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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말만으로는 안 된다"-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2008.9.28 (김 영봉 목사)

‘영적 여정에로의 초대’ 4
"말만으로는 안 된다"
(Not By Words Alone)
베드로전서 3:1-4, 13-17
  
(김 영봉 목사)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1.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말만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말만으로 전도하겠다는 사람, 말만으로 설교하려는 목사, 말만으로 아픔 당한 사람을 위로하겠다는 사람, 그리고 말만으로 어려운 상황을 때워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말은 유익한 도구입니다. 말은 나와 다른 사람, 나의 내면과 외면을 연결시키고 소통시키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수단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나 자신 안에만 갇혀 산다면, 나는 온전한 인간으로 성숙되기 어렵습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한자 人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말없이는 안 된다"는 말도 가능합니다.

"말없이는 안 된다"는 말도 맞지만, 인생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말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도 맞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을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속담은 말만으로도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천 냥의 빚을 지고 말만으로 그 빚을 피해 보려고 궁리를 한다고 칩시다. 채권자가 그 속셈을 알게 되면 얼마나 얄밉겠습니까? 하지만 천 냥 빚을 진 사람이 채권자를 만나 너무도 미안하고 송구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끙끙 대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미안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승에 가서라도 꼭 빚을 갚겠습니다." 이 경우, 채권자가 천 냥의 빚을 탕감해 준 이유는 말 때문이 아닙니다. 그 말에 담겨 있는 그 사람의 진심 때문입니다.

말은 말 하는 사람의 진심이 담겨 있을 때 효력을 발휘합니다. 자신의 말에 대해 책임 질 결의가 느껴질 때, 그 말이 힘을 가집니다. 하지만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껍데기 말은 입술과 혀의 움직임으로 빚어내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그런 말로는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만으로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의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거나, 자신의 경험을 반추할 능력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 깊이 들여다 본 현자(sages)들은 하나같이 말에 대해 경계합니다. 동서양의 모든 철학과 종교에서 ‘말 많음’은 곧 어리석음의 증거로 간주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혀가 풀려서 제 멋대로 말이 쏟아지지 않게 하라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말을 하려면 참된 말을 하며, 덕이 되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빈 말은 아무 쓸모가 없으며, 악한 말은 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흉기가 되며, 부덕한 말은 인생을 태워버리는 불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2.

"말만으로는 안 된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저는 목회의 속성 상 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특별히 예민합니다. 한 주일 동안 제가 회중 앞에서 뱉어내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요? 특별 새벽기도 기간 중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는 때가 되면, 마치 ‘말 설사’(diarrhea of words)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설교단에서 내려와 있는 동안 굳게 입을 다물지 않으면, 점점 진해지는 공허감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목사에게 있어서 말과의 씨름은 가장 치열한 싸움 중 하나입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할 때 침묵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추고, 말을 사용하되 말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내 말이 단순한 소리나 기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영적 싸움입니다.

‘말’이 ‘말씀’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모험이지만, 동시에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이것은 목사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이 꿈 꿀만한 모험이며 또한 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이 같은 은사를 주십니다. 혀가 풀려 쏟아지는 말들은 다만 소음일 뿐이지만, 나의 마음이 담겨 있고, 기도가 담겨 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령의 손에 들려진 말은 영적인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도구가 됩니다. 꼭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의 말이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히브리서의 한 말씀은 이 점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히 4:12).

우리의 말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치유가 되며,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이 되고,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며, 길 잃은 사람에게 지침이 됩니다. 그 말씀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어두운 곳을 밝히며, 굽은 것을 곧게 해 줍니다. 반면, 생각 없이 뱉은 빈 말 혹은 자신의 생각만을 담은 말은 상처 입은 사람을 더욱 아프게 하고,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더 좌절감을 심어주고, 슬픔을 당한 사람을 더욱 슬프게 합니다. 한 번 스스로를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말은 어떤 말입니까? 쭉정이와 같은 말입니까? 쏘는 화살입니까? 죽이는 말입니까? 살리는 말입니까?

