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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6)-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8. 5.16 일주년을 기한 형의 집행 유예로 출소 내가 언도를 받았을 때는 이미 봄이 가차왔을 때이었다. 감방생활 가운데도 종종 외부 소식이 들려왔다. 하루 아침은 세면장에서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된 전 공병감 엄홍섭 소장과 부다치게 되었다. 그는 오래동안 공병감으로 재직함으로 기회를 독점한다는 비난은 받았으나 열심하고 우직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외부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가 많으며 곳 출소하게 될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듯고 얼마되지 아니해 나는 출소를 위해 호출되었다. 감방에서 출소를 위해 나오는데 이상국 장군이 세면을 위해 나와 있음을 보았다. 그는 내가 출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장..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5)-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7. 재개된 혁명 재판 라) 10년 형을 선고 받다 나의 재판은 정강 장군과 같이 심리되었다. 나의 죄과중 미 대사 공한 예하부대 하달 죄목은 국제성을 피하기 위해 삭제된다고 하였다. 나는 왜 정강 장군과 같이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되지 아니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정장군 이 부대 동원을 한 것이 나의 비상령 때문이라는 사실을 정장군으로부터 듯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것으로 문제가 된다면 군단장의 책임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결과는 내가 징역 10년을 그리고 나의 명으로 사단의 비상이 걸린 정강 8사단장은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내가 명령권자로 인정된다면 정강 사단장은 당연 무죄가 돠어야 했다. 그러나 명령권자보다 ..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7. 재개된 혁명 재판 가) 워싱턴 포스트 외신 보도와 서대문 형무소 재 입감 12 월 말경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도라온 후 나의 재판이 재개된다는 소문이 있은 후 워싱턴 포스트 지에 실린 나의 재판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곤혹의 뜻이 국내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혁검 부장인 박창암 대령이 미국의 약소 민족에 대한 전형적 간섭이라며 나로하여금 부당 성명을 발표하도록 매부인 강영훈 중장을 통해 압력을 가하여 왔다. 아버지와 장인 어른은 불리하더라도 혁검의 요구를 드러 주어서는 아니된다는 조언을 주셨다. 강중장의 이야기론 어떤 형식으로던지 신문에 발표함이 가하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구테타 기간 동안 나의 문제로 미국 정부의 개..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3)-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6. 임시적 석방 11월 하순경으로 생각이난다. 헌병 사령부에 위치했던 형명 검찰부에 불려 나갔다.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무슨 죄목으로 기소되고 무슨 조건으로 석방된다는 것인지 설명도 못 드렀고 문의도 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되도라보면 제대로 법의 보호나 권한도 허용되지 못한 셈이다. 집이 그리웠고 겨울을 감방에서 지낼 필요 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아내와 김희양 전 부관이 마중 나왔다. 아내는 나를 차에 실고 시내로 들어 갔다. 7세이며 갓 국민학교 일학년에 입학한 둘째 아들 용회가 고열로 입원했는데 급성 맹장염으로 판명 되었으나 열이 높아 수술을 망설이고 있다가 수술을 모험키로 했다고 하였다. 병원은 안국동에 있으며..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2)-김웅수장군회고록 .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6. 임시적 석방 11월 하순경으로 생각이난다. 헌병 사령부에 위치했던 형명 검찰부에불려 나갔다.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무슨 죄목으로 기소되고 무슨 조건으로 석방된다는 것인지 설명도 못 드렀고 문의도 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되도라보면 제대로 법의 보호나 권한도 허용되지 못한 셈이다. 집이 그리웠고 겨울을 감방에서 지낼 필요 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아내와 김희양 전 부관이 마중 나왔다. 