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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관련소식

미 방문 탈북자 증언① ‘지금도 북한에선’

윤요한 선교사가 2015 시애틀 탈북자 통일 선교대회에 참가한 탈북인들과 함께 하고 있다.
윤요한 선교사가 2015 시애틀 탈북자 통일 선교대회에 참가한 탈북인들과 함께 하고 있다.
RFA PHOTO/이현기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35명과 미국에 사는 탈북자 7명 등 42명의 탈북자는 미국 고향선교회 초청으로 2015년 8월 미국 항구 도시 시애틀을 방문해 미국인들과 재미동포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북한생활을 증언했으며 지난 2016년 6월에는 한인교회 초청으로 12명의 탈북자가 미국 문화 체험과 한인 교회를 돌며 북한의 참혹상을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이들 54명의 탈북자들과 동행하며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 특집방송으로 꾸밉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이 지난 2년간 북한 탈북자로 미국을 방문한 50여 명으로부터 설문지와 또는 직접 묻는 설문조사 결과 2006년부터 2012년 사이 탈북한 사람은 사무원, 노동자, 학생 순이었으며, 지도원 영화기술원 간호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증언에 참가한 탈북자들 연령은 40에서 50대 이상 된 사람들이 많았으며 응답자 모두 북한의 장마당을 이용했으며, 주로 쌀과 생활필수품 밀가루 그리고 꿀을 가지고 가 물물교환도 했으며 직접 장마당에서 물품을 판매한 경험자도 있었습니다. 찾아간 장마당은 함흥시 사포장마당, 라진 장마당, 혜산 장마당이며 사용하는 돈은 북한화폐, 중국화폐, 미국 달러와 러시아 화폐도 사용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자유아시아방송을 북한에서 들었느냐는 질문에 67세 되시는 분이 들었다고 했으며, 40대 되시는 분은 2000년 탈북해 중국에서 자유아시아방송을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시애틀 방문한 중년 남성 탈북자와 중년 여성 탈북자는 북한에서 살 때 통행에 자유가 없고 통제 속에 살았다고 증언합니다.

이 모: 첫째 내가 당원이면 세포 비서, 당조직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그다음 행정조직의 승인을 받아야 되고, 담당 보위부의 승인 받아야 되고 그리고 경찰의 승인을 받아야 되고요. 적어도 4명 정도의 승인을 받아야 그래야 움직이거든요. 자기네 그 거짓 정체가 들러날까 봐, 사람들을 완전히 거미줄처럼 딱 단속하거든요. 거짓이니까 계속 통제했거든, 그러니까 한 인생을 완전 노예로 만들었거든, 얼마나 황당해요. 그 공포정치가 두려워서 거기서는 감옥 간다. 수용소에 간다. 죽음을 말해요. / 심 모: 자유가 없다는 거죠. 말할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다닐 수 있는 내 두 다리 가지고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그런 사회이니까? 내가 스스로 뭔가를 한다는 거는 개인의 삶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다 똑같이 표현을 해야 하는 거고, 내가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갖든 상관없이 표현은 똑같이 해야 되는 거지요. 한마디 말하면 거짓을 조장하는 거지요. 나의 본심과는 다르게 말해야 된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요. 어느 순간에 내가 내 속에 말이 뚝 튀어나와서 그것이 올가미가 되어 내가 평생 다시 나오지 못할 곳에 정치범 수용소에 가야거나, 또는 내 자녀, 내 후대들에게 씻을 수 없는 정치적인 올가미를 준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자기 삶이 아닌 거지요. 그냥 하나의 허울만 있는 살아 있는 로봇 들이라고 해야 되나!

2009년에 온 가족이 탈북한 이 모 씨는 고구마밭 수확 뒤에 지스러기를 줍는 것을 보위부 요원들이 빼앗아 가는 것에 격분하고 북한을 탈출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이 모: 아버지는 40년을 당을 위해서 살았었고 당원이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받들어서 진짜 나랏일이라면 정말 다 충성을 했어요. 먹을 거가 없어요. 굶어 죽을 판이에요. 이제 그때 갑자기 머리가 돌변하더라고요. 아! 이 땅에서는 더는 못 살겠구나! 겉으로는 사회주의 사회이지만, 내부로는 악마 집단이구나 이거 악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가지고 2009년에 탈출했어요.

2012년에 탈북한 탈북 여성 이 모 씨는 북한 땅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참혹한 상황들을 증언합니다.