어려움을 당한 분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교우들이 위로한답시고 던지는 말들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힐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든가, "뭔가 뜻이 있을 겁니다."라든가, "알고 보면 이것도 축복입니다"라는 식의 상투적인 위로의 말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있어서 위로가 되기보다는 쏘는 침이 됩니다. 그것은 본인들이 고난을 거쳐 가면서 스스로 깨달을 진리이지, 다른 사람이 말해 줄 진리가 아닙니다. 어려움을 당한 교우들을 대할 때, 어설픈 말로 때우려 하기 보다는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차라리 침묵하고, 대신 눈으로 말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마주 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3.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논리로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 필요하다면 그 말은 빈 말도 아니요, 암기된 말도 아니며, 인간의 논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words inspired by God)이 필요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말이 필요합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면, 전도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말만으로 하는 전도’ 때문에 "예수쟁이는 말쟁이"라는 등식이 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의 도구가 있습니다.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말씀 드렸습니다. 한 영혼을 품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둘째는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의 질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그동안 충분히 말씀 드렸습니다. 전도하려는 사람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셋째는 복음의 도를 알아듣게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이 중에서 말이 가장 무력합니다. 기도와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말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3장의 말씀에서도 같은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지 않는 남편을 둔 믿는 아내들에게, 믿는 사람답게 처신하라고 권고합니다. 남편에게 순복하고, 겉치장에 지나치게 힘쓰지 말고, 속사람을 단장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리하면 비록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남편일지라도, 말을 하지 않고도 아내 여러분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여러분의 경건하고 순결한 행실을 보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1-2절). 자신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기를 힘쓰다 보면, 말을 하지 않아도 감화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이 영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장을 읽어 내려가면 머지않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15절). 베드로 사도는 지금 믿는 사람이 고난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자신의 믿는 바를 따라 의롭게 살다가 박해를 당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는 바르고 의롭게 사는 사람을 응원하기는커녕 박해를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14절).

생각해 보십시오. 바르고 의롭게 산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형제 대하듯 공손하게 대하며, 죽음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모든 고난을 당해 내고 있다고 합시다. 이런 사람을 보면, 누군들 질문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믿기에 그렇게 당당한 거요?" 그럴 때, 자신의 희망의 이유를 말할 수 있도록 미리 생각해 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믿는 바를 말하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16절)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전도가 이와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 온유함으로 답하라고 했을까요? 인간적인 자격으로 하자면, 믿는 우리나 믿지 않는 그들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목을 곧게 세우고 목청을 높이고 침을 튀길 하등의 자격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왜 두려운 마음으로 답하라고 했을까요? 한 영혼의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나의 어눌함으로 인해 진리를 가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에서는 전도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얼마나 무례합니까? 얼마나 무신경합니까? 얼마나 독선적입니까? 얼마나 거칩니까? 우리의 전도 방법이 얼마나 성서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4.

얼마 전, 우리 교회에 오셔서 신앙 강좌를 하고 가신 김형석 교수님의 글 중 인상 깊은 대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희망의 이유를 온유함으로 그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전하는 하나의 모델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책에 있는 대로 소개하겠습니다.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요한복음을 읽고 있었다. 8장을 읽다가 "너희가 내 말에 머물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32절을 접하게 되었다. 그 말씀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읽던 [곳에 책갈피를 꽂아 놓고] 성경책을 덮어놓고 그 내용을 음미하고 있었다.

한 참 뒤, 이층에 머물고 있던 서군이 노크를 하면서 내 방에 들어왔다. 침상에 누운 채 명상에 잠겨 있는 나를 보고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내가 읽던 성경을 펼쳐서 [조금 전 읽던 부분을] 자기도 읽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말입니까? 그가 우리를 진리와 더불어 자유케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서군은 "그것이 가능한 사실이라면 믿어야지요."라면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그 날 아침 우리는 식당에서 조반을 함께하고 둘이서 산책 시간도 가졌다. 서군은 말이 없었다. 나도 성탄 아침이어서 혼자 사색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산책이 끝나고 집 현관까지 왔을 때, 서군은 "김형은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왜 한 번도 나보고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다들 열심히 전도하던데…"라고 물었다.

"나도 서형이 크리스천이 되어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내가 부족해서 같이 믿자고는 말을 못했지만…"하면서 서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제 교회에 가십니까?"

"좀 있다, 성탄 예배에 참석할 것입니다. 같이 가겠어요?"라고 물었더니, 서군은 "가야지요. 나도 믿고 싶습니다. 진리와 자유를 약속해주시는 예수를!"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함께 교회로 갔다. 예배가 끝난 뒤 서군은 "먼저 돌아가세요. 나는 혼자서 남아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라면서 예배 실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서군은 그 크리스마스 날부터 크리스천이 되었다. (김형석, <희망의 약속>, 246-7쪽).

이 일을 회고하면서 김 교수님은 서군이 회심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서군이 하루아침에 크리스천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고 고민해 왔던 것이다. 그 고뇌의 하나가 누구나 찾고 있는 진리와 자유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 해결을 축복받기 위해 서슴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이다. 만일 서군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면 전도를 받았다고 해도 크리스천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248쪽).

이 이야기를 잠시 분석해 보십시다. 김형석 교수께서 ‘서군’이라고 부르는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첫째, 기도가 있었습니다. 김 교수님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기도가 서군의 마음속에 진리와 자유의 문제를 두고 씨름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기도가 그분으로 하여금 영적으로 목말라 하도록 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 일에 몇몇 사람들이 기도로써 참여했던 것입니다.

