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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5)-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5)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오늘은 곁길로 들어 두어가지 경우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세우는 일이 얼마나 긴요하고 긴박한 일인가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중국 서안지방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약 100여개의 피라미드가 있다고 한다. 1982년 중국이 300m가 넘는 대형 피라미드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였는데 3일 만에 발굴을 중단하고 다시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기자들까지 초청하여 발굴내용을 설명하고 공개적으로 시작한 발국작업이 그렇게 중단된 것이다. ‘자기들의 역사와 다른 유물이 나왔기 때문에 덮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당시 그곳을 방문했던 사람은 말한다. 이집트의 가장 큰 피라미드의 높이가 180m를 넘지 않는데 비해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4)-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조선 제3세 단군 가륵(嘉勒: 기원앞 2182년) 앞서 가륵 8년(기원앞 2175)에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켰고 임금께서는 지백특(支伯特=티베트)에서 토별하여 평정하였다고 하였으며, 불함산(不咸山)에 올라 민가를 내려다 보니 밥짓는 연기를 보고 그 많지 않음에 세금을 감하고 살림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불함산에 대한 주 장과 기록이 다양하여 이를 정리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우선 본문의 출처 高東永의 의 기록을 먼저 살펴본다. *** 不咸山: 백두산이라고 하는가 하면 완달산(完達山)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에는 백두 산이 모두 여덟 개의 이름이 있는데,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 (白山..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3)-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3)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조선 제3세 단군 가륵(嘉勒: 기원앞 2182년) 선대임금이 다스리던 도(道)를 이어 개국 이후 미진했던 일들을 완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나라에서는 신시시대부터 내려오던 녹도문(鹿圖文:사슴 발자국을 형용한 상형문자)이 있었는데 뜻글 이어서 백성들이 해득하기 어려워 하므로 불편을 덜기 위해 소리대로 적는 문자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 게 하는 등 과감한 어문정책을 단행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국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 모두 나라의 근 본을 더욱 굳게 다지기 위한 큰 치덕이다. 앞 임금대에 착공된 궁궐신축을 완공하였다. 비대해진 조정 정사는 25년이나 끌어온 궁궐을 완성함으 로써 한층 질서가 잡혔고 지방 행정 역시 짜임새를 갖추었다. 원년..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2)-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2)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홍익인간(弘益人間) 우리나라 교육법 제1조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이다. 그렇다면 이 홍익인간이라는 용어는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내용의 정확한 뜻이 무엇 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개천은 단군으로부터, 홍익인간 역시 단군왕검의 백성다스리는 이념(철학)으로 생각 하고 있다. 그러나 환인(하늘임금: 天帝)께서 홍익인간의 세상을 펼 수 있는 환웅을 불러 홍익인간을 펼칠 수 있는 삼위 태백을 가르키며 너희가 가서 다스리라 하면서 무리 3천명과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주어 내려보냈다는 앞서의 기술을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곧 신시 1세 환웅 거발환(居發桓)이며 이로부터 나라의 개천은 시작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위대한 ..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1)-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1)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단군 제2세 왕검 부루(扶婁) 11년, 신해(기원앞 2230) *여수기(餘守己)에게 예(濊)를 다스리게 하니 아들 아홉이 각각 작은 고을을 맡아 일 을 도왔다. 12년, 임자(기원앞 2229) *신지(神誌)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10월에 칠성역을 널리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16년, 병진(기원앞2225) *남산(南山)에 삼일신고(三一神誥)비를 세웠다. 18년, 무오(기원앞2223) *이때 임금은 1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가륵(嘉勒)을 태자로 삼고, 그 밖의 15 명 중봉건국(封建國)을 얻은 아들이 8명이며, 나머지는 다 친왕(親王)이 되었다. *6월에 조서를 내려 충의열사, 효자효부, ..