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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대중가요에 대한 남북한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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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공연 '추억의 노래'가 지난 2월 평양 인민극장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북한에선 남한에서 대중가요라 하는 노래를 대체로 유행가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학문적으로 개념상 분류를 할 때는 혁명가요와 묶어서 대중가요라고도 하지요. / 북한에선 음악생활 할 때는 고작해야 김정일이 표창하는 것밖에는 없었는데 여기(한국)선 노래 한 곡 하면 공연 출연료가 정해져 있습니다.

백과사전 위키백과에 대중음악(大衆音樂, popular music)은 현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단순함과 통속성 오락성을 지니며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이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목적을 지닌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총칭하는 말이다. 현대의 대중음악은 예술적, 사상적(혹은 종교적) 기준에 의해 기존의 순수음악(서양음악, 동양음악, 민족음악)에 대응되는 개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올해 10월 24일 유엔의 날 행사에서 한국 KBS 국악관현악단이 기념콘서트를 열었는가 하면, 뉴욕 타임스 스퀘어 광장에서는 한국 문화관광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행사에서는 태권도 시범과 부채춤 공연 등이 있었고 K 팝 공연도 있었습니다. K 팝 공연에는 도로가 마비될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통일문화산책 오늘은 K POP의 원조가 되는 한국 대중가요에 대해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돌이켜 보겠습니다.

먼저 대중가요를 정의한다면?

임채욱 선생: 우리나라 대중가요는 한마디로 일반대중들 속에 불리던 유행가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성악가들이 부르는 가곡에 비교해서 예술성보다는 오락성, 통속성이 짙은 노래들이죠.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들어오면서 창가, 동요, 가곡, 유행가, 신민요 같은 노래가 작곡돼서 불려지기 시작했는데 유행가는 주로 연극공연을 할 때 막간에서 부르던 노래였지요. 이 유행가를 1937년 8월부터는 유행가라고 부르지 않고 가요곡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이게 대중가요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내려오다가 K 팝으로 불리는 새로운 형식의 가요로도 변모하게 되는 것이지요.

최초의 대중가요는 어떻게 나오나요?

임채욱 선생: 우리나라 최초라는 유행가는 1927년 김서정이 작사, 작곡한 <낙화유수>라는 곡인데 무성영화 <강남달>의 주제곡이었죠. 이정숙이 불렀는데 2년 뒤 레코드 음반에 취입하여 널리 불려졌지요. 다음으로, 극작가 왕평이 작곡가 전수린과 함께 개성에 갔다가 고려 옛 왕궁터를 보고 그 허무함을 작사한 것을 전수린이 곡을 부친 <황성 옛터>가 있지요. 이애리수가 연극공연 막간에 이 노래를 부르면 극장은 울음바다가 됐다고 합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교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곡이 애조를 띄었고 가사가 바로 우리 민족의 설음을 표현하고 있지요. <황성 옛터>는 나라 잃은 우리 국민의 정서를 반영하여 늘 인기곡 1위를 차지하여 일제 총독부는 금지가요로 지정해서 금지곡 1호가 되지요. <황성 옛터>에 얽힌 이야기 하나 더 하지요. ‘가요황제’ 남인수는 임종 때 둘러선 동료 가수들에게 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난영, 장세정, 신카나리아, 황금심, 백설희, 김정구, 고복수, 황해, 백년설, 현인 등이 <황성옛터>를 부르는 가운데 눈을 감습니다.

대중가요가 연극공연 막간에만 불리는 게 아니라 레코드에 취입되어 가가호호로 퍼져 나가기도 하지요?

임채욱 선생: 1920년대 후반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레코드 음반생산이 가능해져서 유행가도 녹음되게 되는데 물론 이보다 먼저 레코드에 노래를 취입한 사람은 있지요. 윤심덕을 아시지요? 일본에서 음악학교를 나온 윤심덕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사의 찬미>라는 노래를 취입하는데 그게 1926년이지요. 그러나 이 곡은 창작가요는 아니었지요. 우리나라 최초 레코드 취입은 앞서 말한 <낙화유수>를 이정숙이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1929년에 녹음, 취입하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황성옛터>가 1928년 노래가 나왔지만, 레코드는 1932년에 나오지요. 뒤이어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 <찔레꽃>, <진주라 천리길>, <애수의 소야곡> 등 많은 노래가 광복되기까지 굴욕 속에 살아온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를 나타내지요.

광복 후 대중가요의 흐름을 본다면?

임채욱 선생: 대중가요는 일제 식민시기를 거치고 광복 후 희망을 품기도 하고 분단의 아픔을 노래하고 전쟁이 할퀸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뒤이어 전개되는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민주화에 발맞춰 한국인의 정서를 짚어내는 역할을 했지요. 물론 그간 대중가요는 통속적일 수밖에 없는 그 성격 때문에 가사는 저질이고 곡은 일본 왜색을 띄고 있다는 비난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건전가요로 이끌려는 꾸준한 노력 끝에 1970년대부터 국제가요제에 진출하더니 이제는 전 세계로 무대를 넓히면서 K팝으로까지 발전을 했네요.

