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다시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금년 들어서 벌써 두번째 이 강단에 서게 되니, 너무 자주 오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1월31일 권사님 및 장로님들을 세우는 예배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한달도 안되어서 다시 이곳에
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쨋든 이렇게 또 뵙게 되어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현재 저희 버지니아 연회의
Lynchburg지방 감리사로 섬기고 있는 Larry Davis 목사님의 글에서 읽은 이야기 입니다. 목사님께서 병원
원목(Chaplain)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와서 환자 한분을 만나달라는 급한 연락이 와서 병실로 달려
갔습니다. Anne 이라는 이 환자는 무릎과 Hips 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염증이 생겨서 1년 가까이 침대에 누어서
살아왔는데, 이제 입원하여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앞두고 한 혈액 검사 결과, Anne에게서 AIDS 를
일으키는 HIV 바이러스가 발견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병원의 목회자가 있는 자리에서 알리고 싶어서,
원목실에 목사님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42세인 Anne은 지금까지의 삶에서만도 넘치는 아픔과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여인이었습니다. 무릎과 Hips 문제 말고도, 마약 문제, 가정의 문제,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정말 힘들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건강마저도 치명적인 어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의사는 Davis 목사님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혈액 검사
결과 HIV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음을 알리고, 이 바이러스가 일으킬 수 있는 에이즈, 후천성 면역 결핍증에 대해 조심스럽게
설명하고는 병실을 떠났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이 충격적인 소식 앞에서 Anne은 한시간 가량을 울다 이야기하다,
울다 이아기 하다가를 되풀이 했습니다. Anne은 참으로 거칠고 힘든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어려서 가정에서 부터 학대를 당한
Anne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마약에 손을 대 보았고, 누군가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원해서 그 지방에 있는 갱단과 관계를
가져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찾아온 것은 폭행과 성적 학대, 그리고 마약에 빠져든 것 뿐이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삶을 돌이켜 보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서 그녀는 온갖 상처를 안고 병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Anne은 자신을
이지경으로 몰아 넣은 가정, 친구라는 사람들의 배신에 대해 분노를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또 자신을 이 지경에 빠지도록 버려둔
하나님께도 수없는 원망을 털어 놓았습니다. 이제 수술을 받는다 해도 여러 달 재활치료를 해야되는데, 빚 투성이의 삶에 ,
HIV 바이러스까지 발견되었으니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이 여인의 눈물과 한숨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Davis 목사님도 할말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Anne이 위로를 받겠습니까? 무슨 말로 이 여인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단 말입니까? 목사님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여러분, 상처와 아픔속에 깨어진 이 여인의 인생에 희망이 있습니까? 내일이 있습니까? 만일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I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 애가 3장에 있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5개의 탄식의 노래로 구성된 책인데, 전승에 의하면 예언자 예레미야가 기록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주
전 587년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망했습니다. 왕과 많은 지도자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은 무너지고 약탈을 당했습니다. 성안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심지어 어린이를 잡아먹기까지 하는 처참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이처럼 비참하게 무너진 예루살렘과 남왕국 유다의 멸망을 슬퍼하는 탄식과 통곡의 노래가 중요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3:19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처참하게 무너지고 망한 조국의 현실, 백성들이
당한 그 엄청난 고난과 아픔을 생각해 보면,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안타까움이 밀려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오늘
겪고 있는 현실을 보면, 희망이란 한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절대 절망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처절한 절망의
밑바닥, 헤어나올 수 없는 낙심의 심연에서 예레미야는 새로운 내일을 꿈꿉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히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진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하심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나의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그
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들은, 이 삶에로 부름 받았습니다.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인생,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고난의 밑바닥에서도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인생,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오뚜기 처럼 일어서는
이 인생에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백성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전에 절망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고난의 폭풍이 밀려와도, 우리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길, 희망의 씨앗이 우리가 주님안에서 누리는 복입니다. 은총입니다.
II
1)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 고난과 역경이 밀려올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심해야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딪친 고난과 아픔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깨어서 사는 것입니다. 고통에 사로 잡혀서 또 다른 삶의 현실과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밀어닥친 고난의 현실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 고난이 주는 아픔은 참기가 힘듭니다. 언제 이문제가 해결될 지 모르는 불확실함은 불안과 염려를 더해 줍니다. 이 고난의
현실을 외면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고통의 현장에서 도피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저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은 현실입니다. 고통은 구체적인 실재(Reality)입니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이 고통의 현실에 포로가 되면 찾아오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는 말합니다.
