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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화랑도에 대한 남북한 인식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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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화랑마을 전시관.
사진은 화랑마을 전시관.
연합뉴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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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10월, 경상북도 경주에서 화랑마을이 생긴다는 보도입니다. 경주라면 신라의 도읍지였고 화랑이라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데도 역할을 한 청년들 아닙니까? 오늘은 화랑의 무리 화랑도(花郞徒)에 대해서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기로 하겠습니다.


임채욱 선생: 네, 저도 화랑마을이 문을 연다는 보도를 봤습니다. 지난 3월 경주시 송화산 일대에 만들어져서 7월부터 시범운영을 해오다가 10월에 정식으로 문을 여는 것이지요. 이 것은 경상북도 3대문화권사업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럼 그 규모도 크겠군요. 화랑마을 소개를 좀 더 해 주시죠.


임채욱 선생: 화랑의 문화를 보여주고 또 화랑들이 한 수련을 직접 체험도 하는 시설이 완비돼 있다고 합니다. 3대 문화사업은 지역에 따라 각기 신라문화, 가야문화 그리고 유교문화를 통해 배울 바를 본받아 새로운 것으로 거듭나게 하는 말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하는 문화사업인데, 화랑마을은 신라문화 사업의 한 축이지요. 화랑마을에는 화랑도에 대한 전시관이 있고 각종 수련시설이 있습니다. 신라의 꽃다운 청춘들이 늠름하게 무예를 연마하던 것을 체험하는 시설들이지요.


화랑의 문화라고 했는데 화랑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임채욱 선생: 화랑은 신라에서 무예를 연마하는 청소년 단체 화랑도에서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이지요. 화랑도는 화랑과 낭도로 구성돼 있는데 화랑은 말 그대로 꽃처럼 아름다운 남자라는 것입니다. 꽃처럼 아름답다는 것은 외모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청년답게 씩씩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화랑 몇 사람을 지도자로 해서 그 밑에 15살에서 18살까지의 수백명, 또는 수천명의 낭도를 둔 것이 화랑도입니다. 화랑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은 국선이라고 칭하고 화랑도 전체를 이끌게 했습니다. 화랑도가 제도로 자리잡은 것은 진흥왕때(576년)입니다. 화랑도는 산천경개를 무술을 익히고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믿음으로 벗을 사귀고 나라에 충성하는 무리로 자라게 됩니다. 나아가서 이들은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나지 않고 산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이른바 세속5계라는 것을 지키려고 했기에 이런 정신이 바탕이 돼서 나중에 신라가 3국을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요?


임채욱 선생: 삼국통일전쟁 시기에 신라와 백제가 싸운 황산벌 전투가 있습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사와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사가 황산벌,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지역인 이곳에서 싸울 때 신라군에서 화랑출신인 관창이 혼자서, 그러니까 필마단기로 적진에 달려갔다가 사로잡히지요. 너무 어려서 백제장수가 돌려보냅니다만 다시 돌진해 오지요. 관창뿐 아니고 반굴이란 화랑도 그렇게 용감하게 싸웠다고 하지요. 계백장군은 “소년도 이러하거늘 장수들이야 어떻겠는가”했다고 합니다. 신라군은 화랑들의 용감성에 힘입어 승리를 얻습니다. 김유신을 도운 가장 가까운 참모(김흠순)도 화랑출신이고 그 아들이 반굴입니다. 산천경개를 벗 삼아 전국을 다니면서 무예를 익힌 무사집단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북한에서는 화랑도를 어떻게 봅니까?


임채욱 선생: 화랑도가 생긴 유래나 화랑의 정신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긍정적으로 보지요. 2명 이상의 화랑이 청소년을 모아서 무술, 훈련, 경기 등을 집단적으로 하는데 이들 화랑도는 물욕을 버리고 약속과 신의를 숭상하며 왕과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을 미덕으로 내세웠다고 말합니다. 바르게 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상들은 예로부터 인민들 속에 전해오던 아름다운 도덕풍습인바, 신라통치배들은 이것을 봉건사회의 요구에 맞게 고쳐서 왕과 지배계급에 충실하도록 왜곡시켰다고 말합니다. 신라사회가 봉건사회라고 규정한 것이라든가 이미 있던 좋은 도덕윤리사상을 신라통치배들이 자기들 요구에 맞도록 꾸몄다고 하는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틀린 주장입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이지요.


신라통치배라든가 고구려통치배라든가 하는 표현대로 봉건시대 통치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인 것 같은데요.


임채욱 선생: 예, 그렇습니다. 역사의 발전단계에서 고대노예 사회 다음 단계가 봉건사회인데 북한역사학계에서는 삼국시대를 봉건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데 같은 봉건시대 나라인데도 신라통치자를 두고는 신라통치배란 표현도 하는데 고구려 통치자에 대해서는 고구려통치배란 말은 피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정통성 주장의 연장선에서 고구려 관련 표현에는 긍정적인 표현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럼 북한에서는 화랑마을 창설을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겠군요.


임채욱 선생: 당연히 그럴 겁니다. 화랑이 삼국통일전쟁에서 활약을 어떻게 했던 간에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것을 좋게 평가하지 않지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불완전한 통일이었고 고려가 완전히 삼국통일을 이뤘다고 보지요. 신라는 당나라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망하게 했지만 고구려 옛 땅은 차지하지 못했고 바로 그 고구려 땅에 20년 뒤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웠으니 완전한 통일을 한 게 아니라는 논리지요. 무엇보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뒤 그 땅에 눌러앉으려는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는데도 백제유민이나 고구려 유민들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주장을 하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국토의 남부지역의 통일에 불과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삼국통일에 화랑도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도 크게 평가 안하지요.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가 망할 때는 이미 압록강 북쪽 지역은 고구려통치권이 미치지 못했던 상태가 아닌가요?


임채욱 선생: 그렇습니다. 고구려사를 전공한 학자 중에는 고구려 장수왕 때 지금의 만주 땅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는데, 이게 크게 잘못됐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게 우리나라 영토를 줄인 결정적인 원인이지요. 그래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도 만주 땅에 있던 옛 고구려 영토까지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판하지만 그것이 민족문화면에서는 아주 긍정적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당시 세 나라는 사실상 말이나 문화에서 같은 민족이라고 하기에는 동일성이 아주 약했습니다. 이걸 하나로 융합시킨 것이 통일신라시대입니다. 고려가 통일을 시겼다고 하지만 신라에 의해 1차적으로 통일됐기 때문에 이 바탕에서 2차적으로 완결된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화랑도의 존재는 의미있게 평가될 수 있겠군요.

임채욱 선생: 그렇습니다. 백제나 고구려가 망할 당시 이 두 나라 결코 군사력이나 물자 생산에서 신라보다 허약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정신력에서 신라보다 떨어졌다고 봅니다.

백제가 망하고 고구려가 망하기 전인 서기 668년 6월 신라장군 김유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신라는 충성과 믿음 때문에 생존하고 있다. 백제는 오만 때문에 이미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 때문에 위태롭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해서 100여개의 성을 빼앗았지만 오만과 향락에 빠져 신라 공격에 대비하지 않았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안시성에서 당나라를 막아낸 뒤 교만에 빠져 독재를 하면서 나라를 구렁텅이로 빠트렸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약자였지만 20년 가까운 장기전에서 화랑도 정신의 충성과 믿음을 바탕으로 통합을 이뤄냈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봅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