이 모: 저의 고향은 양강도입니다. 1994년 김일성의 사망과 고난의 행군, 세계적인 경제봉쇄 혹심한 자연재해 또한 화폐교환으로 국가에서 공급하던 배급을 갑자기 아무런 대책도 없이 주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집을 팔고 가산들을 팔아 가지고 식량구입을 위해 나갔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수많은 아이들을 꽃 제비로 만들었고, 그들에게 아빠와 엄마를 잃게 하였으며, 수많은 가정들의 행복을 짓밟았습니다. 밤에 자고 나면 산에 나는 풀도 없어서 먹지 못 해 퉁퉁 부어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있었습니다. 오늘엔 그들이 죽었지만, 내일엔 나에게도 올 수 있는 무서운 불행이 닥칠 것도 생각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수많은 사람들을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살길을 찾아 탈북하다가 국경경비대들의 총에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중국에서 북송되어 감옥에서 처형당하고, 살길이 보이지 않아 온 가족이 목매달아 죽게 하는 등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아픈 비극을 전쟁 시기도 아닌 평화 시기에 저희들이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사회주의 내 나라가 제일이라고 노래하던 그 나라에서 가장 두려운 죽음이라는 지옥으로 수많은 인민들을 몰아넣었습니다.

북한에서 1975년부터 5년 동안 일본에서 수입된 기중기 라디오를 통해 밤이나 낮이나 일하면서 남한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고 홍 모씨가 증언했습니다. 지금도 당시 들었던 남한 노래 이성애 가수의 노래 ‘사랑의 오두막집’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라디오를 들으면서 남한을 동경했지만, 막상 탈북하기까지는 30여 년이 걸렸다며 1년여 남한 생활에서 물을 사먹는 것에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인 줄을 깨달았다고 증언 했습니다.

홍 모씨 : 남한 방송에서 들었던 아직도 그 노래가 생각이 나요. 남한에서 부르는 노래, ‘찬란한 태양은 우리의 것, 찬란한 태양은 우리의 것’ 북한에는 이런 노래가 없어요. 김일성이 태양이지! 백성이 태양을 가지고 노래 할 수 없어요. / 나쁘다곤 할 수 없는데 일반적으로 한국에 와 제일 충격적인 것은 물을 돈 주고 사먹는 거에요. 우리는 물은 돈 주고 사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이게 제일 충격적이고 이게 자본주의 세계이구나! 두 번째는 화장실 화장지를 마음대로 쓰는 것이었어요. 야! 북한에서는 화장지가 없어 풀을 뜯어 항문을 닦는 사람들은 그나마 풀이 옆에 있기 때문에 다행이에요. 변 보고서는 그냥 닦지 않고 팬티를 입고 다녀요.

탈북인 강 모 씨는 한국과 중국에서 손 전화기를 통해 북한 가족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북한 내부의 소식을 잘 알고 있으며, 특히 한국 정착 탈북자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 가족들에게 보내 북한에 지하자금이 형성되고 있다고 증언 했습니다.

강 모: 요즈음 북한도 김일성 김정일 시대처럼 모든 정보가 차단 시대가 아닙니다. 어쩌면 많은 탈북민들이 한국에 오고 많은 탈북민들이 중국에 와 있으면서 여러 가지 통신 수단 손 전화기나 서신을 통해서 북한 가족들과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근간에 김정은 체제에 들어서면서 김정은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혁명적 업적을 내 놀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 어린 나이에 정권을 잡다 보니까 백성들에게 강한 이미지를 주려다 보니까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더 잔인한 공개처형이라든지 가혹하게 탄압하는 그런 행동을 하면서 북한사람들을 통제하려는 것이지요. 북한 형제들과 계속적으로 통화를 하고 중국에 가서 탈북해 나온 분들 만나다 보니까 그분들이 한 이야기입니다. 김정은 체제는 오래갈 수가 없다 하는 것은 북한 사람들 스스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지금 한국에 오고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이나 한국에 많은 선교단체를 통해서 한국의 소식이 북한에 많이 들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한류문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한류문화가 북한으로 많이 들어가면서 북한사람들이 의식이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북한사람들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유아시아방송 특집 방송1부 ‘지금도 북한에선’ 함께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미국 방문 탈북자 증언 2부 탈북자들이 겪은 미국 이야기 ’나는 보았네’ 로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