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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남북한의 수도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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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남한주민이 북한주민보다 훨씬 잘산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평양은 역사상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반역의 기록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백과사전 위키백과에 수도는 한 국가의 정치, 행정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도에는 대부분 중앙 정부가 소재해, 국가원수 등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거점을 두는 도시이며, 다만 중앙 정부의 소재와는 별도로 그 나라의 상징적 존재로 인정되고 있는 도시가 수도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서울문화 평양문화 통일문화 책 수도자랑 편 수도 지위 쟁탈전 소제목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남측 일행은 ‘평양성 사람들’이라는 공연물을 본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이것은 이영규의 소설을 작품화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에 맞서 싸운 평양 사람들의 투쟁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북한은 역사적으로 평양 사람들은 당나라의 침략 격퇴, 거란의 침략 격퇴, 몽골의 침략 격퇴, 외국의 침략 격퇴를 했다면서 평양의 대외 항쟁 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남측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보인 것도 이런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북한은 1972년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래 남한의 ‘국제적인 도시’, 평양의 ‘인민의 낙원으로 변모된 도시’라면서 서울과 평양의 역사성과 발전상을 과시하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 통일문화산책 오늘은 ‘남북한의 수도 자랑’에 대해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으로부터 알아봅니다.

서울과 평양은 분단이후 이 땅에서 끊임없이 경쟁을 하면서 수도로서의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 대강을 설명한다면?

임채욱 선생: 남북한은 1972년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상대방 도시에 가게 되니까 서로 수도로서의 자랑을 내세우게 되지요. 남쪽에서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라고 하니까 북쪽에서는 평양은 ‘인민의 낙원으로 변모된 도시’라고 내세웠지요. 서울과 평양은 사실상 분단 이전부터 이 땅에서 첫째가고 둘째가던  도시요, 오랜 고도였지요. 따라서 인물 많이 나고, 이야기 많이 생기고, 역사유적도 많고, 산천경개도 빼어났지요. 그런데 분단후 평양이 새로운 정치중심지가 되면서 서울과 평양은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한반도의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려는 쟁패전을 벌이는데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뒷받침되기 때문에 적의에 찬 쟁패전을 벌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평양이란 도시가 수도로 되어가는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요?

임채욱 선생: 대저 국가는 반드시 지리적으로 그 중심점을 갖게 마련입니다. 이게 수도이지요. 이 땅에서 그 수도는 당연히 서울이였지요. 근데 분단이 된 후에 날이 갈수록 북한지역에서는 평양이 그 중심점이 되어갔고 또 평양을 서울과 대등한 도시로 만들려 한 것이 북한 공산주의자의 최대 과제가 되기도 했죠. 김일성은 해방되던 그 해 11월에 평양을 혁명의 중심지, 북조선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꾸리도록 해야 한다면서 도로를 새로 내고, 보통강 물길공사를 하고, 수원지 확장공사를 벌이고, 극장과 영화관을 만들고, 민주선전실 수백개를 만듭니다. 1946년 9월 평양을 평안남도에서 분리해서 특별시가 되고 이후 그 영역을 넓혀서 지금은 남쪽 서울의 4배나 되는 넓이를 가지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1972년 12월 새로 평양을 북한정권의 수도로 정하기 전 까지는 서울을 수도로 부르고 있었지요. 그것은 서울이 갖는 수도로서의 상징성을 이용하려는 것이었죠. 그러다가 남북대화를 하면서 비로소 평양을 북한정권의 수도로 정해버리지요.