북한에서는 대중가요를 어떻게 보나요, 또 어떤 정책을 쓰고 있나요?

임채욱 선생: 북한에선 남한에서 대중가요라 하는 노래를 대체로 유행가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학문적으로 개념상 분류를 할 때는 혁명가요와 묶어서 대중가요라고도 하지요. 그러니까 북한에서 대중가요는 광복 전 계몽기 가요와 광복 후 창작된 혁명가요를 통틀어 말한다고 봐야죠. 광복 전 계몽기 가요는 서양음악으로 창작된 창가라든가, 유행가, 가곡, 동요, 신민요 등을 묶어서 말하는 것이지요. 계몽기 가요는 처음에 혁명가요만 부르도록 하는 분위기에서는 권장되지 못했고 부르지 말아야 하는 노래였지요. 그것은 남쪽에서 주로 불린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봉건적이란 규정 때문이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1990년대가 되면 계몽기 가요도 새롭게 평가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기 전 북한에서는 전통이나 민족문화에 해당되는 것은 첫째 계승시킬 것과 둘째 보존은 해도 장려는 하지 않을 것, 셋째는 없애버릴 것으로 구분을 하고 1990년대가 되기 전까지는 어지간하면 다 없애버릴 대상으로 삼았지요. 말하자면 세 번째 기준을 적용 시킨 거죠.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이 갑자기 단군을 찾으면서부터 우리 민족적인 부분에서 많은 것을 남한과 공유하려 들었지요. 유행가에 대한 평가도 없애버릴 대상에서 두 번 째 기준, 보존은 해도 장려는 하지 않은 것까지는 된 것이지요. 유행가뿐 아니라 계몽기 가요 중 창가, 가곡, 동요, 신민요 등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는 거죠.

남한에 정착해 사는 탈북가수 김충성 씨는 남한에서 가수로서 제법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북한에서도 노래 부르던 가수였습니다. 저의 방송 ‘제2의 고향’ 프로그램에 참가해 전한 그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죠.

김충성: 한국에선 가수라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성악 배우라고 합니다. 성악배우로 활동하다가 철도성에도 좀 있었고 군대 예술단 그리고 지금은 청년협주단으로 다시 승격됐는지 모르겠는데 거기서 배우로도 활동했습니다. 제가 평양에 거주하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대한민국 국군을 도왔다는 문건이 제 뒤에 꼬리로 붙어서 평양에 살 수 없었고 제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아무리 노래를 해도 노래한 것에 대한 대가가 없습니다.

유행가에 대한 관점과 평가를 구체적으로 들어볼까요?

임채욱 선생: 유행가는 광복 전 유행가도 있고 광복 후 생겨난 유행가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물젖은 두만강>, <홍도야 울지말라> 같은 것이 광복 전 유행가라면 <휘파람>, <반갑습니다> 같이 북한정권 아래에서 창작된 것은 광복 후 유행가인 거죠. 광복 전 유행가에 대한 관점은 적어도 1990년대 이전까지는 부정적이었죠. 그러니까 <눈물젖은 두만강>,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진주라 천리길>, <나그네 설음>, <타향살이>등이 다 봉건적이고 퇴폐적이라고 배격되었지요.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이 넘어서면서 이런 노래들이 다 진보적인 노래로 평가되지요. 그건 일찍이 김일성이 “... 류행가 가운데서도 퇴폐적이 아니고 조선민요의 형식을 계승하여 만든 좀 경쾌한 노래들은 계속 부를 수 있습니다.”라고 했지만 정책을 수행하는 북쪽 일꾼들 입장에선 조심스러워 유행가를 계속 못 부르게 묶어 뒀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김정일이 이런 말을 한마디 합니다. “유행가가 지난 시기에 창작되었다고 해서 다 나쁜 것이 아니며 거기엔 인민들의 지향과 감정이 체현되어 있기에 혁명적인 사상은 없어도 민족적인 울분과 향토애, 그리고 민족적 정서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뒤에 광복 전 유행가도 좋은 노래라고 평가하지요. 평가기준은 이렇습니다. 일단 진보적인 유행가와 반동적인 유행가로 나누는데, 앞에서 퇴폐적인 유행가로 분류되던 것들도 모두 진보적인 노래로 둔갑합니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로 평가관점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적어도 광복 전 유행가에 관한 한 남북한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여지는 있겠군요.

임채욱 선생: 그렇다고 보겠습니다. 북한은 공산화 초기에 민족문화의 많은 부분은 부정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많은 것을 잃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남한만이 차지하게 두지 않고 공유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니 남북관계로 봐서는 긍정적이라고 보겠습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