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2. 공산 반란 토벌과 6.25 전쟁으로 확장된 군의 정치 영향력
나) 국군으로 개칭된 국방 경비대와 반공 기치를 든 국군
군이 반공의 기치아래 사상적 자세를 정립하고 숙군을 가시화 하기 시작한 것은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경비대가 국군으로 재 탄생했을 1948년 8월 15일 이후 부터이다. 초대 대한 민국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이범석 장군은 중국에서 국공간의 갈등을 경험한 광복군 출신 장성이다. 그는 군의 반공 목표를 뚜렷이 하였을 뿐더러 공산군의 계속적인 사상적 선전활동으로부터 군을 계몽하기 위해 미 군사 고문단 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훈부 편제를 군내에 도입하였다. 숙군과 공비 소탕전도 가속화 되었다. 대한 민국 정부 수립후도 계속되었던 소위 공산 게릴라 소탕전은 주로 제주도 지리산 덕유산 오대산 태백산맥 일때였으며 토벌작전과 치안 유지를 위해 대도시를 제외한 방대한 작전지구가 계엄하에서 토벌 작전 사령관인 군의 지휘 관할을 받게됨으로서 민도가 얕었든 국민 위에서 군인들이 정치적 관계를 가지는 기회가 주어젔든 셈이다. 불안한 지방 치안하에서 유력자들의 가족이 서울 에 집중되기 시작한것도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탓이다. 다행이 6.25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게리라 소탕작전이 일단락되었었다. 만약에 남한내의 게릴라 소탕이 6.25 전쟁전에 평정되지 못했더라면 과연 UN군이 한 반도에 상륙하거나 또한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을까 의심이 간다.
다) 6.25를 통한 군의 팽창과 군의 정치 영향력의 신장
한국 군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그의 전투력의 급속한 발전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전쟁전 10만 미만의 병력이 전후 600.000 대군이 되었다. 그리고 UN 군과 연합작전을 위해 장비도 신영화 되갓다. 신영화된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고 방대해진 군사력과 장비를 유지하기 위한 군수 지원제도 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교육과 행정제도가 필요했다. 이런 기술들은 그 당시 로서는 국내 지원이 불가능해 결국은 육해공군의 많은 장교들이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고 각종 기술학교가 군내에서 설치되었다. 당시만 해도 자동차 운전도 기술에 속하였으나 이는 군내에서 교육하는 길밖에 없었다. 당시의 지휘관들의 고충이 교육된 기술자가 좋은 보수를 따라 민간으로 유출된다는 사실이었다. 군의 각급 지휘관은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며 스스로 교육관이자 관리를 위한 행정관 이 되어야 했다. 이것은 전쟁을 위해 민간 분야 발전에 앞지르는 군사원조의 결과 이며 장교들로 하여금 군의 행정능력이 당시의 민간 능력을 앞서고 있다고 색각케 하였다.
방대해진 군사력은 정치를 위한 표밭이자 당시로 보아서는 국내에서 가장 큰 재원조달의 소스가 되어 정치인들의 유혹이되며 반대로 군인들이 정치가를 이용 하려는 유혹을 준 것도 사실이다. 부정 선거에 군이 개입되고 군이 실은 부패에 앞장 서 있었다는 말도 듯게 되었다. 나는 미국 참모 대학을 마치고 도라와 1955년 후반기부터 1년간 육군의 작전국장의 직책을 맡은바 있었다. 당시 서울 근교 오류동에서 소요사건이 발생되어 경찰이 동원되었다. 그 사연은 대통령 후보 지망 을 위해 조봉암씨측이 오류동 주민들로부터 후보 등록을 위한 지원 서명을 받으려 다 이를 방해하려는 경찰과 충돌한 것이다. 나는 이런 소요 사건이 확대되면 종국에 는 군의 개입이 불가피해지며 직능상 작전국의 소관 사항이 될 것을 우려하면서 당시의 헌병사령관을 방문한바 있다. 설명을 들은 헌병 사령관은 일언지 하에 군은 이승만 현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의견을 서슴치 아니하는 발언을 하였다. 장성들 중 에 자유당의 비밀 당원이 있다하더니 이런 자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아 지극히 놀라 게됬다. 군대가 자칫하면 정치의 시녀노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으며 군인으 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군인이 될 우려가 앞섰다.
사무실로 도라와 미 육사 출신 대령 고문관 을 불러 숙제를 주었다. 그 숙제는 다음과 같았다. 남미에 건국된지 15년 밖에 되지못한 한 신생국가 있다. 민주 주의 를 표뱡하고 있으나 민도가 얕아서 정당간의 싸움이 정치부패로 인식되며 정당간 의 싸움은 경찰 치안선을 넘어 군의 개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개입된 군이 어떤 상황에서 비상시국을 슬기롭게 수습하여 정치가 다시 정치가에게 되도라가며 반대로 어떤 상황들이 군으로 정치를 농단하게 만들 것인지를 구체적인 가정을 넣어 설명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요청을 쾌히 승낙했던 그는 2주후 나를 방문해 자기에게는 너머 어려운 숙제라 풀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그가 정치적 문제임 으로 고문단장게 보고했으며 그들의 결론이 개입해서는 아니될 문제로 결정한 것 으로 짐작 하였다. 나는 군이 정치에 개입할 가능성은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 고 나 스스로가 정치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후 내가 취한 입장은 첫째는 군대에서 평이 나쁜 장성들이 군을 떠나는 일에 반대치 아니하며 둘째로 정훈학교를 강화하여 정훈계통 장교들의 미국 유학에 우선권을 주도록 노력하였다. 건전한 장성들이 군에 있다면 국가 유고시에 야욕에 따르거나 국가 이익에 배치되는 행동을 막을 수 있는 힘이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또 정훈 학교의 창설과 정훈장교의 유학은 다음과 같은 나의 생각에 기초한 것이었다. 나는 한국 전쟁을 통해 미군이 작전지대 주민 관리에 대해 관심을 갖이며 노력함을 배우고 보아왔다. 일본군에 종군하며 중국과 만주 국경 지대에서 중국 8로군(중국 공산군)과 싸운 경험을 통해 미군과 일본군의 차이를 적 주민의 후생을 생각하는 미국과 그렇치 못한 일본 군의 차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북진했을 때의 반성이 적 주민의 후생에 관심을 갖는 민사 군정 교육 노력은 결국에 가서는 국가 소요사건으로 군이 자기 국민 관리에 개입하게 될 때에 민간에 대한 장병의 정신과 태도를 옳케유지 시켜주는 기초가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결국에는 5.16에 대한 반대 입장에 서게한 정신 자세를 심어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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