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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조총련 탈북자 에이코 씨 증언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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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사키 에이코 씨(가운데)가 2014년 2월 스위스 제네바 유엔대표부에서 열린 북한인권행사에 증언자로 참석했다.
사진 제공: 가와사키 에이코 씨

일본 교토 출신인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조총련이 설립한 조선인학교 고급부 3학년생이던 1960년 17살의 나이에 ‘귀국선’에 올랐지만, 지상낙원으로 선전했던 북한 실정은 딴판이었으며, 김일성주석 사망 이후 대규모 기아에 시달리는 아비규환을 목격하고 탈북을 결심했다고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북한 귀국선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탄광 광산 등으로 갔는데 한 배에 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서로 알 수가 없었다고 했으며, 가족중 자살자가 나오면 나머지 가족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자살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에이코 씨는 어떻게 북송선을 타게 됐는지를 설명합니다.

: 저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어요. 17살까지 교토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17살 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혼자서 북한으로 갔어요. 왜 가게 됐느냐면, 저는 조총련 학교에 다녔거든요. 그런데 그때 당시 일본 전국에서는 귀국 사업이라는 북송 사업으로 들끓고 있었어요. 일본이라는 국가도 그랬고 조총련은 북한의 앞잡이가 되어서, 북조선은 지상낙원이다. 모든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모든 인권이 보장되어 있다고 선전을 했어요. 그래서 저도 가게 되었지요.

북한 청진항에 도착 했을 때 마중 나온 초라한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합니다.

: 일본에서는 선전할 때 북한이 상당이 살기 좋은 나라로, 지상낙원으로 선전했거든요. 그런데 청진에 배가 들어서니까? 거리 자체가 어둠침침하고 우선은 사람들이 너무나 초라했어요. 마중 나온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아주 보잘것없는 옷들을 입고 있었어요. 날씨가 추운 때인데도 양말을 신은 사람이 없었고요. 참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가난하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에이코 씨는 조총련이 선전한 지상낙원은 완전 거짓이었다고 설명합니다.

: 가기 전에 조총련에서 선전하기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모든 것이 자기의 뜻대로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했댔어요. 그런데 가 보니까? 그것은 거짓말이었어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 거의가 탄광 광산 농촌 이런 북한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중노동 하는 곳으로 보내졌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특수한 경우여서 저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거든요. 그것은 조총련과 북한 정부 사이에 아마 약속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해서 공부를 계속하게 됐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집단적으로 탄광 광산 등으로 갔는데 한 배에 온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서로 알 수가 없었어요.

당시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은 1,000 명정도 되었다고 말합니다.

: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배가 떠났는데요. 한 번에 1차 귀국선 때는 한 950명 됐고요. 그 후에는 점차 많아져서 한 천 명, 최고로 1,500명까지 북한으로 갔어요. 그래 제가 갔을 때는 한 천 명 나마 갔을 거에요.

북한에 도착한 이후 자살자가 나왔지만 얼마 안 되어 자살할 자유조차 없었다고 들려줍니다.

: 그러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랐지요. 마음대로 모든 것을 아무것도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었거든요. 직업도 마음대로 정 할 수가 없었고요. 가서 사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고 생활은 말로 할 수 없이 가난했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뭐라 할까? 정신 나간 상태였지요. 그런데 자살을 왜 할 수 없었는가? 처음에는 사람들이 무얼 몰랐기 때문에 자살을 몇 사람이 했어요. 그런데 있고 보니까? 어떻게 됐는가, 즉 사람이 자살하면 자살을 한순간부터 그 가족들은 죽은 가족을 볼 수도 없고요. 경찰에서 가마니 짝이나 하나 가져와서 두루두루 말아서 차에 훅 싣고 가 버리면 어디에 버렸는지 어디에 파묻었는지 일절 알려주지 않아요. 그리고 죽은 사람에 대한 제사도 못 지내게 하거든요. 그래 가족에서 아예 삭제해 버리라는 거에요. 그리고 몇 달이 지나면 남은 온 가족을 어디엔가 데리고 가 버린단 말이에요. 추방한다는 말을 하는데요. 그러니까 어디에 깊은 그 불편한 산골에 갔다 버린다고요. 그것을 알게 되어서 자살하고 싶어도 가족들을 위해서 자살 할 수가 없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자살할 자유조차 없었다고 말하는 거에요.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김일성이 죽자 북한도 변화되지 않을까도 생각했다고 들려줍니다.

: 지난 1994년에 김일성이 죽었거든요. 김일성이 죽었을 때 좀 기대를 했어요. 왜냐면 그때 이미 구라파에 사회주의 국가들은 다 무너져 버렸거든요. 그래 김일성이 죽은 걸 계기로 북한 땅도 변하지 않겠나 기대를 했었어요. 주위 사람들이 말은 못하지만, 가슴속에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이 더러 있었어요. 그래 절대로 비밀이 새지 않는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 분이 저를 찾아왔거든요. 저를 찾아와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요. 그때 저는 3년 갈까요. 오래가면 5년 가겠지요. 이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그분은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마 이 나라는 좀 더 든든 할 거야 그렇게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했었어요. 결과는 그분의 말이 옳았어요. 제가 틀렸던 거지요.

김일성이 죽자 북한경제도 완전히 마비되어 거리에 시체가 나 뒹굴었다고 설명합니다.

: 그러니까 그것이 결과적으로 제가 탈북을 결심하게 될 원인이 되었다고 할까?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정말 겨우 지탱했다고 할까? 이렇게 그 나라의 경제의 마지막 힘까지 깡그리 써 버렸다고 할까? 김일성이가 죽자 경제가 완전히 멈춰 버렸거든요. 그렇게해서 배급도 안 주고 거리에 시체가 나뒹굴게 됐어요. 온나라가 정말 배고픈 사람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길가에 쓰러져 죽고 아이들이 꽃제비가 되어서 온 나라를 헤매고 다니고 그렇게 되었는데 그 원인을 만든 것이 결과는 그 금수산 기념궁전 건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