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을 위한 특별 연속 설교
말씀과 문학의 만남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보는 삶의 길
5월 3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5월 10일 사랑은 만족하지 못한다
5월 17일 마음은 누구나 같다
5월 24일 죽음, 이별 그리고 용서
5월 31일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소설 <다빈치코드>(2006년)와 영화<밀양>(2007년)에 이어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시도하는 또 하나의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통해 말씀과 문학의 신선한 조우를 경험하시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이 설교만은 노치지 마십요.***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와싱톤 한인교회
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2009.5.17 (김 영봉 목사)
<엄마를 부탁해> 연속설교 3
마음은 누구나 같다
--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다"
누가복음 2:41-50
1.
얼마 전, <엄마를 부탁해>의 작가 신경숙씨가 어느 일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소설을 읽고 자신을 한번 거울 보듯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그래서 힘들어도 계속 글을 쓰게 되나 봐요."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소설이 던져 준 문제의식을 붙들고 성서의 말씀을 비추어 보면서 나 자신을 보자는 겁니다. 만일 이 소설을 읽으면서 혹은 이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구를 생각한다면, 그래서 자신이 변화될 부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변화되어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소설을 오독하는 것이며, 설교를 잘 못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저 자신도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은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문장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박소녀씨는 서울역에서 실종되기 전에 이미 가족들에게서 잊혀졌을 뿐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일평생 하나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강요당하고 살았습니다. 남편에게 박소녀씨는 ‘형철 엄마’일 뿐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게 그는 언제나 ‘엄마’였습니다. 자식들은 박소녀씨가 늘 엄마로만 자신들 곁에 있어 주기를 기대했고, 남편은 아이들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주기만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박소녀씨는 엄마, 그 이상이었습니다. 엄마이기 이전, 아내이기 이전, 그는 하나의 인간이었습니다.
둘째 딸이 로마로 여행을 떠나는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엄마를 처음부터 엄마인 사람으로 여기며 지냈을까. 내가 엄마로 살면서도 이렇게 꿈이 많은데, 내가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을, 나의 소녀시절을, 나의 처녀시절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데, 왜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을까. 엄마는 꿈을 펼쳐볼 기회도 없이 시대가 엄마 손에 쥐어 준 가난하고 슬프고 혼자서 모든 것과 맞서고, 그리고 꼭 이겨나갈 밖에 다른 길이 없는 아주 나쁜 패를 들고서도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몸과 마음을 바친 일생이었는데, 난 어떻게 엄마의 꿈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을까?
언니, 감나무를 옮겨 심느라 파놓은 구덩이 속에 그만 얼굴을 처박고 싶었어. 나는 엄마처럼 못 사는데 엄마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엄마가 옆에 있을 때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딸인 내가 이 지경이었는데 엄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고독했을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오로지 희생만 해야 했다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261-62쪽)
2.