엄청난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마음속으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오히려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에 둘러 쌓여도, 고난의 포로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던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풍랑을 헤치고 가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밀려오는
풍랑 속에서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어떻게 할 길 없는 풍랑 앞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난과 아픔의 풍랑만
바라보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내일을 꿈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풍랑의 포로가 되지 않고, 또 다른 면을 바라보면, 이 풍랑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 길이
있습니다. 얼마전 조선일보 인터넷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 입니다. 윤희영 님이 쓴 이 칼럼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John
Kralik 이란 변호사의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John Kralik 은 한 때 인생의 막다른 상황에
몰렸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은 망해가고 있었고,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았습니다. 아들은 멀어져갔고, 은행계좌는 텅 비게
되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외로움과 우울증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너는 네가 원하는 것들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1달러짜리 은화를 주시면서 감사쪽지를 써보내면, 은화 하나를 더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인과관계의 교훈을 배웠는데, 그동안 이 교훈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John
은 매일 감사쪽지 하나씩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딸의 피아노 선생님, 머리를 깎아준 미용사, 수임료를 보내준 고객 등 그동안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감사쪽지를 써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커피전문점 아가씨에겐 "내 이름을 기억해줘 고맙다"고
썼습니다. "대기번호표 한 장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고 써 보냈습니다. 관계가 멀어진 아들에겐 "2년 전
선물 고마웠다"고 써 보냈습니다. 주소를 확인한다는 구실로 전화를 했다가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아들은 100달러짜리들이
들어 있는 봉투를 가져 왔습니다. 예전에 아버지로부터 빌렸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편지를 보냈습니다. "너에게 자랑스러움을 또
한 번 느끼게 해줘 고맙다."고.
손으로 쓴 감사쪽지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고객들은 수임료를 더
빨리 지급해주기 시작했고, 변호 의뢰 건수도 급증했습니다. John Kralik은 자신의 놀라운 경험을 모아 365 Thank
Yous 라는 책을 냈습니다.
John은 둘러 쌓인 문제와 역경의 포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밑바닥에서
그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기억했습니다. 그 순간은 바로 곰곰히 생각한 때였습니다. 그는 밀려오는 문제와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고난 너머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2) 그렇다면 고난의 한복판에서 곰곰히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밀려오는 고통과 절망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누구를 바라 보아야 합니까? 밀려오는 풍랑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오
늘 본문 말씀속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고난과 아픔을 잊을 수 없고,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 없지만,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3:22). 그 주님이야말로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3:24) 이라고. 그렇습니다. 희망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희망을 세울 수 있는 근거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반석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분의 끈질기신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희망을 일으켜 세울 다른 기초, 다른 반석은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던
제자들, 예수님 바라볼 때 희망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깨울 때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한복판에서 곰곰히 생각해야 할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가 희망을 세울 수 있는 근거이십니다. 그분의 변함이 없는 사랑, 그 분의 다함이
없는 자비, 그 주님의 영원한 사랑만이 우리의 희망이 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 지식이 아닙니다. 내
경험도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재산도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귀하지만, 내 희망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결국 사라지고, 무너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539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사실 우리 말로 번역된 가사의 후렴 부분은 본래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해 주지 못합니다.
영
어 가사의 후렴은 “On Christ the solid rock I stand,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로 되어 있습니다. 즉 “반석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나는 서리라. 그 밖에 모든 것들은 무너지는 모래들, 무너지는 모래들” 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희망을 세울
수 있는 반석이십니다. 그리스도 외에 모든 다른 것들은, 아무리 돈이 귀해도 돈도 역시 무너지는 모래입니다.