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0)-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0)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아직까지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 중국의 것이 더 오래고, 더 크고, 무엇이든지 먼저였다며 문화 및 물질문명이 중국으로부 들어왔다는 고정관념의 틀 속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유적이나 유물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발굴되어도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다른 어떤 나라에서 유적, 유물의 발굴에 이처럼 냉담할 것이며 이처 럼 부정적이겠는가! 여기 부루단지(扶婁壇地)만 해도 지금까지 혹은 50여년 전까지 내려오는 풍속인데 이를 귀하 게 여겨 소중하게 지켜나가려는 일말의 움직임도 없다. 부루단지는 가을에 햇곡식을 질그릇 단지(항아리)에 담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어 집안의 안..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9)-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9)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이제 단군조선의 개국과 최초의 수도 아사달에 대한 여러 근거들을 바탕으로 확인하는 일 을 마무리하면서 최태영 박사님의 논고를 간접 인용 하기로 하겠다. [단군은 고조선을 개국한 우리의 실존 조상이라고 역사 첫머리에 찍어댄 것이 정인보이다. 우리 역사의 출발점을 정인보는 정확히 본 것이다. 본인(최태영)의 역사관도 이와 동일하다. 근세조선은 승유억불정책을 폈지만 나의 세대까지도 단군을 변함 없이 국조(국조)로 받들어 조선의 아이들이 다음으로 배우는 에서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때 고 조선을 건국했다고 가르쳤다. 이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조선족 대대로 수천년 간 전해지던 시대상식이었다. 대한제국의 신식군대에서 군가로 부르던 “단기 내려 고강 산에..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8)-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8)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위서 (魏書)의 기록이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개국하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칭하였다]라고 되어있는 반면 고구려 말에 쓰여진 고기(古記)의 기록은 [평양성에 도읍을 세우고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칭하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옮기었다… 도읍을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기었다. …그 후에 아사달로 환도하였다. 아사달에서 은퇴하였다]라고 된 경위에 대한 설명에서 첫째 만약 평양 성이 조선 최초의 도읍지를 뜻하는 지명이 었다면 끝부분의 그 후에 아사달로 환도하였고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서 은퇴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 평양성으로 다시 환도하였 고, 평양.. 더보기
간도, 잊어도 되는 영토인가!-四隣 이문형(워싱톤문인회) 四隣 이문형(워싱톤문인회) 간도—(1) 간도, 잊어도 되는 영토인가! 간도는 우리에게 어떤 곳인가! 잊혀져가는 간도, 과연 잊어도 되는 영토인가? 오두가단국강불가축(吾頭可斷國疆不可縮)라 하지 않았는가! 우선 조선의 영토 간도가 중국의 영토가 된 경위부터 밝혀보자, 올해는 일본이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상태에서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간도협약(Gando Convention)을 맺은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즉 조선의 주권을 찬탈한 일본이 남만주의 철도부설권과 무순(撫順)탄광 개발권을 얻어내는 조건을 걸고 청나라에 양도한 땅이 바로 우리의 영토 간도다. 쉽게 말하자면 무단침입한 강도가 집주인의 손발을 묶고 입을 틀어막아 무방비, 무저항상태로 만들어 놓고 제집인양 안방을 차지하..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7)-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7)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阿斯達)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與高同時 (내왕2천재 유단군왕검입도아사달 개국호조선여고동시)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고(高)와 요(堯)에 대한 얘기는 뒤로 미루어 놓고 우선 도읍 아사달에 관해서 먼저 살펴 보자. *김종서의 에서 발췌 간접인용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 전재(轉載)된 위서(魏書)의 기록 원문(原文) 중 그 일부인 위의 글 중에서 유단군왕검입도아사달(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의 뜻을 살펴본다. 아(阿)자는 큰 언덕아, 기슭 아자이다. 그렇다면 큰 언덕 즉 높은 언덕이 아닌 구릉을 의미하며 사(斯)자는 이 사, 모두 사, 잠깐 사, 떨어질 사, 흴 사(白色) 등의 뜻이 있는 데 이 중 색을 나타내는 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