큰 딸에 관한 첫 번째 장에 보면, 외삼촌 즉 박소녀씨의 오빠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박소녀씨의 오빠는 매형에게 적지 않은 돈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 돈을 갚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엄마는 아버지와 고모에게 죄인이 되었고, 외삼촌은 동생 박소녀씨에게 죄인이 되었습니다. 외삼촌은, 돈을 갚을 도리는 없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동생이 어려움을 당할 것 같은 걱정이 들어, 수요일마다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고 동생 집을 방문합니다. 별 일 없는지 휘 둘러보고는 "동생, 잘 있었는가? 나 가네"하고 사라집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외삼촌이 사오년간 소식도 없이 종적을 감춥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매형에게 진 빚을 갚아서 동생을 편하게 해 주려고 먼 길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그 기간 동안 박소녀씨는 "니 외삼촌은 대체 어디서 뭘 한다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가 걱정이 되었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딸이 잠시 집에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간만에 만난 모녀가 방에서 귤을 까먹으며 정담을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동생, 있는가?"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 때 박소녀씨는 화다닥 일어나 쏜 살같이 밖으로 나갑니다. 뒤따라 나간 큰 딸은, 외삼촌의 가슴팍에 안겨 그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오빠! 오빠!"라고 울며 앙탈 아닌 앙탈을 부리는 엄마의 모습을 봅니다. 큰 딸은 이 때 엄마에게서 매우 낯선 느낌을 받습니다. 큰 딸은 이 때 처음으로 "아, 엄마에게도 오빠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대목에서 소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연한 일을 왜 그제서야 깨달았는지. 너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너의 엄마에게도 첫걸음을 뗄 때가 있었다거나 세살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 살 혹은 스무 살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엄마가 너의 외삼촌을 두고 오빠! 부르며 달려가는 그 순간의 엄마를 보기 전까지는. 엄마도 네가 오빠들에게 갖는 감정을 마음속에 지니고 사는 인간이란 깨달음은 곧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구나, 로 전환되었다."(36-37쪽)
박소녀씨는 마지막에 엄마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죽어가는 중에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보입니다. 박소녀씨는 파란 슬리퍼를 끌고 넝마가 된 육신을 이끌고 자신이 태어난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루에 앉아 있던 박소녀씨의 어머니는 뼈가 드러나 보이는 딸의 발등의 상처를 보고는 팔을 벌려 오라 합니다. 박소녀씨는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안기듯 그 품에 안깁니다. 그 때 박소녀씨는 생각합니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254쪽)
박소녀씨, 그는 아내이기 이전에, 엄마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의 사람으로서 그에게도 남편이 필요했고, 아버지도 필요했고, 엄마도 필요했습니다. 오빠도 필요했고, 친구도 필요했습니다. 박소녀씨 안에는 어리광 부리고 싶은 어린 아이도 있었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눈물짓는 문학소녀도 있었으며, 봄바람에 마음 설레는 처녀도 있었고, 멋지게 차려 입고 여행을 떠나보고 싶은 중년 부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엄마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박소녀씨 자신도 그것이 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요!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이라는 박소녀씨의 마지막 말이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3.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도 제 어머니를 늘 ‘엄마’로만 생각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분 안에도 못 피운 꿈들이 많고, 아직도 마음으로는 그 꿈을 꾸고 계실 터인데, 저는 어머니를 오직 ‘엄마’로만 생각해 왔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고 제 경험을 나눕니다.
제가 초등학교 즈음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삼촌 중 한 분이 가끔 집을 나가서 한 참 동안 방랑을 하다가 돌아오곤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외항선을 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공사장을 떠돌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 객지로 떠돌다가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삼촌이 돌아올 때면 가족들은 그분이 가져 온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삼촌의 옷가방을 정리하는 것은 큰 며느리인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그 날도 저희 형제들은 대청마루에서 놀고 있었고, 어머니는 어느 새 친구들을 찾아 사라져 버린 삼촌의 옷가방을 열어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옷가지를 정리하던 어머니께서 "어머, 곱기도 해라!"라고 탄성을 지르십니다. 우리 형제는 일제히 고개를 돌려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시골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화사한 여성 옷가지가 있었습니다. 새 옷이 아니라, 누군가 입던 옷입니다. 그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어머니는, "아이구, 네 삼촌이 또 사고를 쳤나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그런 것에 관심을 둘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저희 형제들은 다시 중단했던 놀이를 계속했습니다.
정리된 옷을 가지고 뒷방으로 가신 어머니께서 한 참 지난 후에 저희들을 부르십니다. "얘들아, 엄마, 어떠냐?" 우리 앞에 나타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저희 형제는 그만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삼촌 가방에 있던 그 화사한 (실은 매우 요사한) 옷을 입으시고는 마치 모델처럼 몸짓을 해 가며 저희들에게 보여 주시는 겁니다. 저의 머리에는 순간 동네 가까이에 있던 미군부대 앞에서 본 여자들이 생각났습니다. 저와 제 동생들은 일제히 소리쳤습니다. "엄마, 미쳤어? 왜 그래? 빨리 벗어!"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왜? 나는 이런 거 입으면 안 된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어머니 나이 30대 초반 혹은 중반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잠시 후 그 옷을 벗어 장롱 깊숙이 숨겨 놓으셨고, 그 옷을 입은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했습니다.
