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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2 (김 영봉 목사)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1. 얼마 전, 한국에서 어느 10대 소녀가 만들었다는 ‘안티 엄마 카페’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엄마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인터넷 카페입니다. 카페가 개설되자 100여명이 회원으로 등록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는데, 여론이 들끓자 포털 회사인 네이버 측에서 카페를 폐쇄했습니다. 그 카페의 소갯말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소중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고귀한 ‘어머니’라는 칭호는 이미 타락되었다. 탄생시킨 생명을 소중하게 키워나가야 하는 그 어머니란 존재들은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다고 보는가. 자식을 상처입혀 괴롭히는 부모가 부모인가. 우린 너희의 노예가 아니야, XXX들아. 우리가 언제 행복하게 살았었나. 우리를 괴롭히는 부모라는 그들을 항상 따르고만 있어야 하는가? 그들을 증오하는 자여, 이리로 오라. 그들에게 상처받은 자여, 이리로 오라. 환영한다, 그대여. 어떻습니까? 끔찍한 일이 아닙니까? 이런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참, 걱정스러운 일입니다만, 아이들만을 탓할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누가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비뚤어진 세상 탓도 없지 않지만, 부모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왜 이같은 분노가 아이들의 마음에 쌓입니까? 그들이 부모의 말과 행동을 ‘사랑’이나 ‘애정’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집착’ 혹은 ‘학대’로 느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랑과 집착은 분명히 다릅니다. 둘의 차이를 말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낌으로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고 자유함을 느끼게 하며 또한 자신을 소중하게 느끼게 만듭니다. 반면,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하고 구속된 느낌을 받게 하며 자기 자신이 싫어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요 학대입니다. 2. 사랑에 대한 우리의 무능의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진실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우리가 경험한 사랑이 부족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이웃 사랑’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 22: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진실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 사랑’보다 더 앞서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 받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 사랑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졌기 때문에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집착이 아니라 사랑,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살아감으로 인해 우리는 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의 본질이 ‘사랑’에 있는데, 그 본질적인 특성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하늘을 잊고 살다가 날개짓을 잃은 독수리같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가면서 우리는 많은 상처를 받으며 마음이 깨지고 일그러지고 오염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이 깊에 잠기지 않고는 우리는 누구나 사랑에 무능합니다. 실은,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 안에는 사랑이 아니고는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느낌과 행동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공간이 충분하게 채워지면, 우리는 내적인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고 살아갈 것이며,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그 만족감과 행복감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반면, 그 공간이 비어 있으면 우리는 내적인 불만족감과 불행감을 느끼며 살 것이고, 그 정서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무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진실한 사랑, 순수한 사랑, 뜨거운 사랑을 받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사랑을, 우리는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자애로운 부모님에게서 이같은 사랑을 받고 자란 분들이 계십니다. 형제나 친구 혹은 배우자로부터 경험한 분들도 계십니다. 그 사랑의 경험이 깊고 강할수록 그 사람은 내적인 안정감과 만족감 속에서 살고,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면,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사랑을 어색하게 느낍니다. 하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서 얻는 사랑은 어떤 것이든 불완전하다는 점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에 가장 가깝다 할 수 있는 부모님의 사랑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부모가 되어 보니 알겠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사람에게서 경험할 수 있는 사랑보다 더 완전한 사랑, 더 근본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그같은 사랑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대답이 너무 쉬워서 안 됐습니다만,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바로 나 한 사람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기까지 사랑한 것은 바로 너다. 너를 살리기 위해 네 어미가 자기 손가락을 끊어 피를 네 입에 넣어 먹게 했듯,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내 몸 전체를 내어 주었다. 그러니 나에게서 눈을 돌리지 말라.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 내 사랑에 마음을 열고, 내 사랑을 먹고 마셔라. 그 사랑에 취해 살아가라.” 이 사랑을 받을 때, 우리 내면의 구멍은 온전히 채워집니다. 이 사랑을 발견할 때, 우리가 그동안 사람에게서 경험했던 사랑의 경험들이 완성됩니다. 이 사랑을 발견할 때, 우리가 그동안 사람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의 결핍들이 해결됩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비로소 안식할 수 있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상처난 마음을 치료해 주며, 어두운 마음을 밝혀 주고, 일그러진 마음을 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해갑니다. 3.