둘째, 김형석 교수님의 행실이 있었습니다. 비록 본인은 부족하다고 느꼈고, 또 실제로 그분이 윤리적으로 완전한 상태에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진지한 모습이 서군의 눈길을 끌었을 것입니다. 뭔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을 느꼈을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서군은 김 교수님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관찰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저 사람이 분명히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예수쟁이와는 다른 점이 있는데… 왜 그럴까? 저 사람이 영원의 길을 가고 있다면, 내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인가?’ 이런 의문이 그로 하여금 김 교수님을 찾게 했을 것입니다.

셋째, 말은 그 다음에 왔습니다. 실제로 김 교수님이 서군을 전도하는 데 사용한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습니다. 그저 진솔하게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족하다는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그 정도의 말로도 전도하는 데 충분했습니다. 말은 별로 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와 행실로써 이미 충분히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5.

이 대목에 이르니, 며칠 전에 어느 교우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그분은 자신의 믿음 상태에 대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워낙 제 믿음에 자신이 없어서, 누가 ‘믿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저는 그냥 ‘교회는 다녀요’라고 대답을 해요. 누가 기도해 달라고 하면, 저는 대답을 못하겠어요. 약속한 대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 줄 자신이 없거든요. 저는 한 참 멀었죠?"

한 참 먼 것으로 따지면,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오십보백보인 셈입니다. 생각해 보면, 전도에 대해 자신하는 사람보다는 위와 같이 부족함을 느끼는 분들에게 더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형석 교수께서도 "내가 부족해서 같이 믿자는 말을 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오히려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쳐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많은 경우, 문제는 잘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이유는 소위 잘 믿는다고 자랑하며 다니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혹시 ‘이 정도면 잘 하고 있는 셈이지. 나를 좀 보라구’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조금 투박하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정 반대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 전도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반대로 ‘아, 나는 불합격이야. 어디 가서 믿는다는 소리도 못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그같이 온유하고 두려운 마음을 품고 영적 여행에 더욱 분발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고백을 품고, 성령의 감화로써 새로움을 얻고 변화되기를 갈망하며, 주님의 뒤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시다. 바른 길 위에 서 있고, 지향하는 방향이 옳으며, 앞으로 향해 걸어가고 있기만 하다면, 여러분의 그 신앙적 수줍음이 더 큰 감화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는 것은 차원 높은 인격과 도덕성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이 있다면 좋겠으나,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말은 뛰어난 논리와 언변이 아닙니다. 언변이 뛰어나고 치밀한 논리를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습니까? 피하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을 대하면 숨이 막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말은 어눌하고 논리에 허점이 있어도 진심이 배어 있고 삶의 고백이 담겨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말입니다. 허식이 없고 과장이 없이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나누는 말입니다. 그같이 투박하지만 투명한 고백 앞에서는 명석한 두뇌와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영적 파장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들어 지혜로운 사람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성경 말씀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니, 믿고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전도입니다. 바른 길 위에 서 있고, 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며, 때에 따라 속도에 차이는 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다면,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마 5: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우리가 믿는 사람들인 것을 사람들이 압니다.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안 그런 것 같지만, 속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 저 사람은 가짜구나!’ ‘아, 저 사람은 진짜구나!’ ‘아, 저 사람이 사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한 것 같구나!’

가짜 같아 보이는 사람이 ‘저는 가짜입니다. 하지만 저도 진짜가 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것으로도 감화가 됩니다. 진짜 같아 보이는 사람이 ‘저는 진짜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말 때문에 가짜 같아 보입니다. 가짜 같아 보이는 사람이 진짜인 듯 자랑하고 다니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가 처한 상태에서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또한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 앞에 그리고 이웃 앞에 진실하고 정직한 자세를 유지하며 우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와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그들을 우리의 길로 초청하면 됩니다. 전도는 결국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분이 시작하셨고, 그분이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그분의 전도에 참여하고, 진실하게 우리의 길을 걸어가며, 진솔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길에서 더욱 진보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삶의 길을 찾고 기뻐할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하늘 아버지께서는 한 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자녀들이 바른 길에 서서 복되게 사는 것보다 아버지에게 더 기쁜 일은 없지 않습니까?

구원으로 향하는 좁고 험한 길을 내신 주님,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신 주님,
저희를 도우셔서
저희의 걸음에 충실하게 하시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
저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게 하소서.
주님,
저희는 그동안 가짜처럼 살았습니다.
진짜가 되고 싶습니다.
저희의 행실과 말 속에
주님의 임재가 보이기까지
저희를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