불행히도, 그 모습을 보고 "아, 어머니에게도 멋지게 치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마음이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에 제가 너무 어렸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어머니께서 가끔 아무도 없을 때 그 옷을 입어보고 잠시 동안 춤을 추곤 했다면 참 좋았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저는 그 이후 지금까지 이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런 모습이 어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언제나 엄마로만 있어 주기를 바랐던 이기적인 불효자가 바로 저입니다.
4.
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잘못을 어머니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아버지 안에도 응석을 부리고 싶은 어린 아이가 있고, 장난기 심한 소년도 있으며, 꿈으로 가슴이 터질 듯 한 청소년도 있고, 백마를 탄 왕자가 되고 싶은 청년도 있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늘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 역할에 충실한 분으로만 있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자식들이 모두 아버지를 그렇게만 여기고 대하는 동안, 아버지는 외로움에 시름이 깊어집니다.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에 눈물이 반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가족이 있어야 했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으로만 알고 남편으로만 있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남편을 무척 외롭고 힘들게 만드는 일입니다. 아내는 남편 안에 어리광쟁이 어린아이도 있고, 장난기 가득한 소년도 있으며,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청소년도 있고,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청년도 있고, 세상을 호령하고픈 남성도 있음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가출하여 밤거리를 휘젓고 다니고 싶은 불량아도 그 안에 있고, 선교사가 되어 인생 전체를 묶어 바치고 싶어 하는 거룩한 사람도 그 안에 있습니다. 지금 아내의 눈에 남편이 아무리 초라하게 보여도, 그 마음 안에는 식지 않은 열정이 있고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 주셔야 합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단순히 남편이 아니라 남자로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남자 안에 담겨 있는 여러 종류의 꿈들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대하되, 때로는 철없는 아이로, 때로는 꿈 많은 소년으로, 때로는 가출을 꿈꾸는 불량아로, 때로는 백마 탄 왕자로, 때로는 세상을 호령하는 대장부로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휴, 목사님, 그렇게 하면 기고만장해서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요!" 저도 사고뭉치 남편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만, 아내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남편들 가운데는 그런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숨겨진 꿈들을 아내가 알아주고 다독여 주면 큰 사고는 치지 않습니다. 아내가 무시하고 억압하고 외면하니 대형 사고를 치는 겁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단순히 아내로 대하지 마십시다. 우리의 아내들은 아내, 그 이상입니다. 엄마, 그 이상입니다. 당신의 눈에는 혹시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져버린 하찮은 사람처럼 보일지 모릅니다만, 그 사람 안에도 다 살아 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은 소녀도 살아 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은 숙녀도 살아 있습니다. 당신의 아내 안에는 마음껏 망가져 보고 싶어 하는 탕녀도 있고,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 거룩하게 일생을 바치고 싶은 수녀도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 주셔야 합니다.
모처럼 나들이 나갈 때, 시뻘겋게 입술연지를 바르고 나와도 곱게 봐 주십시오. 어쩌다가 비싼 원피스를 사 가지고 들어오면 "잘 했어. 아주 잘 어울리는데."라고 칭찬해 주십시오. "아휴, 목사님. 그러다가 살림 거덜 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 동안 낭비벽이 심한 여성들을 보아 왔지만, 남편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여성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치와 낭비의 습관은 모두 사랑 받지 못한 욕구 불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5.
