 돈을 유산으로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은 주지만 가능하면 한 80%는 미국의 도서관이라든가. 박물관이든가, 선교단체든가, 월드비전 같은데 골고루 사랑과 관심을 줌으로 인해서 적은 물질이라도 주고받는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전상복 회장이 전 세계 한민족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전상복 회장: 세계에 비공식적 통계에 보면 750만 한인 동포가 있습니다. 한국의 K-POP이든가 한국 상품의 질이 좋아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이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은 기독교를 전파한 선교사들이 선교하면서, 학교 교회 병원을 세워서 교육을 잘 시킨 결과 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는 곳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일등 국민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교육에 열심히 내고,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타민족과 함께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일등 국민으로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같이 서로 나누는, 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그런 한민족이 됐으면 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사랑의 터키 한미재단 전상복 회장의 삶의 현장으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