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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북한으로 간 조선왕조실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매년 7월이면 나는 6.25 때 북으로 간 조선왕조실록을 생각하지요./ 북한의 당 역사연구소에서는 체제유지에 필요하다면 역사적 사실을 마음대로 만들어 내거나 지워버립니다

통일문화산책 오늘은 ‘북한으로 간 조선왕조실록’에 관한 내용입니다.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에 조선왕조실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1392~1863, 472년간)까지 25대에 걸친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年月日順)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로서, 별칭은 ‘조선실록’ 이다. 다만,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대한제국의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은 총 1,894권 88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49,646,667자의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 등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매우 엄격한 규율에 따라 작성되었다.

왕의 실록은 반드시 해당 왕의 사후에 작성되었으며, 임금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 사관들은 독립성과 비밀성을 부여받아 사소한 사항까지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작성할 수 있었다.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유네스코는 1997년 우리 민족의 자랑인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이 지정은 한국이 신청하였고, 한국에 있는 실록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조선왕조실록이 2질 있습니다. 원래 해방될 때 3질이 있었는데 1질을 6.25 때 북한이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950년 7월이어서 매해 7월이면 그 탈취해간 실록을 생각하게 된다고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은 말합니다.

임채욱 선생: 네, 매년 7월이면 나는 6.25 전쟁 때 북으로 간 조선왕조실록을 생각하지요. 8.15 광복 때 우리나라에는 조선왕조실록이 3질이 있었습니다. 1질이 900여 책이 됩니다만 2질은 경성제국대학에 있었고 또 1질은 창경궁 안에 있던 장서각에 있었지요. 장서각은 왕실의 책들을 모아두던 서고였지요. 그런데 6.25전쟁이 난 후 장서각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북한으로 옮겨 간 것이지요.그 경위는 이렇습니다. 7월 초 어느 날 김일성은 북한의 이름 있는 역사학자들을 부른 자리에서 “이조실록을 구출하기 위해 동무들을 서울로 파견하려고 합니다”라고 입을 뗀 후 이 귀한 것을 가져오라고 지시를 하지요. 그러면서 전선사령관과 서울 주둔 부대지휘관에게 이들 실록확보팀의 활동에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그 역사학자들이 서울에 와서 인민군의 엄호하에 조선왕조실록을 북한으로 가져 가지요.

북한으로 가져간 조선왕조실록은 전쟁기간 중 어떻게 보관했는지

임채욱 선생: 북한으로 가져와서 평양 부근농촌에 보관하겠다니까 김일성은 최고사령부 안에 보관하라고 지시합니다. 이후 실록보관에 신경을 많이 썼겠지요. 자기들이 가져온 민족의 보물인데 잘못된다면 책임을 크게 질 일이지 않습니까? 북한은 한동안 그들도 이조실록이 있다면서도 그것이 서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묘향산 불영대로 옮겨 온 것이라고 거짓말도 합니다. 그러다가 실록 번역사업이 어느 정도 진척된 뒤에 서울에서 가져왔다고 밝히는데 그 연유를 정당화시키지요. 서울에 갔더니 실록이 흙먼지 속에서 나뒹굴고 있었다면서 이것을 한 책, 한 책 모으고 먼지를 털어 군용자동차에 정성껏 실었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불길 속에서 이 세상에서 없어질지 모르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있던 것을 가져왔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럼 이렇게 전쟁의 불길을 일으킨 원인제공자는 누군가요? 북한 주장처럼 남쪽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면 이 귀중한 것을 흙먼지 속에서 나뒹굴도록 내 팽개쳤겠습니까?

왜 전쟁 중에도 실록을 가져가려고 애썼을까요? 어떤 가치가 있는 책인가요?

임채욱 선생: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가치가 인정되는 책이지요. 먼저 규모 면에서 보면 1302년부터 1910년까지 519년간, 날짜로 18만여 일이 되는 기간의 기록으로 1800여 권 900책이지요. 우리말 번역한 원고지도 86만 매가 넘습니다. 이러한 규모는 다른 나라의 역사실록보다 포괄하는 범위가 훨씬 넓은 것이며 무엇보다 신빙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편찬은 사관들의 기록인 사초를 기본으로 하고 각 관청의 기록, 개인기록까지 대조하면서 날짜 순서로 편찬하여 내용이 구체적이죠. 이러하니 우리나라 역사나 인문분야 학문을 연구하는 북한 학자들서는 이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6.25 전쟁 이전에도 남쪽에서 실록을 가져가려고 시도한 일도 있었지요. 그 중심에 월북한 경제사학자 백 모가 있었다고 알려졌지요.

임진왜란 때 실록이 위기에 처한 경위는?

임채욱 선생: 돌이켜보면 조선왕조실록의 운명은 기구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는 실록이 4질이 있었지요. 서울, 충주, 성주, 전주 4곳의 사고에 1질씩 보관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에 있던 것 빼고는 모두 불타버리지요. 임진왜란 뒤 10년도 안 돼 살아남은 것을 원본으로 해서 다시 4질을 간행해 내지요. 이것을 서울 외에 마니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깊은 곳에 사고를 짓고 이를 지킬 승려군인까지 뽑아서 책임지게 했지요. 그러나 중간에 서울에 있던 실록과 오대산 것이 없어지지요. 서울에 있던 것은 이괄 난 때 불타고 오대산 것은 일본 동경대학으로 갔다가 관동대지진 때 불타버립니다. 6.25 때 북한으로 가져간 것은 묘향산에 있던 것이 장서각으로 옮겨 와 있던 것이지요.그때 임진왜란 때 전주에 있던 것을 그 지방 선비 안의란 분가 손홍록이란 분이 그 방대한 문건들을 집안 일꾼들을 동원해서 내장산으로 옮기고 또 옮겨 이듬해 관청에 인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감격을 맛볼 수 있을까요?

자유아시아방송의 칼럼니스트 탈북자 출신 김현아 교수는 조선왕조실록과 북한의 혁명역사를 비교해 줍니다.

김현아: 지금 북한이 혁명역사를 만들어내는 것과 비교해보면 그때 사람들이 가졌던 역사에 대한 바른 자세는 우리와 비할 바 없이 높았습니다. 북한의 당 역사연구소에서는 체제유지에 필요하다면 역사적 사실을 마음대로 만들어 내거나 지워버립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누구도 비판하거나 반대하지 못합니다. 현재도 북한에서는 6.25전쟁이 미국과 남한의 침공으로 시작되었고 김일성의 현명한 영도로 미제를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전 소련과 중국의 자료가 공개되어 6.25의 진실이 밝혀진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거짓말을 반복하면서 주민들 속에서 전쟁분위기를 고취하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