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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어르신들

가정의 달 고향 그리는 실향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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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인 지난 2월 8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열린 합동망향제에서 실향민 가족이 북녘을 향해 절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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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남한에서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날을 비롯해서 어버이 날 성년의 날 등 가족과 함께하는 풍성은 계절입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가정들은 가족 단위로 나들이에 나서지만 실향민들은 항상 죄인인 양 마음 아파하며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더구나 멀리 해외에 나와 있는 실향민들은 더욱 고향 그리며 살고 있습니다.

목요대담 오늘은 실록의 계절 5월을 맞아 실향민들의 고향 그리는 이야기로 함께합니다.

먼저 워싱턴 인근에 사시는 올해 8순 되시는 심 모 씨는 17살에 엄마 곁을 떠나 엄마와 함께하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합니다.

심 모: 우리 어머니는 공부하라 공부하라 안 했는데도 저혼자 공부하니까? 참 기특하게 생각하곤 하셨는데 공부하겠다고 엄마품을 떠나온 17살 소녀가 지금 이렇게 이남에 나와서 그리고 미국에 오늘날까지 살았어요.

심 모 씨는 그래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목이 메인다고 말합니다.

: 제가 북한을 떠날 때 엄마를 떠나는 딸을 말리지 못해서 그냥 보내준 엄마가 너무 고맙기도 하고 나와서 공부도 제대로 못했지만 항상 감사하고 그래도 딸이 앞날을 위해서 남한으로 간다고 하니까 보내준 엄마가 나는 감사하고 오늘날까지 잘 살고 있고 가족들이 다 돌아가시고 그랬는데 저 혼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저는요. 이북 회령에서 태어났지만, 만주 용정에 가서 공부하고 그것이 제2의 고향이고요. 중국이 공산국가가 됐기 때문에 고향 회령으로 돌아왔는데 공부할 처지가 못돼서 그래 나 혼자 뛰쳐나온 것, 그것이 엄마에 대해서 제일 죄송한 거고 그래도 지금 잘 살고 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이고 그래요.

앞으로 통일 되면 고향에 가서 하고 픈 이야기 들려 줍니다.

심 모: 통일되면 고향에 가봐야지요. 그런데 이제는 다 돌아가시고 손자 소녀들이 있지만, 얼굴도 못 봤고, 그래 고향에 가면 모든 설명을 다하고 해야 될 것 같아요. 우리 집안에서는 혼자 오래 산 것 같아요.

멀리 미국에 살면서 어머니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심 모: 어버이날에 한 번도 선물도 못 드린 것이 제일 가슴 아프고 그리고 또 어머니의 수의를 해 놓았지만 그걸 부치지 못해서요. 북한에는 그런 걸 보낼수가 없다고 해서요. 그래 지금도 제가 가지고 있어요. 내가 죽을 때 입고 가겠다고 그랬더니 사람들은 그렇게 한 번 이름 지어논 걸 딴 사람이 입고 가는 것 아니라고요.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는 그 수의를 입고 갈려고 그래요.

통일에 대한 소망도 말합니다.

심 모: 박 대통령도 말했지만, 통일이 대박이라고 그러셨는데 그런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몇 년 내 올 것 같아요.

미국 남부에 사는 실향민 2세 최 모 씨는 통일되면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서 들려주신 고향의 향수를 맛보고 싶고, 그리고 부모님들이 일궈 놓으신 자산을 찾을 수 있을지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최 모 씨는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 들려주신 고향 이야기 들려줍니다.

최 모: 어머니는 평양의 여러 가지 특색 있는 이야기, 아버지는 신의주 이야기해 주셨는데 부모님께서 젊었을 때 고향 산천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아버지 같은 경우는 형님과 625때 헤어지고 나서 남한에 내려오셔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큰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말씀하셨고, 저희도 언젠가 통일이 되면 아버지를 모시고 갈 날이 오겠다는 막연하지만 기대는 있었지요. 아버지는 청소년기를 고향에서 보냈으니까요. 거기서 결혼하셨고요. 평양이나 신의주의 싱그러움이 나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추석 때가 되면 망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고향 산천의 경치를 잘 설명해 주셨는데요. 그리고 어머니를 만나게 될 때 신의주와 평양을 왔다 갔다 했는데 평양은 그 당시도 도시화 됐다고 봐야겠지요. 사실 평양은 기독교로 말하면 한국 기독교의 성지라고 할 정도로 활발했었잖아요. 이 두 가지를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나지요.

2세로서 부모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지 물어 봤습니다.

최 모: 그럼요. 기회만 되면 북한 고향에 가서 부모님이 말씀하셨던 그런 고향의 이야기가 생각나요. 평양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묘향산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름 그대로 묘미가 있고, 산천이 수려한 묘향산도 가 보고 싶고, 가서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서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그런 산 이구나 하는 것을 기억으로 남기고 싶고, 신의주는 학생운동이 있었던 특별한 도시 아닙니까? 기회만 되면 꼭 가서 아버지가 들려 주신 고향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만일 통일되어 고향에 가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고 여쭤 봤습니다.

최 모: 모든 곳을 다 가보고 싶지만 처음에는 부모님들의 고향을 방문하고 싶어요. 이게 여담이지만, 그쪽에 부모님들이 지금은 다 없어졌겠지만 부모님들이 일궈 놓았던 것들(토지 집)을 살펴보고 싶고요. 또 그쪽에 계신 북한 동포들 직접 만나 뵙고 싶어요. 그래 통일이 된다면 고향 분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같이 한 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부모님들이 북한에서 일궈 놓으신 자산에 대해서도 들려줍니다.

최 모: 그거 많이 이야기 하셨어요. 부모님은 저희들에게 다 펼쳐 보이시지는 않았지만 남한에 내려와서 어려운 시절이 있었잖아요. 경제적으로 어려움 말입니다. 우리가 식구가 많은데 7남매였는데 어머니가 가끔 우리가 그 자리에만 있었으면 참 너희들이 이 고생 안 했을 건데, 그때 다 고생할 때지요. 그런 기억이 나요. 그래서 서류가 있어요. 서울에 계시는 큰 형님이 가지고 계시는 데 법적인 효력이 얼마만큼 있는지 모르지만 상당한 재력을 그대로 두고 내려오셨기 때문에 망향에 대한 설움도 있었겠지만, 재산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고 봐요. 통일되면 부모님 자산을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싶지요.

북한 고향 분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지요.

최 모: 고향 이야기만 들어도 찡하네요.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오명을 벗는다는 데 앞서서 같은 민족의 같은 피를 나눈 민족으로서 정말 하루속히 통일이 이뤄져서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결속이 되어서 한민족이 돼서 이 지구상에서 길이 빛나는 민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요대담 오늘은 실록의 계절 5월을 맞아 실향민들의 고향 그리는 이야기로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