자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을 늘 어린애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어리다 해도, 그 아이를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대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 아이의 마음 안에 다 있습니다. 어린아이도 있고, 소년도 있으며, 청년도 있고, 장년과 노년도 있습니다. 모범생도 있고, 부랑아도 있습니다. 악한도 있고, 성자도 있습니다. 부모의 꿈보다 더 대단하고 놀라운 꿈이 그들 안에 있습니다. 부모는 그것을 알아주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응석을 받아 주기도 해야 하지만, 또 때로는 어른처럼 거리를 두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열두 살 때의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늘 ‘예수 실종 사건’으로만 읽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영성신학자인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이 이야기를 ‘예수 가출 사건’으로 읽습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데 있다기보다, 예수님이 부모님의 곁을 잠시 떠났다는 데 있다는 겁니다.
열 두 살짜리 아들을 잃어버리고 나서 사흘 동안 예루살렘 곳곳을 뒤지다가 성전에서 아들을 발견한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2:48)고 말했을 때의 그 심정을 헤아려 보기 바랍니다. 소년 예수는 어쩌면 당돌하게 들릴만한 대답을 던집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을 들었을 때의 부모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십대 자녀를 둔 분이라면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소년 예수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유진 피터슨은 소년 예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 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설득력 있는 분석입니다.
"왜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통제하려고 하십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해도 괜찮았지만, 저는 이제 더 이상 부모님이 항상 지켜보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제게는 부모님과는 다른 저만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저의 관계는 부모님이 예상할 수 없는 길들로 저를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기대하는 영역을 넘어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제 인생에는 부모님이 지우시지 않은 다른 요청들, 제가 순종해야만 하는 요청들이 있습니다. 제 인생에는 그저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의무들을 제가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은 나사렛에 있는 집과 나사렛에서 드리는 예배가 전부가 아닙니다. 저는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는 더 넓은 세상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순종하여 성전으로 왔습니다. 부모님을 따르는 데서 시작된 순종이 이제는 부모님을 떠나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Like Dew Your Youth,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 67-68쪽)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으며 그 속에서 어떤 꿈들이 꿈틀대고 있는지를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예수님을 ‘열 두 살짜리 꼬마’로만 여기고, 그렇게 대했으며, ‘우리 자식’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소년 예수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의식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 사실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0절에 보면,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그 뜻을 살피는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있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51절)했습니다. 아마도, 이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내면을 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30세 즈음에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아들과 함께 살면서, 마리아는 예수님 안에 있는 많은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에 맞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아들처럼 대하고, 때로는 낯선 예언자처럼 대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훈련이 결국 마리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놓게 했고, 십자가에 이르는 그 험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아들과 함께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머니를 대할 때, 때로는 많은 여인들 중 한 사람으로 대하기도 했고, 때로는 아들로서 그 어머니의 품에 기대어 쉬기도 했을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그 모습을 처연하게 그려놓았습니다.
6.
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지, 이제야 깨닫습니다. 내게 필요한 하나의 역할로 그 사람을 묶어 놓고, 그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박해요 착취요 억압임을,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한 여자가 저에게 아내의 역할을 해 주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살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아내로, 때로는 애인으로, 때로는 소녀로, 때로는 어린애로, 때로는 성녀로 그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내를 사랑한다 해도 아내로만 대한다면, 그 사람의 일부분만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일부분만을 사랑받고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남편도 마찬가지고, 부모도 마찬가지며,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도 마찬가지고,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대하든,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의 역할로 그 사람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 마음 안에 담긴 것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살피고 그렇게 대할 때, 그 사람은 전체로 사랑받게 됩니다. 그렇게 전체로서 사랑받을 때에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중심을 보고 그 사람을 전체로서 사랑하는 것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진실로 원하는 진정한 ‘사람대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대접이 곧 사랑입니다.
