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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내 기도는 너무 사치스럽다-와싱톤 한인교회 김 영봉 목사

2012년 4월 8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주기도문 연속설교 "너희가 기도할 때에..."> 8
                                                "내 기도는 너무 사치스럽다"
                                              (My Prayers Are Too Luxurious)
                                                     요한복음(John) 6:47-51

1.

Happy Easter! 부활의 은총과 축복이 교우님의 영혼에 그리고 가정과 직장에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부활 주일이긴 하지만 그 동안 진행해 온 주기도문 연속설교를 계속하려 합니다. 오늘이 특별한 주일이기는 하지만, 일년 내내, 주일은 모두 부활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40일을 계산할 때도 주일을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먼저 하나님을 위해 세 가지의 기도를 올리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세 가지 기도를 영어로 Thou Petitions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기도의 관심을 기도자 자신에게 돌려 세 가지의 기도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We Petitions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진실을 말하자면, 기도 중에 하나님을 뵙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기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면,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제목들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고 적극적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알고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써 무엇이든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때로 욕심에 눈 멀어 부정한 것을 구할 수도 있고, 분별력이 없어서 잘못된 것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늘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잘못이지만, 신앙 성장 단계에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때로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달라고 구하는 것처럼, 우리도 초보적인 단계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하기를 기대하시며 또한 도우십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 기도로써 무엇을 구할 것인지를 점점 더 명료하게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기도 제목을 세 가지로 정리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자신을 내어드리려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진정으로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마음에 품어야 할 기도 제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첫 번째의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입니다. '일용할'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는 '오늘 먹을'이라는 뜻으로 풀 수도 있고 '내일의'라는 뜻으로 풀 수도 있습니다. 어떤 뜻으로 보든, 여기서 구하는 것은 두고 두고 먹을 풍족한 양식이 아니라 삶을 위한 기본적인 양식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면서 "오늘 하루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무심코 이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 무심코 기도할 내용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대부분은 하루 먹을 양식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제 말씀을 듣는 분 중에 하루 끼니가 없는 분이 계시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교회가 도울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 끼니 정도는 걱정하지 않고 삽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 정도는 먹을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이 기도를 계속 드려야 합니까?

이 질문은 기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 구합니까? 나에게 그것이 필요한지 하나님이 모르시기 때문에 알려 드리려는 것입니까?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줄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데 주시지 않으니, 마음을 바꾸시도록 떼를 쓰자는 것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며,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실 수 있으며, 또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마 6:8)

이것이 진실이라면, "하나님은 내 사정을 모르신다"거나, "하나님은 내 간구에 관심도 없다"거나,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빠'라고 부르신 그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며, 나의 행복을 나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왜 나의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아도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의 다스림에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숨쉬고 잠 자는 것부터 큰 질병에서 완치되는 과정까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 냉장고에 며칠 동안 먹을 음식이 쌓여 있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 양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해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매일같이 치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을 믿기에 구한 것입니다. " 주님, 저를 치유해 주소서"라는 기도는 실제로는 이런 뜻입니다. "모든 치유는 주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제가 인정합니다. 오늘도 주님 손에 저를 맡깁니다. 저를 받아 주옵소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도 가지 각색입니다만, 아주 차원 높고 심오해 보이는 이유도 있습니다. 가령,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서 공급해 주시지. 그러니 굳이 기도할 이유가 없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기도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한 동안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혹은 "하나님이 얼마나 하실 일이 많을텐데 어찌 이 작은 일까지 하나님께 구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 갸륵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두 생각 모두 속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을 잊어립니다. 식탁에 오른 음식을 두고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음식이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오늘 하루의 일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그 날 손에 들어온 수입을 자신이 번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오늘 하루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의사와 약이 자신을 치료했다고 오해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하지 않으면, 저절로 잠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그 모두가 하나님이 허락하시어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국,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망각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오해와 착각에 빠집니다. 아주 사소한 일부터 큰 일까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는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선언하고 고백하고 또한 그분의 주권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하나님을 그처럼 철저히 신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마 6:25, 26, 31, 32)


3.

우리 자신을 위한 첫 번째 기도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즉, "오늘날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라고 기도했다면, 나와 내 가족이 먹을 양식만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라고 기도했으니, 우리 중에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말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할 때의 그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류가 우리입니다. 아니, '모든 생명'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기도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 중에는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엔의 <세계 식량기구>(World Food Programme)가 제시한 가난과 기아에 관한 통계는 우리를 심히 불편하게 합니다. 현재 인류의 생명을 가장 많이 앗아가는 질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기아라는 질병'(disease of hunger)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굶주려 죽는 사람의 수가 에이즈와 말라리아와 폐결핵으로 죽는 사람을 모두 합친 수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굶어 죽는 고통은 그 어떤 질병의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매일 저녁 세계 인구 중 일곱 명 중 한 명은 굶은 채 잠자리에 듭니다. 이 사람들은 '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타인은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형제 자매입니다.