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적어도 세 가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 가지의 변화는 순차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 가장 먼저 오는 변화는 나 자신이 새롭게 보이는 변화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누구에겐가 사랑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고, 사랑 받는 것만큼 사람을 깊이 그리고 항구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나에게 매우 중요한 어떤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새롭게 보게 만듭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중요한 사람일수록 영향력은 더 커집니다. 그렇다면,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다 더 그렇겠습니까?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한 분이고, 나는 60억 인구 중 한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그분이 어찌 나를 알랴?”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마치 학생들이 선생을 대할 때 가지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학생들은 여럿이고 선생은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선생이 자신들을 집단으로 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이 한 학생에게 개별적인 관심을 보여 주면, 그 학생은 감동하기 마련입니다. 그 많은 학생들 중 내가 선택되었다는 점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집단으로 대하시지 않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입니다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이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듯이 사랑하신다”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그분은 나를 개인적으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마치 그분의 관심은 온통 나에게만 쏠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감격합니다. 그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여 통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잠시 혼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같은 인격적인 만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의 사랑에 취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내가 달라 보입니다. 내가 귀해 보입니다. 나 자신만을 두고 보면 별 것 없어 보이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면 때로 초라하기 그지 없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고 나를 찾아 주셨으며 나를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나 자신이 비할 바 없이 귀해 보입니다. 그래서 “아, 이대로 살아선 안 되겠다!”는 다짐과 결단이 생깁니다. 그래서 자기 집착과 자기 혐오에서 비롯된 모든 어리석은 일들을 버리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거룩한 새로운 습관들을 연습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 사랑은 특별합니다. 내가 사랑받을만하지 않음에도 나를 사랑하셨다는 점이 그 중에도 제일 특별합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5장에서 잘 지적했듯,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직 죄에 물들어 있을 때 나를 위한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고 내가 사랑받을만한 상태가 아님에도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힘쓰는 지금 당장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하루에도 여러 번 인정하고 삽니다. 제 자신에게는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이 나를 지으시고 낳으시고 구속하셨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은 사랑할만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로 말씀 드리자면, 마음에 들었다 말았다 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더 많습니다. 때로는 한심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사랑할 만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자랑스러워할 만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나를 하나님이 사랑해 주셨고 또한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제 마음이 달라집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딱하지만, 여전히 저 자신을 보듬어 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혐오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가장 큰 반역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혐오하고 학대하는 자식을 보고 좋아할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보듬어 안고 사랑할 때, 우리의 속 사람은 무럭 무럭 자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엡 5:1)라고 말씀했는데, 가장 먼저 본 받아야 할 것은 그분의 사랑 방법입니다. 4.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변화는 그 사랑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우리 이웃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2절). ‘내리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먼저 사랑을 받아야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그 사랑이 우리를 통해 우리의 이웃에게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받을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이 사랑할 만하지 않아 보일 때에도 사랑하는 데까지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겠느냐?”(마 5:46).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원수가 없는데요”라고 말하면서 이 말씀의 도전을 회피하려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원수’라는 말을 ‘사랑할 만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라고 바꾸어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의 무게가 느껴지실 것입니다. 이웃 중에도 가장 가까운 이웃은 가족입니다. 그러니 가족에 적용하여 이 문제를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얼마 전, 프랭클린 그래함의 자서전 <Rebel with A Cause>라는 책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아들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전도자로서 세계 방방 곡곡을 누비며 수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때, 프랭클린은 20대 초반까지 반항아로서 거칠고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 번은 프랭클린이 바깥으로 떠돌다가 돈이 떨어져서 할리 데이비슨(Harley-Davidson) 오토바이를 요란하게 몰고 아버지 집으로 갔습니다. 그의 옷차림도 오토바이족의 모습 그대로요, 턱수염까지 기른 상태였습니다. 