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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20)-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13. 일시 귀국과 유신반대 지휘로 미국에서 정착

                                                            



나의
박사과정은 한국에서 4 남매를 오게함으로 생계의 부담이 늘어 71 말에야 끝나 72 2월에서야 경제학 박사학위를 얻게되었다. 학교가 끝나자 다행이 졸업한 대학에서 연구 교수로 시작 교수직을 받게되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할 무렵 과연 상아탑에서 배운 나의 학문이 현실에 적용될 있는가를 의아했으며 귀국전에 미국사회에서 그의 적응을 시험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카토릭 대학에서 연구 생활과 교편을 시작하는 동기가되었다.

 

  학교가나고 연구생활이 시작된 무릅 고국에 장모님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임시 귀국하는 일이 생겼다. 10년만의 고국 방문이었다. 10년이라하였는데 아직도 군사 혁명 정권이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홍종철 대통령 홍보 비서의 종용과 중재를 통해 대통령을 만나보았다. 홍종철 비서는 과거 내가 6군단장으로 있을 나의 작전 참모로 있었든 사람이다. 대통령은 나의 귀국 시기를 물으며 한국 체류기간 산업 시설들을 돌아봐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나는 막내가 대학을 가게되는 3년후 아니면 귀국키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이는 그가 3 집권이 끝나는 해였다. 나는 장모님의 중태를 이유로 서울에 위치한 국방 과학연구소와 포항 제철  M1 소총을 생산하든 동래 병기창 시찰을 마감으로 장모님의 서거에 따른 장례를 끝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비서는 나와 박정희 대통령를 인연지워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준 사람이다. 나의 원칙 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비서의 뜻을  결실시켜 주지 못하였음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얼마후 청평땜 밑에서 낚시중 아들이 물결에 휩쓸림을 구하다 불귀의 객이된 아버지이다. 조속한 귀국과 구체적 직장까지 제안 해주며 국내 환경 조성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선배들의 호의도 미국 사회에서 배운 지식 적용을 시험코저한 나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한국에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2-3개월후 박정권의 종신 대통령제가 보장되는 10 유신체제가 공포되었다. 나는 하나의 구테타가 일어났으며 5.16 동기보다 더욱 악랄한 방법이 같은 사람들의 손에서 이루어젔음을 개탄하였다. 국민들은 군정하에서 공개적으로 반대 없는 입장이었다.  때맛춤 워싱턴에서는 교포들에 의해 10 유신 규탄 대회를 준비중이었다. 군사 쿠테타를 방지못하였든 나도 이를 반대한다는 의사를 정부측에 전달하여야 책임을꼈다. 규탄 대회 준비회의에 참석하였다. 준비 위원회에서는 내가 대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학생 신분이며 정치행위에 희생된 자로치에 가담함은 일종의 보복행위밖에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치적 행위를 기피하여야 입장을 취해 왔었다. 나는 시위후 나에게 정치적 행사에 관여해 달라는 요청을 않하기로 약속받고 유신반대 궐기대회의 지휘 책임만을 맡기로하였다.

 

  72 115일로 기억한다. 안병국 목사가 부회장으로 그리고 고인이된 장성남씨와 유기홍박사와 당시 신한민보 채임자이던 정기용씨 김응창씨 부성래 박사 방숙자 여사 황옥성 고세곤씨등과 열거할 없는 다수의 유지들과 대학교 교수 유학생 그리고 학생회장들의 노력으로 350명이 궐기 대회에 참석된 것으로 워싱턴 포스트지는 보도하였다. 당시 2000 정도로 알려진 워싱턴 교포인구로 보아서는 대단한 참석율이었다. 시위는 듀폰서클에서 시작하여 한국대사관 까지 행진 한국 정부에게 주는 궐기문을 전달하였고 미국 정부와 국회에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궐기문 초안에는 당시 국무부 통역을 맡고 있든 안홍균씨의 수고가 컸다. 시위에 참석키 위해 LA에서 서울시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돈씨와 초대 한국 총무처장과 불란서 대사를 역임한 전규홍 박사가 참석했으며 시위는 질서있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정부를 위한 감시자도 시위 주변을 배회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고 들었다. 나는 규탄 대회 회장을 수락한후 두사람의 충고를 받았다. 하나는 당시 한국대사로부터 시위에 가담하는 것은 좋으나 지휘자의 자리는 피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한국 대사로서는 의당 있을 있는 요구이며 어쩌면 본국의 요망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는 같은 교회를 나가는 원로분의 충고이었다. 내가 시위를 지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을 위해 너무나 손실이 되니 재고해보라는 충고였다. 나는 시위로 3년후에 귀국하겠다는 생각을 취소하고 미국에서 영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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