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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정규섭 해군 예비역 제독의 6.25 회고

2010-06-18

RFA PHOTO/이현기

자택에 장식되어 있는 각종 훈장 앞에서의 정규섭 해군 예비역 제독.

1950년 6월 한국동란을 기억하십니까? 6 25동란 60년을 맞으면서 전쟁에 참가한 퇴역장병은 참혹했던 당시를 생각하면 북한의 무모한 전쟁놀이가 얼마나 비참함을 가져다 줬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증언합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울분에 떤 날을----

한 퇴역장병은 자신이6 25전쟁 참전 때가 21살이었다면서 그 참혹한 전쟁에서 전우들을 많이 잃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런데 60년이 지난 지금도 젊은 한국 군인들이 북한의 공격으로 숨져서 가슴이 아프다고 천안함 북한 공격에 대한 슬픔을 이야기해 줍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에 살면서 지금도 퇴역군인들의 활발한 활동을 하는 한국 해군사관학교 1기생인 ‘정규섭 해군 예비역 제독의 6 25 전쟁 회고’를 들어봅니다.

6 25전쟁이 나기 전 공산주의가 싫어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간 정규섭씨 그가 6 25 동란으로 한국의 귀중한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큰일을 하게 됩니다. 한국은행에 있던 금괴를 안전지역으로 옮기는 일을 신속하게 했을 뿐 아니라 대전에 있던 곡물을 안전지대로 그리고 경주 국립박물관의 국보급 보물을 안전한 지역으로 옮긴이가 바로 해군사관학교 1기생인 정규섭 소령입니다. 정규섭 예비역 제독으로부터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정규섭: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당시 저는 해군 소령으로 국방부 제3국 (관리국)에 근무하면서 6 25전쟁을 맞았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 그때 국방부 3국 국장과 제가 한국은행에 가서 그 당시 한국은행 총재 구영서 씨를 만나서 지하실에 있는 지금(地金)을 모두 진해로 후송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끝내고 우리가 대전으로 후퇴해서 또 대전에 있는 금융조합 창고에 쌓여 있는 수만석의 미곡을 전부 화차에 실어서 부산으로 후퇴시키는 일을 마치고 그리고 우리가 대구로 내려 갔었는데 우리가 대구에 있는 동안에 또 잊지못할 일은 경주가 위험하다해서 경주 국립박물관에 있는 국보급 보물들을 밤중에 (피난민들을 징집) 모두 싸서 진해로 후송한 일이 생각납니다.

정규섭 예비역 제독은6 25전쟁 60주년을 맞으면서 천안함 사건의 교훈으로 북한과 같은 전쟁광으로 행동하는 불량국가는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의 힘으로 물리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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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택에서 자유아시아방송 기자와 인터뷰 하고 있는 정규섭 해군 예비역 제독 - RFA PHOTO/이현기

정규섭
: 한국전쟁이 중단된 지 60년이 되는데 그 동안 세계는 많이 변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북한은 어떴습니까? 주민들은 굶어 죽고 어려운 지경에 있는데 전쟁준비에만 몰두하고, 이번 천안암 사건을 볼 때 지금까지 한국이 북한을 도와온 일이 이와 같은 일로다가 보상을 받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 참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됩니다. 한국 정부가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에 회부해서 유엔의 결의를 얻어서 북한의 책임을 묻고 북한을 제재하는 그런 정책을 쓰고 있는데 참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정부가 취하고 있는 모든 조치에 대해서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는 이와 같은 불량국가가 다시는 이런 만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가 제재를 하고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정규섭 씨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동생들을 돌봐야 할 큰 임무를 가졌지만, 공산주의가 싫어 국민학교 교사도 마다하고 남하했고, 하늘의 뜻인지 해군사관학교에 임관하게 되어 군인으로서 국방의무를 하게 된다. 정규섭 제독의 입대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정규섭: 저는 1925년에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공산주의가 아주 싫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교사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다시 서울에 진학 하기 위해서 삼팔선을 건너 남하했습니다. 해방(1945년)되고 나서 4개월 후인 그해 12월에 남하했습니다. 남하해서 서울에 왔는데 서울에 오니까 학교에 진학하는 것보다는 매일매일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큰 문제였어요. 그러나 어떤 기적을 바라면서 서울시내를 다닐 때 YMCA에 해군사관학교 생도 모집이라는 광고가 있어서 들어가 보니까 이제 독립된 우리 한국의 해군장교를 양성하는 해군사관학교가 시작되니까 시험 치뤄라고 해서 시험을 치르고 합격이 되어서 해군장교가 되었습니다.

