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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Live On Earth As In Heaven-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2012년 3월 25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설교 듣기 
http://www.kumcgw.org/2010new/sermons/2012/sermons_032512_hvod.asp

                               <주기도문 연속설교 "너희가 기도할 때에......"> 7

                                               "땅에서 하늘처럼 산다"
                                            (Live On Earth As In Heaven)
                                          -- 히브리서 (Hebrews) 11:8-12


1.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처럼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요? 그 뜻이 무엇인지 알기도 어렵고, 그 뜻을 실천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명한 경우도 많습니다.  예컨대,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뜻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뜻에 순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웬만한 미움은 풀기에 어렵지 않지만, 꽁꽁 뭉쳐진 증오심은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목사가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하나님의 뜻에 관한 것입니다. 사업에 대한 매우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 혹은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결혼을 하자고 하는데, 혹은 더 좋은 직장에서 오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태아에게 문제가 있다면서 의사가 임신중절 수술을 권고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이런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사도 이런 질문을 대할 때가 제일 어렵습니다.

이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도 있습니다. 이해하기 힘 든 사건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거대한 자연 재해로 인해 수 없는 사람들이 한 순간에 생명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한 참 밝게 뛰어 놀아야 할 어린 아이가 질병의 굴레 속에서 시들어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이유 없는 고난이 한 없이 연장될 때 혹은 연거푸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얼마 전, 이어령 선생의 딸 이민아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어쩌면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고난이 몰릴 수 있을까 싶습니다. 5년만에 파경을 맞은 첫 번째 결혼, 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 치는 중에 찾아온 갑상선 암, 재혼하여 낳은 아이의 자폐아 판정, 망막 상실로 인한 실명의 위기, 26세 난 큰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말기 위암 판정 그리고 53세의 때 이른 죽음. 이 고난의 굴곡 속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들을 체험합니다. 또한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아버지 이어령 박사가 회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분에 관한 기사를 읽는 제 마음은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분의 이야기는 제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여러 가지의 질문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과연, 이 많은 고난을 한 사람이 당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저는 인간이 당하는 고난이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고난도 있고, 환경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으며, 유전적인 요인이나 성장 과정에서 받은 상처로 인한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의 원인은 이렇게 여러 가지이지만, 당신의 사랑을 받는 자녀에게 그같은 고난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고 이민아씨는 다른 사람들은 흔히 경험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기적같은 은총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분에게 주신 기적적인 치유의 선물을 생각하면, 왜 다른 고난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다는 망막 손상을 기적적으로 치유해 주시더니, 며칠만에 큰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 기적적으로 눈을 치료해 주셨다면, 왜 이번에 발병한 위암은 치유해 주시지 않았을까? 그분의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 앞에서 저는 이같은 질문을 회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출간한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능력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동안 저의 질병을 여러 번 고쳐주셨기 때문에 또 고쳐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 땅에서 그 치유를 온전히 다 받아 누리지 못하고 내 몸이 죽는다 해도 저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땅에서 하늘처럼>)

이 고백 앞에서 저는 모든 의문을 접어 두고 고개를 숙입니다. 저는 그분의 믿음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그분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다만 그 고난과 은혜의 신비를 좀 더 이해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신비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앞에서 고개 숙이고 두려워 떨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이해력이 닿지 않는 저 먼 곳에 있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은 알기도 어렵고, 안다고 해도 행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분의 뜻을 살피고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세 번째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 즉 하나님의 통치권이 100% 실현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 '땅'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불완전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 대신에 인간의 욕망과 사탄의 음모가 뒤엉켜 싸우는 곳이 '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분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이 땅도 하늘처럼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주기도문의 첫 세 기도 즉 'Thou Petitions'의 순서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가장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기도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주십시오"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는 사람이라면 그분을 왕으로 섬기게 되어 있으며, 이 세상 모두가 그분의 통치 하에 들어가기를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다음, 세 번째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은 그분의 뜻을 제일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우상의 뜻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점쟁이나 무당에게 찾아가서 "이번에 직장을 옮기게 되었는데, 신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백이면 백 모두 이렇게 묻습니다. "이번에 직장을 옮기게 되었는데, 제일 좋은 직장으로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참된 믿음과 우상숭배의 차이는 관심이 어디에 가 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주일마다 교회로 모여 예배 드리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주 우리의 뜻과 다릅니다. 완전히 상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마음이 이기심으로 오염되어 있고 빗나가 있으며 비뚤어져 있음을 압니다. 마음에 솟아오르는 욕망들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 있을 때가 많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때로 큰 짐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종종 고난을 짊어 지라고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너무 두려워하지 말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 (고전 10:13)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 고난을 직면해야 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얼마만큼이나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지는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고난이 닥쳐올 때 두려워 떱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로 쫄지 말라는 것입니다. 캘커타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 헌신한 테레사 수녀가 이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저를 너무 믿지 않으시기만을 바랍니다." ( I know God will not give me anything I can't handle. I just wish that He didn't trust me so much.)

