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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세계의 가락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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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겔로라 붕 카르노(GBK) 스타디움에서 개막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개회식에서 남북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 연주에 맞춰 공동 입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겔로라 붕 카르노(GBK) 스타디움에서 개막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개회식에서 남북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 연주에 맞춰 공동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아리랑은 2006년 한국국민들이 뽑은 100대 민족문화상징의 하나로 됐습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안게임에서도 남북한은 공동입장을 했습니다. 남북한 선수가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할 때 아리랑이 연주됐습니다. 이제 아리랑 곡은 세계 사람의 귀에도 익은 곡이 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통일문화산책 오늘도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우리의 가락 ‘아리랑’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임채욱 선생: 네, 이번에도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국선수 100명, 북한선수 100명이 공동입장을 했지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부터 쳐서 11번째 공동입장이 됩니다. 말씀대로 외국인 중에서도 관심 갖는 사람에겐 아리랑 가락이 귀에 익은 곡이 될 것도 같습니다. 아리랑은 2012년 인류무형유산이 됐고 남북한의 비공식 국가처럼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아리랑이 공동입장 때 비공식국가처럼 정해진 경위는 어떠했습니까?


임채욱 선생: 1989년 말 남북한 체육단체 대표들은 그 다음해 중국 북경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체육회담을 열었습니다. 이 회담에서 단일팀 구성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단일팀이 될 때 사용할 깃발과 곡은 합의를 본 것입니다. 깃발은 요즘 우리가 많이 보는 한반도기고 곡은 아리랑이었습니다. 사실 아리랑은 이때 합의를 봤다고 하지만 1963년 1월에 이미 남북한 간에 정해진 것을 재확인 한 것에 불과합니다.


1963년 1월이라면 1989년보다 26년 전이고 지금으로 치면 55년 전이 아닙니까? 그 때 어떤 연유로 그런 결정이 나왔나요?


임채욱 선생: 경위는 이렇습니다. 남북한 간에 이 체육회담이 열리는 1963년 다음해 1964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올림픽대회가 열리게 됩니다. 그 때 IOC,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남북한이 단일팀을 만들어 출정하라고 종용을 합니다. 남쪽은 원하지를 않는데 북쪽은 원한다는 의사를 표명합니다. 한국은 정부수립 전인 1947년에 이미 IOC에 가입했는데 북한은 1957년에야 가입이 됩니다. 그건 한국이 한반도 유일합법정부이기 때문에 북한의 체육활동을 한국 올림픽위원회, KOC를 통해서만 하도록 돼 있어서 가입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자기들 독자적으로 출전을 못하니까 남북단일팀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공산권 국가들을 상대로 애써왔지요. 그래서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는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추진시킵니다. 이래서 남북체육대표들이 IOC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위스 로잔느에서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단일팀 국기문제, 선수선발문제 등은 합의를 못 보지만 국가만은 아리랑으로 결정됩니다.


아주 흥미 있는 회담이었군요. 국가가 아리랑으로 결정된 과정이 어떻게 됐습니까?


임채욱 선생: 처음에 북한측 대표가 50초 연주될 음악으로 하되 전반 25초는 북한곡, 후반 25초는 남한곡으로 하던가 그 반대로 해도 된다는 의견을 냈지요. 이 때 한국측 대표가 아리랑으로 하자고 제안했고 북한 측이 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IOC측은 국가가 아리랑으로 합의된 것에 회담성공을 희망하면서 국기문제, 선수선발문제를 합의할 것을 종용했으나 결국 국기나 선수선발문제는 합의를 못 봤지요. 국기문제에서 북한 측은 앞면에 태극기, 뒷면에 인공기를 붙이자고 제의했고 한국 측은 미관상 불공평하고 무거워서 펄럭이지도 못한다고 반대를 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아리랑 곡이 그런 연유를 거쳐서 남북단일팀 국가처럼 된 것이군요. 이러한 아리랑 가락이 인류무형유산이 됐습니다. 이 과정을 한 번 볼까요?


임채욱 선생: 아리랑은 2006년 한국국민들이 뽑은 100대 민족문화상징의 하나로 됐습니다. 그래서 인류무형유산으로 2011년 지정신청을 했던 것입니다. 아리랑이 남북한 모두의 가락이니만큼 북한과 공동으로 등재신청을 하려고 추진했는데 북한 통치자가 사망하는 바람에 공동추진이 못됐지요. 앞으로 한국에서는 중국조선족 아리랑도 끌어안고 북한지역 아리랑도 포용하는 한민족아리랑 센터도 세워서 아리랑을 세계적인 가락으로 발전시키려고 합니다. 실로 아리랑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우리 땅과 우리민족을 나타낼 아주 대표적인 상징이라 하겠습니다.


국제문화계는 아리랑을 어떤 관점으로 봤기에 인류문화유산으로 평가할 수 있었을까요?


임채욱 선생: 아리랑 곡이 인류보편의 다양한 사설을 주제로 담고 있으며 곡조는 단순해서 즉흥적인 모방과 편곡도 가능하고 부르기 쉽다는 것이 선택의 점수를 높였습니다. 말하자면 특정지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 국민의 가락으로 세대를 거쳐 재창조되고 여러 모습, 다양한 형태로 전해져서 내려왔다는 점도 인정 됐습니다. 무엇보다 무형유산 보호를 위한 한국의 법제도와 조직이 잘 갖춰진 점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럼 아리랑이란 이름을 가진 특정 곡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리랑가락 전반에 대한 지정이군요.


임채욱 선생: 그렇지요. 아리랑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지요. 하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아라리 계열의 메나리조를 가진 것인데 이런 전통적인 아라리 가락 말고도 1930년대 이후 새로 만들어 진 것도 많지요. 아리랑 연구가들이 꼽는 숫자는 60여 종 360곡 가량이라고 합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이지만 지역명칭을 붙인 아리랑 가락도 수십 곡입니다. 그래서 아리랑에 대한 인류무형유산 지정은 아리랑 가락 전반에 걸친 것이 됩니다.


남북한 공동입장 때 연주되는 아리랑 곡은 그 수많은 아리랑 가락 중에서 어떤 곡을 고른 것입니까?


임채욱 선생: 1920년대 아리랑입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1926년 10월에 상영됩니다. 이때부터 아리랑에 민족정서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일제는 1929년 아리랑을 금지곡으로 정합니다. 아리랑이 항일민족운동의 상징처럼 됐기 때문이지요.

아리랑은 항일민족운동의 상징으로 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면을 좀 더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임채욱 선생: 항일운동시기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이름은 바로 아리랑이였습니다. 님웨일스의 유명한 책 <아리랑>을 비롯해서 최근 독립운동가 김석, 김동진지사 항일운동 투쟁을 기록한 <아리랑은 피가 뜨거운 것이다>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들이 아리랑이란 이름으로 출판됐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마라톤 골인 때 아리랑을 읊조렸다고도 합니다. 아리랑은 항일민족운동의 상징으로도 그렇고 그야말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가락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아리랑을 우리 민족의 상징자본이라고 까지 말하고 또 누구는 아리랑을 국가로 만들고 우리나라를 아리랑공화국이라고 이름을 고치자는 말도 합니다.

분단 후 남북한에서 새로 태어난 아리랑 가락은 피눈물 흘리면서 부르던 아리랑이 아니라 행복과 기쁨이 넘쳐나는 아리랑이라고도 합니다.

임채욱 선생: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남북한에서 새로 나온 아리랑 가락만 가지고도 큰 잔치를 벌이고 아리랑이 한반도만의 가락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이 부르는 노래로 만들 때가 오리라고 믿습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