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독립운동 단체를 보는 남북한의 관점)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7-04-28

이메일
댓글
공유
인쇄
새단장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
새단장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전시관.
사진-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상해 임정은 독립되는 우리나라가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주정부를 세우려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이념과 맞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4월은 아시다시피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진 달입니다. 북한은 상해임시정부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살펴보기도 했습니다만 통일문화산책 오늘도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를 비롯해서 애국독립운동단체를 보는 남북한의 관점을 검토해볼까 합니다.

임채욱 선생: 네. 말씀하다시피 4월은 3.1독립운동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진 달입니다. 전에도 한 번 말씀했다시피 북한은 상해임시정부를 하나의 망명집단으로만 봅니다. 정부라고 차려놓고는 애국 동포들로부터 독립자금이나 걷어 들이면서 파벌싸움이나 한 집단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임시정부는 국민, 영토, 주권이란 국가성립의 3대 요건에서 먼 거리에 있긴 했지만, 조직을 가지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직접 광복군을 설립해서 적과 싸우기도 하고 국제무대에 외교적 노력도 기울린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지요.

 

북한은 임시정부에 대해서 왜 그런 평가를 하게 되는지요?

 

임채욱 선생: 상해임정은 독립되는 우리나라가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주정부를 세우려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이념과 맞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럼 북한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단체로 어떤 단체가 중심이였다고 보는지요?

 

임채욱 선생: 아마도 김일성이 세웠다는 조국광복회 같은 것을 독립운동단체 중심으로 보겠지요. 조국광복회는 1936년 5월 조직됐는데 이른바 민족통일전선으로 조직됐다는 것입니다. 민족통일전선은 민족 안에 있는 각 당, 각파, 각계각층을 다 묶어 하나로 통일시킨 정치조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향하는 정권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조국광복회는 바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민족통일전선에 입각한 단체지요.

 

조국광복회가 실제 독립운동에 기여한 부분은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조국광복회는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것 외에도 한원빈이란 독립운동가가 만주 땅 장백현에서 세운 항일비밀결사도 있습니다. 북한 문헌에 따르면 북한이 내세우는 조국광복회는 만주 통화성에 있는 동강이란 곳에서 창설됐다는데, 김일성이 10대 강령을 만들고 <3.1월간>이란 기관지도 간행하면서 우리나라 전체로 지부를 만들어 나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성원 대부분은 김일성이 지휘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과 병사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국광복회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만든 게 아니고 중국 공산당원이 창설을 주도했고 조선사람 오성륜이 실제로 참여한 것으로 정식이름이 재만한인조국광복회라고 합니다. 역사의 진실은 밝혀지겠지요.

 

그럼 결국 독립투쟁도 민족진영이나 공산진영이 따로 따로 한 것이군요.

 

임채욱 선생: 대체로 그렇다고 봐야지요. 물론 신간회처럼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함께 한 경우도 있고 광복직전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 공산진영 쪽 군사력이 들어 온 일도 있었지요.

 

그에 대한 설명을 좀 해주시죠.

 

임채욱 선생: 지금 말씀드린 신간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라고 하겠습니다. 1927년 2월에 창립됐는데 발기인 중에는 언론인, 종교인, 교육자, 조선공산당 간부 등이 있었지요. 회장은 창립총회에서 당시 명망가였던 월남 이상재를 선출했고 전 국민의 열띤 호응 속에 2년 만에 149개 지회가 전국에서 생겨나고 회원은 4만 명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좌우를 아우른 민족 최대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평가됐지요. 순회강연이나 야학을 통해 우리 국민들에게 조선사람 착취 반대, 일본사람의 조선 이민 반대, 조선사람 중심의 교육실시 등 우리 민족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일본 식민당국은 신간회의 영향력이 커지자 전국적 단위의 대규모 집회를 못 열게 하고 간부들을 체포하고 등 탄압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창립 3년이 돼 가던 시점부터 공산주의 계열 사람들은 노동자, 농민이 중심 되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신간회 해체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1년 몇 개월이 더 지난 뒤가 되는 1931년 5월 그러니까 창립 된 지 딱 4년이 되던 때 해체되고 맙니다. 국제공산주의 지도부가 신간회를 민족개량주의 단체로 보면서 좌우합작이 잘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한마디로 공산당 뜻대로 안되니까 없애버리자는 것이었지요.

 

군사분야 좌우합작도 있었다고요?

 

임채욱 선생: 좌우합작이란 개념보다 임시정부 군사조직인 광복군 안에 김원봉의 조선 의용군이 들어온 것이지요. 광복군은 중국 땅 중경에서 1940년 9월에 설립되는데 공식명칭은 한국광복군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수립 때부터 <군사조직법>을 제정했고 중국군 군관학교에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서 군인으로 양성시켜 왔으며 이런 인력으로 지청천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3개 지대가 구성됩니다.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임시정부는 바로 (1941년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합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군 200여 명도 광복군으로 편입합니다. 김원봉은 의열단 활동을 하던 강성활동가로 만주와 상해 남경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국내 총독부 고관이나 군부지휘관, 악질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지요. 그런 그가 민족진영과 힘을 합치기로 하고 광복군에 들어온 것입니다. 광복군은 대일 첩보전을 중심으로 일본 포로 심문, 선전활동을 하는 외에도 미국 첩보부대 OSS로부터 특수공작훈련을 받고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일본이 조금만 늦게 항복했으면 광복군의 국내진공이 실제로 수행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애석한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민족항일기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임채욱 선생: 우리가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실로 온갖 어려움을 겼으면서도 꺽이지 않고 일제와 싸운 애국선열들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자는 풍찬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던 독립투사들의 고초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독립투쟁을 하면서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하는 데는 각자 나름대로 덤벼들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하고,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했지요.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 의병투쟁을 하다가 나중에는 항일무장투쟁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덜 깨여서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됐다는 자각에서 애국 문화계몽을 벌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대면서 소극적인 항일투쟁도 했지요. 뜻있는 의사나 열사만 독립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농민, 노동자도 소작쟁의나 파업을 통해 항일을 하고 청년학생도 동맹휴학을 통해 반일활동을 했습니다. 민족해방운동은 이처럼 여러 형태로 진행됐는데 물론 그 구심점에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한국의 견해이고, 이를 무시하는 것이 북한의 견해이지요. 수많은 독립운동단체 가운데는 그야말로 동포들을 오히려 괴롭히는 단체도 있었고 진정으로 민족독립을 위한 일편단심 활동을 한 단체도 있었다고 봅니다. 언젠가는 그 활동상의 명암과 진실의 옥석이 정확히 가려질 것입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