오래 전, 영국의 던디(Dundee) 시 근처에 있는 애쉬루디 병원(Ashludie Hospital)의 노인 병동에서 어느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호원들은 그 병약하고 가난했던 할머니의 소지품을 정리하다가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쪽지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간호원 아가씨들,
당신들 눈에는 누가 보이나요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묻고 있답니다.
당신들은 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요.
그다지 현명하지도 않고, 성질 머리 까다로운
눈초리마저도 흐리멍덩한 할망구로 보일 테지요.
먹을 때 칠칠치 못하게 음식을 흘리고
당신들이 큰소리로 "한번 노력이라도 해봐욧!" 소리 질러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노인네.
당신들의 보살핌에 감사 할 줄도 모르고
늘 양말 한 짝과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답답한 노인네.
아무런 저항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씻기든 먹이든
당신들이 하는 대로 맡기고 사는 반송장.
그게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 인가요.
그게 당신들 눈에 비쳐진 '나' 인가요.
그렇다면 눈을 떠보세요.
그리고 제발 저를 한번만 제대로 바라봐주세요.
이렇게 여기 가만히 앉아서
당신의 분부대로 고분고분 음식을 씹어 넘기면서
제가 과연 누구인가를 말해줄게요.
저는 열 살짜리 어린 소녀랍니다.
사랑스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 언니, 동생들도 있지요.
저는 발에 날개를 단 열여섯 처녀이기도 합니다.
곧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꿈을 꾸고 있지요.
저는 또한 스무 살의 꽃다운 신부입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아름다운 신부 말입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스물다섯의 엄마도 제 안에 있습니다.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 보살펴 주는 엄마.
마흔 살의 저도 있네요.
이젠 아이들이 다 자라 집을 떠났어요.
하지만 남편이 곁에 있으니 울지 않습니다.
제 안에는 다시금 무릎 위에 아가들을 안고 있는
쉰 살의 할머니도 있습니다.
사랑스런 손주들과 나, 행복한 할머니입니다.
제 안에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우울해 하는 저도 있습니다.
저는 홀로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며 떨고 있어요.
제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들이 없답니다.
지나간 날들을 기억하고
그 때 나누었던 사랑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어느새 제가 노파가 되어버렸네요.
세월은 참으로 잔인하지요.
노인을 바보로 만드니까요.
몸은 쇠약해가고 우아했던 기품과 정열은 저를 떠나버렸어요.
한때 힘차게 박동하던 심장은 돌덩이가 되어 버렸네요.
하지만 아세요?
제 늙어버린 몸뚱이 안에 아직도 열여섯 처녀가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따금씩 쪼그라든 저의 심장이 다시 부풀어 오른다는 것을.
젊은 날들의 기쁨을 기억해요.
젊은 날들의 아픔도 기억해요.
저는 기억 속에서 아직도 사랑하고 있고,
지나간 삶을 다시 살고 있어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너무나도 짧았고
너무나도 빨리 가 버렸네요.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엄연한 진리를
이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간호원 아가씨들,
이제 눈을 떠보세요.
그리고 절 바라보세요.
겉으로 보이는 ‘괴팍한 할망구’ 말구요.
자세히 보세요.
이 속에 있는 ‘진짜 나’를
좀 보아 주세요.
7.
저는 지난 주간,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특별히 많이 드렸습니다. 제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누구도 ‘전체로서’ 대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교우에게도, 언제나 부분으로만 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부분으로만 인정받고 사랑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하라는 것임을, 이제야 분명히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잘못은 저만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읽어 보거나, 앞에서 읽어드린 어느 노인의 글을 보거나, 이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도 쉽게 저지르는 허물임을 알겠습니다. 서로를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부분으로만 대하고 사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별로 예외가 없는 듯합니다. 하여, 참된 사랑이신 하나님,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우리를 부분으로가 아니라 전체로 대하시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은혜를 구합니다.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가장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누구를 대하든 그 내면을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그리하여 그 사람 전체를 보고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하시기를!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감히 사랑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음을 인정합니다. 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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