의미심장한 조크입니다. 테레사 수녀도 때로 고난을 겪으며 감당하기 힘들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 저를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테레사 수녀에게 감당할 힘을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시련의 터널을 함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쫄지 말아야 합니다. 


3.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관계하여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진실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든지 상관 없이 결국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묻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의에 대해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신 계획은 구원이요, 생명이며, 평안이요, 행복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렘 29:11)

여기서 '번영'이라고 번역된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번영'이라고 하면 물질적으로 잘 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번영'은 훨씬 더 넓은 의미입니다. 쉽게 번역하자면, "잘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도탄에 빠진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재앙을 내리기도 하시고 불같은 심판을 내리기도 하시지만, 그것조차도 우리를 잘 되게 하시려는 뜻으로 내리시는 것입니다

둘째, 뜻을 이루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진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 주제 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오해합니다. 그런 오해로 인해, 기독교는 지난 세월 총칼을 들고 약소국을 침략하여 무고한 생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게 됩니다. 

교회의 분란을 경험해 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인정하실 것입니다. 교회 분란의 가장 핵심에 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것이 목사든 장로든,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하고, 또한 자기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이 없다고 착각합니다. 그러한 착각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입에 올리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가집니다. 그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일수록 안하무인이고 무례하며 때로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우리가 아무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분은 결국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일을 아무리 방해하고 거부하더라도 그분은 결국 그 뜻을 이루십니다. 한국의 군인들은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고 힘차게 노래하지만, 시편은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시 127:1-2)

따라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러시지 않을 것 같아서 그분이 할 일을 알려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런 뜻으로 이 기도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실 것입니다. "괜한 걱정을 하고 있구나. 네가 그렇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이룰 거야. 너는 네 걱정이나 해."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이 기도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하늘 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이루실 때 저를 쓰시옵소서. 저의 모두를 아버지의 손에 내어 드립니다."


4.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그 뜻을 아는 것이 때로 매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고 이민아씨가 겪었던 것 같은 '줄고난'을 당한다 해도 그것을 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만 분명히 알면 어떻게든 견뎌 볼 것 같습니다. 갈 길이 어렵고 힘든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만 있으면 어떻게든 걸음을 내딛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게 잡히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때로 불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비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에 사람들은 솔깃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주장에도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아는 비법도 없고, 예언하는 사람들도 "아니면 그만이고!" 식이어서 믿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또렷한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하나님에게 소위 '직통 계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처럼 직통 계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해 주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자주 듣는다고 선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좋아할 것이 아니라 긴장해야 합니다. 기도 중에 또렷한 음성을 들었다 싶은 경우, 사탄에게 속은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가장 조심할 것이 '확실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한계 안에 갇힌 인간으로서 뭔가 확실한 것을 찾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입고 사는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믿음의 길에는 언제나 '모호함'(ambiguity) 혹은 '불확실성'(uncertainty)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 성격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긴가민가하고 알송달송하고 잡힐듯 말듯 한 것입니다. 그 모호함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확실한 것을 찾아 다니면 영적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그 모호함이 제거되는 것은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어날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자명한 경우도 있지만,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무리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해도 하나님은 좀처럼 당신의 뜻을 환히 드러내 보이지 않으십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유랑을 할 때처럼, 구름 기둥이 멈추면 멈추어 서고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면, 믿음의 길이 훨씬 쉽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길에는 구름 기둥도 보이지 않고 불기둥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믿음의 길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 서, 테레사 수녀에 얽힌 일화 하나를 생각해 봅니다. 요즈음 영적 생활에 대한 안내자로 존경받는 존 카바나(John Kavanaugh)가 오래 전에 캘커타에서 3개월 동안 봉사 활동을 하러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도착한 첫 날 아침에 그는 테레사 수녀를 만납니다. 수녀가 묻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존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수녀가 되묻습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확실하게 알고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Pray that I have clarity)라고, 존은 대답합니다. 그러자 수녀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예기치 않은 대답을 듣고 놀란 존을 보고 수녀가 말을 잇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Clarity is the last thing you are clinging to and must let go of.) 그러자 존이 묻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웃으며 대답합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I have never had clarity; what I have always had is trust. So I will pray that you trust God.)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확실한 목표와 로드맵(road map)을 손에 쥐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모른다면, 그분을 의지하고 따라가는 걸음이 매우 불안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제대로 안다면,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더 확실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비밀을 알았던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는 <My Utmost for His Highest> 3월 19일자 묵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이끌려 가게 될 곳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을 사랑하고 아는 것입니다. (Faith never knows where it is being led, but it loves and knows the One Who is leading.)