가난과 굶주림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저 멀리 탄자니아나 니카라구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 중 하나인 맥클린 지역에도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루 종일 추위에 떨며 누군가 자신을 데려가 일감을 주기를 기다리는 라티노 노동자들을 매일 보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며칠만 일을 하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은 일용할 양식을 걱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불과 몇 마일만 가면 일용할 양식을 구걸하는 노숙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가 이런 사람들에게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일감을 찾아 나간 남편을 생각하고 또한 자식들을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마음 졸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우리의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불편한 일입니다. 귀찮은 일이고, 때로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면 내 손에 쥔 재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은 기독교인의 입에서는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과 같은 일이며,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내버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으려 한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될 마음이 있다면, 이 불편한 진실을 대면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일용할 양식 걱정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우리'를 기억하고 이 기도를 드리다 보면, 자신의 삶의 규모를 줄이고 검소하게 살기를 다짐하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고 얼마나 많이 허비하고 있는지를 자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기도하는 중에 때로 "아, 내 기도는 너무 사치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그런 자각을 하곤 합니다. 저 자신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치료의 길을 찾지 못하여 어쩌지 못하고 있는 교우가 떠오릅니다. 그러면 "아, 내 기도가 너무 사치스럽다"는 느낌이 압도합니다. 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자녀로 인해 고통받는 교우가 떠오릅니다. 그럴 때면 "오, 주님, 제 기도가 너무 사치스럽군요!"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현재 상태에 자족할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솟아 오르며, 그 사람들을 돌아볼 마음이 생깁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주기도문에 이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죽을 때까지 부족함 없이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아셨는지,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목록의 제일 앞에 이 기도를 배치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사치스러운지를 자주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면, 현재 상태에 자족할 마음이 생기고, 지금의 상태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며,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이들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둘째,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우리'를 생각하며 이 기도를 드리다 보면, 이웃의 가난을 덜기 위해 나의 물질을 나누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반대하는 분들은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값싼 동정이 그들의 가난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고착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가난은 게을러서 생기는 것이니 고생하게 내버려 두어야 정신을 차린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그런 가난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이 모두 그런 원인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같은 논리가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시키는 위선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는 것은 우리가 '아빠'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부탁이요 호소이며 또한 명령입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우리는 고난주간 금식 헌금을 봉헌합니다. 두 주 후에는 거북이 마라톤을 통해 기금을 모아 나다니엘 선교 센터를 증축하고, 굿스푼 선교 센터를 돕고, 나진 선봉 지역에 있는 무의탁 청소년 센터를 지원하려고 합니다. 이번 거북이 마라톤 행사를 위해 세 분의 장로님께서 매칭을 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멕시코 형제들과 북한 청소년들과 라티노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결단을 해 주셨습니다. 누군가 10달러를 헌금하시면, 실제로 그분들에게 전달되는 돈은 20달러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 거북이 마라톤 행사를 통해 우리 모두가 감격할만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부담이 된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에게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의 의미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다면, 지금 가진 것에 자족할 마음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생길 것이며, 나의 것을 나눌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육신에 필요한 끼니와는 다른, 또 다른 양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먹을 것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매일같이 허리 둘레를 만져 보면서 어떻게 하면 덜 먹을까 걱정하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었는데, 왜 세상은 아직도 이 지경입니까? 유물론자들은 물질적인 것만 채워지면 유토피아가 온다고 주장했는데, 왜 그 낙원을 우리는 이 땅 어디에서도 보지 못합니까?

인간은 먹는 것으로 다 해결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친적 중에 욕쟁이 할머니가 계신데, 그분이 자주 그러셨습니다. "인간이 별거라니? 똥 만드는 기계지." 참, 맞는 말씀이다 싶습니다만, 인간은 그 이상입니다. 육신만 편하면 다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인간성을 다 잃어 버린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그래서 '생령'(living soul)이 되었다고 합니다 (창 2:7). 인간이 '생령'이라는 말은 '육신을 가진 영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죽음의 수용소'에 감금되어 인간의 바닥을 철저히 경험했던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은 나중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서>(Man's Search for Meaning)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프랭클은 인간이 최소한의 육체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고매한 존재로 살 수 있음을 증언합니다. 누구나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다 육체적인 욕구만을 위해 살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러한 존재이기에 육신의 양식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은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40일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주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유혹을 물리치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하였다. (마 4:4)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다. (8:11)

생령인 인간에게 음식 외에 필요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 우리의 영혼이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육신의 배를 불릴 줄만 알지, 영혼의 허기를 채울 줄 모르는 데서 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으로 배불리 먹고 즐겨도 마음 깊은 곳에서 진한 권태감과 회의감이 밀려 올 때가 있습니다. 음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영적 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만 그 영적 허기가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 영적 허기가 채워져야만 인간은 생령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처럼 드러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신 분(요 1:18)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은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요 6:48-51)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며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빵을 먹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내면의 허기는 채워지고 내면의 갈증은 해갈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진정한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즉 모든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

오늘은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허블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육신이 전부가 아니고, 물질이 전부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은 그 이상의 존재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이상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이 과학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을 인정한다면 부활을 부정해야 하고, 부활을 믿는다면 과학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부활은 과학을 위배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과학으로 설명하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 뿐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과학을 존중합니다. 그것 나름의 가치가 있고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과학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험실에서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에 눈 뜬 사람이라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를 제대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모든 일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맡기는 신뢰의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육신의 끼니만 해결되면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영적 양식을 먹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육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섭취하여 온전한 생령이 되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에 자족하며, 자신의 삶을 줄여 이웃을 돕는 일에 언제나 적극적으로 손을 뻗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 물질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는 참으로 위험한 기도입니다. 불편한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양심을 흔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한, 이 땅에서는 어느 정도 희망이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희망 없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것이 영적으로는 가장 안전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아주 위험한 기도이지만, 우리를 가장 안전하게 변화시켜 주는 기도입니다. 다만, 주기도문이 우리를 쥐고 흔들 때, 마음껏 흔들리도록 우리를 맡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부디, 주님께서 이 용기를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주님,
저희로 부활의 세계를 믿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모든 것을 주님의 다스림에 맡기게 하시고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라
영적 양식을 먹게 하소서.
저희 모두가 생령으로 자라
물질에 자족하게 하시고
저희 것을 나누어
이웃의 고난을 덜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