아내는 나를 차에 실고 시내로 들어 갔다. 7세이며 갓 국민학교 일학년에 입학한 둘째 아들 용회가 고열로 입원했는데 급성 맹장염으로 판명 되었으나 열이 높아 수술을 망설이고 있다가 수술을 모험키로 했다고 하였다. 병원은 안국동에 있으며 원..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1)-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5.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확실한 시기는 기억에 없으나 여름에 들면서 헌병감실에 구속되었든 장성중 유독 나만 혁검에 의해 기소되어 서대문 형무소 독방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나는 무슨 죄로 기소되었는지는 그 때 몰으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나의 재판이 공개될 터이니 헌병 사령부 감방에서 비밀리에 죽임을 당할 위험은 벗어났구나 안도하였던 기억이 난다. 가) 수감 생활을 도와준 장익진 형무의 나는 한국 전젱중에 얻은 위산 과다증으로 공복시 가슴이 쓰라린 병으로 약을 상복하고 있었다. 내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관된지 수일후에 누군가 약을 넣어 주었다. 아마 집 사람이나 김희양 부관이 특별히 부탁한 결과이겠지 생각하였다. 형무소에서는 하로 10분 정..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7)-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3. 5.16 군사 쿠테타 소식과 6군단 나) Ryan 장군의 방문 요청 오후 4-5시경에 군단 고문관을 통해 미 1군단장 Ryan 중장이 의정부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만나기를 원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소식통에 의하면 내가 체포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생각하였다. 쿠테타는 한국 정치 문제이었다. 내가 비록 미 1군단에 예속되 있지만 국내 정치 문제로 외국지휘관의 보호를 자청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이는 어렸지만 그래도 4개 사단을 거느리는 지휘관이다. 나는 그런 이유로는 갈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시켰다. 약 2시간이 너머 어둠이 덮히기 시작할 때 다시 전화가 왔다. 공무를 위해 와 달라는 내용으로 거절할 이유가 .. 더보기
13)아이젠하우워 미 대통령 당선자와 이승만 한국 대통령-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아이젠하우워 미 대통령 당선자와 이승만 한국 대통령 / 통한의 휴전 / 인원 장비의 전후 점검과 사단의 이동 내가 아이젠 하우워 미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게 된 것은 1952년 12월 초로 알고 있으며 그 장소는 전선 미군 부대 사령부에서였다. 나는 그가 신경질적이라는 인상 을 받았다. 대통령 당선자로서 한국 휴전을 위한 공약 실천을 판단키 위한 방문이 었다. 후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통일 가능성을 보장 받지 못 하거나 북의 재침 방지의 보장 없는 휴전에는 반대한 것으로 안다. 휴전 직전 이승만 대통령을 납득 시키지 못한 미국은 이 대통령에 의해 거제도에 위치한 반공포료 27,000명을 미국과 상의 없이 석방 조치함으로 한미간의 긴장이 있었다. 급기야 Robertson 미 국무차관 .. 더보기
11)사단장의 고민-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사단장의 고민 / 육군 급식제 자원 / 우군포가 아군을 포격한다 나는 지휘경험이 없던 만 28세의 청년으로 사단 지휘를 위해 고심 하였었다. 또한 나는 미 3사단을 우측방으로 좌측방은 미 1군단의 미7사단 과 경계되며 군단 예비 사단도 미군 사단인 미 9군단 소속으로 연합작전의 복잡성도 이겨내야 했다. 내가 사단장으로 있는 기간은 휴전 선을 유리케 하기 위해 적의 공세가 심할 때였다. 나의 관측으로는 휴전이 가까워 지면서 미군의 희생을 아끼는 상부의 눈치가 역역하였다. 이러한 실정이 적으로 하여금 유리한 차후의 방어선 선택을 위한 공세의 기회가 되 었다. 철원 평야를 수중에 넣키 위해 백마산이 필요했고 백마산을 위해 평소에 소대 가 점령하고 있던 미 7사단과의 접경선의 배수진이었던 1.. 더보기
나의 긴 인생을 되돌아 보며-김웅수장군회고록 나의 긴 인생을 되돌아 보며 김웅수장군님 2008년 7월 13일 워싱톤 한인교회에서 내 나이 만 85세가 되었다. 아버님이 작고하신 나이다. 평균 수명은 살았다. 긴 인생을 되 돌아본다. 유년기와 학창시절은 공부에 바빴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도 썼다. 나는 유년기를 만주 한국인 독립군 부락에서 그리고 국민학교를 만주 하얼빈에서 교포 학교인 한국 보통 학교를 중학부터는 일본인이 주된 학교에서 자라 중국사람과 일본 사람으로부터 인종적인 차별 의식을 느끼며 자랐다. 그것은 내가 일본군에 입대후에도 예비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본토에서 일본군 소대장을 지나면서도 계속 되었다. 청춘기에는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풀리지 아니한 문제와 씨름도 해 보았다. 조국 해방의 환희에 들뜨며 원대한 꿈도 그려 보았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