정규섭 제독은 6 25당시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일과 유엔군 사령부 등에서 일하면서 자부심을 가졌다고 전해 줍니다.

정규섭: 우리는 국방부에서 전투부대들을 지원하는 군수 병참관계 일을 맡았기 때문에 한국은행의 지금(地金)을 후송한다던지 또는 쌀 후송 등 군량미를 확보하는 일을 했고, 직접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동경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에 한국 군사 사절단 한 사람으로서 파견되어 가 있으면서 한국군의 유엔군 사령관에 대한 참모로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직접 전투에 나가 싸우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못지않은 전쟁에 참여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정규섭 씨는 또 1953년에 북한에서 미그 15기를 몰고온 귀순용사 노금석씨를 만난 얘기도 전했습니다.

정규섭: 제가 동경 유엔군 사령부에 한국 군사사절단 해군 대표로 나가 있을 때 노금석(귀순용사 1호는 1953년 9월 21일 미그15기를 타고 온 당시 21세의 노금석 북한군 소위) 씨가 북한에서 미그기를 타고 한국으로 망명했는데 그 비행기를 오키나와 공군기지로 가져왔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에 노금석 씨가 있었기 때문에 동경에서 대북 방송을 맡고 있던 홍양보 기자하고 함께 오키나와로 가서 노금석 씨를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일은 우리가 동경에 있으면서 전쟁 중인데 흔한 일이 아니지요.

정규섭 제독의 군인정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규섭: 나라의 국토를 방위하는 그런 임무를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것이 군인의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해군에서는 손원일 제독께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하는 교훈을 주셨어요. 당시 교훈으로 삼고 내가 해군 장교로 근무하는 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내 몸을 바쳐서라도 우리 국가를 수호해야겠다. 그런 정신으로 장교생활을 해 왔습니다.

정규섭 제독에게 언제 가장 군인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느냐고 물어 봤습니다.

정규섭: 내가 국방부 제3국에 해군 소령으로 있으면서 그 당시 1과장이 없어서 과장 대리를 하면서 육군장교들을 거느리고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고, 그다음에 한국 군인으로서 보람을 느낀 것은 동경 유엔군 사령부에 가서 미군뿐만 아니라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의 군사 사절단 대표들이 다 나와서 우리가 같이 협력하면서 전쟁을 치러 나갔습니다. 그때 나라를 대표해서 이들과 같이 한국전쟁을 수행하고 있구나 하는 보람을 느꼈고요. 또 일본 사세보에 근거지를 두고 부산을 왕래하면서 한국 해협을 방위한 CTF 95라는 방위 후송함대가 있었어요. 그 함대 사령관과 함께 일한 것입니다.

정규섭 제독은 군인으로서 전쟁중 금성을지훈장을 받은 게 가장 자랑스럽다고 이야기 합니다.

정규섭: 금성을지훈장을 전쟁 때 받았는데 그것은 대전에서 우리가 미곡 수만석을 부산으로 내려보낼때 제가 1과장 대리로서 그일을 전적으로 맡아서 한 것에 대해서 저는 그때 뭐 이런 보상이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정말 내 힘을 다해서 그 일을 했는데 우리 김일환 장군께서 특별히 제 공로를 인정해서 국방부 장관에게 상신해서 이 훈장이 저에게 내려 졌습니다. 그리고 유엔군 사령부에 있는 동안에 끝마치고 돌아오는데 사령부에서 BRONZE STAR(동성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서는 워싱톤에서 해군무관 3년을 마치고 난 후 LEGION OF MERIT(수훈 무공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 훈장 받은 것을 명예롭게 생각합니다.

정규섭 제독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6 25전쟁은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의 전쟁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정규섭: 제가 보는 한국전쟁은 그 당시 김일성이가 한반도를 적화통일 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시작한 무모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해서 한국 젊은이들이 좀 더 앞을 내다보는 해안이 있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에 살면서 지금도 퇴역군인들의 활발한 활동을 하는 한국 해군사관학교 1기생인 ‘정규섭 해군 예비역 제독의 6 25 전쟁 회고’를 들어봤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