3)
그런데 여러분, 고난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 먹는다고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고통, 왜 이런 암 같은 아픔을 주시는 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차라리 이 고통을 주시지 않는 것이 낫지, 왜 고통을 주시고,
또 도와주시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병주고, 약 주시는 분이 아닌가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 질문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다는 이
생각부터 살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어떤 고난은 우리의 잘못된 판단, 우리의 실수나 탐욕, 혹은
우리의 건강하지 못한 생활 습관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그 고난의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이 어떤 상황 속에 있던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 안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
늘 본문 말씀은 이 진리를 3:31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 분의 본심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고통 당하는 것을 즐겨 보시는 가학주의자가 아니십니다. 우리가
힘들어 할 때, 그 누구보다도 힘들어 하시며 우리 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걸어온 삶의 여정에서, 특별히
육신의 연약함을 안고 싸워온 인생길에서 분명히 깨닫고 체험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고난의 밑바닥에서 신음할 때,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지치고 쓰러져 있을 때, 그 때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때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때가
아니라, 바로 가장 가까이서 우리와 함께 계신 때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 안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이 그 분의 본심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4) 이 끈질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죽음 앞에서도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안겨 줍니다.
여
러분, 우리 모두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었기에, 우리 모두에게는 죽을 때가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존재의 일부입니다. 죽기 싫다고 해서 죽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좋든지, 싫든지,
원하든지, 원하지 않던지, 죽음은 언젠가 우리를 찾아와서, 가자고 우리의 팔목을 잡아 이끌 것입니다. 그 날은 땅위의 소망이
무너지는 날입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내가 가진 모든 것과 작별을 해야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나 홀로 떠나는
길입니다. 어느 누구도 내 대신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 분명한 우리 인생의 종점에서 과연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까? 찾아오는 죽음을 미소로 맞이할 수 있는 내일에 대한 희망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여러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죽음앞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도, 우리는 흔들림없이 새로운 내일을 꿈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도 끊어지지 않는 우리 주님의 끈질긴 사랑은
죽음앞에서도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 쉬는 그 순간에, 세상의 모든 것들은 끊어져도, 우리 주님의 사랑은
여전하시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부터도 우리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 입니다. 주님의 놀라은 은총이 우리의 미래를 준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러기에 주님의 사랑을 믿는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희망의 백성들입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역경, 어떤 질병, 어떤 문제가 찾아와도 우리는 희망을 붙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왜
절망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데, 왜 낙심하십니까?
변함이 없으신 우리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새날에 대한 희망을 안고 오늘의 문제들과 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희망의 사람들 입니다. 어떤 풍파가 밀려와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희망을 안고, 오늘의 고난과 역경을
헤쳐가도록 부름 받은 희망의 사람들 입니다.
III.
다시 Anne의 이야기로 돌아가십시다. 한시간 가까이
Anne의 통곡과 원망과 탄식을 귀담아 들은 Davis목사님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Anne,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지
않겠어요?”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상 훔치던 Anne은 한동안 말없이 목사님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띄우면서 “Yes”라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날 밤 실습 중인 목사와 문제 투성의 삶에 빠져 있던 여인
Anne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두사람은 함께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는 전심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케 하소서.”
회개의 기도후 용서의 선언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In the name of Jesus
Christ you are forgiven.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당신은 용서 받았습니다.” “Christ has died.
Christ is risen. Christ will come again.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
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The body of Christ given for you. 당신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The blood of Christ given for you. 당신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훈련 과정에 있던 목사와 모든 것을 잃고 고통과 절망 속에 빠져있는 여인 Anne 은 그날 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한 선물,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Anne의 수술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Davis 목사님은 Anne 의 병실로 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Anne은 미소를 지으 면서 반가이
목사님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날 밤 성찬을 받으면서 저는 이 방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 생애 처음으로 제가 사랑받고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고통의 깊은 밤, 절망의 밑바닥에서 목사님과
Anne은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은총을 체험하였습니다. Anne은 이야기 했습니다. “목사님, I have a surprise
for you. 목사님이 놀라실 일이 있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나와서 자랑스럽게
섰습니다. 그 날은 일년 이상 침대에 누워서 살아온 그녀가 오랫만에 처음으로 걷는 날이었습니다. 그녀는 목사님께
escort를 부탁했습니다. Anne과 Davis 목사님은 한동안 병원 복도를 함께 걸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글을 끝내면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This time it was my turn to cry. 이번에는 내가 우는 차례가 되었습니다.”
버
림받고, 학대를 당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Anne에게서 피어난 새로운 삻, 그 희망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무엇이 이
여인을 일으켜 세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통과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변함이 없는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의 희망의 근거입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에게 새날을 열어 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아침 예언자 예레미야의 고백에 동참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가진 모든 것, 나의 희망.”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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