광복이전  두 도시가 역사적으로는 어떻게 등장합니까

임채욱 선생: 북한에서는 서울과 평양의 역사적 기원을 비교하면서 “한 세대를 30년으로 볼 때 5천년 평양이 할아버지라면 6백년 서울은 147대째 손자뻘에나 해당된다”고 하죠. 평양이 5천년이란 것은 단군이 역사상의 실제인물로 단군이 평양에서 태어나서 나라를 세운 것이 평양이니 5천년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단군이 평양에서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북한의 주장은 1993년 이후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단군을 인정하지 않았지요. 역사책에서 단군의 도읍지로 나오는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평양은 서기 427년 고구려 장수왕 때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지역에서 옮긴 후에 수도가 됐다는 것이지요. 김일성도 평양은 고구려 도읍지란 말은 해도 단군의 도읍지란 말은 안했는데 1993년 이후부터는 단군의 도읍지 왕검성은 바로 평양이란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평양 강동군에서 단군묘가 발견됐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죠. 이러고보면 서울보다 평양이 더 오랜 역사상의 수도라고 할 수 있죠. 서울은 백제 온조가 서기전 18년 지금의 송파구 방이동 일대인 하남위례성에서 건국하면서 최초로 수도가 된 것이지요. 평양이 427년 고구려 수도가 된 것에 비하면 좀 더 오래이긴 하지만 서기 475년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겨가게 되니까 493년간 백제의 수도였죠. 그러나 서울은 조선조의 도읍지가 됨으로서 삼국이 다투던 시대의 수도가 아니라 550년간 단일국가 시대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을 두고 다른 곳보다 나은 곳이란 듯으로 수선지지(首善之地)라고 하지요.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서울의 수도로서의 성격에 대해 끊임없는 시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채욱 선생: 네, 북한 역사책을 보면 조선이 서울을 수도로 정한 것에는 비판적인 언사를 퍼부으면서도 고구려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선 조선조가 서울을 수도로 정한 것을 두고는 “그들은 안팎의 적대세력으로부터 저들의 신변을 보위하며 새 왕조의 권위를 높이며 국가의 권위체제를 강화하여 전국의 인민들을 최대한 억압, 착취하는데 유리하게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말하죠. 이 말은 새 왕조를 위협하는 개성사람들의 반감 때문에 옮긴다느니, 집권자의 풍수사상 때문에 옮겼다는 조의 시비를 하는 것이죠. 반면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백제, 신라와의 접촉과 왕래가 더 긴밀하게 되어 좋으며 이 때문에 세 나라가 통일기운을 조성하게 됐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따지고 보면 대륙의 활동영역을 포기하고 한반도 안으로 들어와서 민족 후퇴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있는 것입니다.

평양이 단군의 도읍지로 비정 된다면 북한 주장대로 평양은 서울보다 더 오래된 수도가 틀림없는 것이죠?

임채욱 선생: 그렇습니다. 단군이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상의 인물이라면, 그리고 1993년 평양 강동군 대박산에서 발견된 무덤이 단군의 무덤으로 판명된다면 당연히 평양은 우리민족의 가장 오랜 수도로서의 지위를 얻는 것이죠. 그런데 대박산 무덤이  5011년 전 무덤이라는 데는 아직 남북한 학자에 의해 완전한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확한 학문적 결과가 나올 때까지 좀 더 시간의 경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테죠.

평양은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옛 부터 알려진 곳 아닙니까

임채욱 선생: 실제로 평양은 아름다운 곳이지요. 북한은 평양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매우 자랑하고 있는데요, 고려시대 평양시인 정지상(鄭知常)이란 사람이 <대동강>, <서도> 같은 시에서 평양사람과 평양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면서 자랑하거나 조선시대 평양 출신 문인 이시항이란 사람의 <서경부>란 작품을 내세워 평양찬가를 부르고도 있지요. 또 세 사람의 가상인물이 등장하여 각기 평양과 북경, 그리고 강화도를 자랑하는 이야기를 하는 <삼도부>란 시 작품도 있습니다. 그밖에 <서경별곡>, <고려가요> 같은 작품과 정도전, 김황원 등 많은 문인들이 평양을 노래하고 근대에 와서는 이광수, 김동인, 주요한, 조중환, 박계주, 양주동 등의 작품무대가 평양이었죠. 그런데 평양은 이처럼 경치 좋아서 찬탄의 대상이지만 역사상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반역의 기록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009년 강조의 난, 1135년 묘청의 난, 1174년 조위총의 난, 1233년 홍원복의 난이 있고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 난은 평양지방은 아니지만 평양주위의 서북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이지요.

자유아시아방송의 칼럼니스트 탈북자 출신 김현아 교수의 남북한의 수도 인구에 대한 설명입니다.

김현아 교수: 북한은 통계가 비밀로 되어 있는 곳이어서 평양시 주민들의 생활형편에 대한 통계자료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양의 주택사정은 1960년대보다 별로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현대적인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지만 한집에서 조부모 부모 자식이 함께 사는 집도 많고, 단칸방에서 사는 가족도 많습니다. 지을 집이 없어 남의 집에 동거하는 가구도 많습니다. 인구가 많이 늘어나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평양시의 인구는 주변 군까지 합쳐도 300만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서울은 1000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김현아 교수는 북한은 지금도 매일과 같이 남한을 비난 하지만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진짜 좋은 국가라고 설명합니다.

김현아 교수: ‘썩고 병든 자본주의사회’,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미제의 식민지’ 등 욕을 해도 남한주민이 북한주민보다 훨씬 잘산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인종, 민족, 국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나라가 진짜 좋은 국가입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