5.

GPS가 처음 나왔을 때, 저는 그것만 믿고 길을 나섰다가 어려움을 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위성과의 통신이 두절되거나 오작동으로 인해 먹통이 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면 꼼짝 없이 그 자리에 서 있거나, 사무실에 전화를 하여 도움을 청해야 했습니다. 정보가 잘 못 입력되어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GPS를 따라 가면서도 손에는 컴퓨터에서 뽑은 약도를 쥐고 있었습니다. GPS만 믿고 가기에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GPS 서비스를 사용하는 요즈음에는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따로 약도를 준비하지 않고 GPS만을 믿고 길을 떠납니다. 그래도 불안감이 전혀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GPS를 따라 가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처럼, 하나님은 목적지를 알려주지도, 로드맵을 마련해 주지도 않으십니다. 무작정 당신을 따라오라 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히 11:8)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하고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성능이 좋지 않은 GPS를 따라 길을 나선 사람처럼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불안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만 든든한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 대한 처음의 세 기도를 순서대로 올려야 하는 이유가 다시 한 번 분명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의 다스림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무제한의 신뢰를 바칠 수 있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모든 것을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앞에서 저는 고 이민아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부친인 이어령 선생의 말에 따르면, 그분은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믿은 것은 이 땅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죽는다면 오늘이 세상을 떠날 완벽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를 그 날까지 땅끝에 선 아이들 가슴에 사랑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이 말에서 저는 그분이 하나님께 두고 있던 무한한 신뢰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여러 번 경험한 그였기에 이번에도 그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고 믿었지만,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어느 날 문득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지금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을 믿고 가겠다는 마음의 고백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항상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이제는 유작이 되어 버린 그분의 마지막 책의 제목이 <땅에서 하늘처럼>입니다. 저는 이 제목이 그분이 걸었던 믿음의 길 그리고 우리 모두가 걸어야 할 믿음의 길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길은 이 '땅'을 걷는 길입니다. '땅'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거부하며 그분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들의 땅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인간의 욕심과 야망이 뒤엉켜 있고 그 배후에는 사탄의 음흉한 흉계가 숨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고 그분의 다스림에 자신을 내어 드리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아직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이미 '하늘'이 우리 중에 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따라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처럼 살아 결국 하늘에 이르는 길이 믿음의 길입니다.


6.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기도 드리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땅에서 하늘처럼 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저에게는 하늘 아버지의 뜻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 뜻이 저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저에게 가장 큰 행복입니다. 어떤 길이라도 걷겠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내일 무엇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오늘 아버지를 의지하고 아버지께서 인도하시는대로 가겠습니다. 저를 죽이시든 살리시든, 아버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오직 아버지의 뜻만 이루시옵소서."
믿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며 이 기도를 드린다면, 이런 뜻이 됩니다. "하늘 아버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하나님과 함께 걷게 해주십시오.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힘써 노력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세상을 위해 이 기도로 중보합니다. 그럴 경우, 이 기도는 이런 뜻이 됩니다. "하늘 아버지,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사모하게 해주십시오. 인간의 타락한 욕심과 사탄의 악한 뜻이 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도록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그같은 변화가 일어나도록 저를 도구로 사용해 주시고 교회를 사용해 주십시오."

결국, 누구를 위해 올리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 드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하늘처럼 되도록 자신의 인생을 바치겠다는 기도입니다. 내 믿음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 따라서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을 위한 세 번째 기도 역시 아주 위험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제대로 드린다면, 나의 삶의 목적이 바뀔 것이며, 삶의 방법도 바뀔 것이고, 삶의 방향도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뒤집힘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감히 입을 열어 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같은 뒤집힘은 인간적으로는 아주 위험해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진정한 희망을 얻는 길입니다. 부디, 이 위험한 기도를 마음 다해 올림으로 우리의 삶이 참된 안전지대에 이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저희 모두가
이 땅에서 하늘처럼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