그가 집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아버지는 전도 협회의 운영위원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프랭클린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빌리 그래함으로서는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온 몸의 피가 얼굴로 몰리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리 그래함은 반갑게 아들을 맞이하고 운영위원들에게 “내 아들, 프랭클린입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아들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같은 말을 한 마디라도 할 법 한데, 아버지는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아들 프랭클린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표정과 몸짓과 음성을 살펴 보았으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서전에서 프랭클린은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반항과 방황 기간에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과 존경과 신뢰가 자신을 붙들어 주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자신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실하게 알았으며,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았음에 분명합니다. 그랬기에 그는 아들이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사랑이 아들로 하여금 방황 속에서도 벼랑까지 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전도 집회 때마다 마지막에 회심자들을 초청하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초청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사람들이 걸어 나오는 동안 어김없이 연주되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Come Just As You Are.” 우리 말로는 339장에 “주께로 거저 갑니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번역만 들으면, “주께로 빈 손으로 갑니다”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거저’라고 번역한 말은 ‘지금의 모습 이대로’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같은 사랑의 확신이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할 것 같습니다. 착할 때만이 아니라, 공부 잘 할 때만이 아니라, 말을 잘 들을 때만이 아니라, 부모의 기대를 져버리고 타락의 길로 가고 있을 때조차, 아니 그럴 때 더욱 더,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의 변함 없는 사랑과 신뢰를 확신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으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아이들이 먼저 느낍니다. 그러므로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역하고 외면하고 반항할 때조차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내 자식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부터 진실로 자식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자주 그 마음을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그것이 때로 아이에게 생명줄이 되어 줍니다. 가족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웃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할만한 조건을 따지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답게 사랑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대하기에 거북한 사람, 하나님을 등지고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 속속들이 세속적이어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 말과 행동에서 풍겨나는 돈 냄새 때문에 역겨움을 주는 사람?그런 사람들을 대면하고 받아주고 품어 줄 수 있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짜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하게 체험하면 일어나는 세 번째 변화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도록 이끌어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생깁니다. 인간이 줄 수 있는 사랑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나도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만, 내가 쏟아붓는 사랑을 모두 모아 보았자, 하나님의 사랑 한 방울만큼도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것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아들 프랭클린에게 보여준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프랭클린으로 하여금 벼랑 끝으로 가지 않도록 막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반항아요 방탕아였던 프랭클린이 돌아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프랭클린이 회심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하나 더 나누겠습니다. 22세까지 어둡고 거칠게 살았던 그는 내면에 심각한 번민과 갈등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것을 외면하기 위해 더 거칠게 살았습니다. 오토바이와 지프를 몰고 들로, 산으로 다녔고, 친구들과 어울려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내적 공허감은 더욱 커지고, 방탕한 삶이 점점 권태로와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빌리와 프랭클린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함께 산책을 합니다. 한 참을 걷다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프랭클린, 네 엄마와 나는 네가 번민하고 있음을 알고 있단다.” 프랭클린은 아버지가 자신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 처음에는 화가 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말을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어느 호텔방 침대 머리에서 요한복음 3장을 읽다가 아버지의 말대로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 때로부터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열고 그 사랑을 맛보면서 점차 과거의 어둠으로부터 빠져 나와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기도하고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몇 년 전, 방황하는 자녀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교우님과 말씀을 나누는 중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만 터치하시면 끝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한 번만 그의 마음을 만져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참으로 아무런 해결책이 없어 보이던 시기에 나눈 말씀입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했고, 그 교우님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2년만에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마음을 만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한 방울이 그의 마음에 떨어지자 그는 그 방황을 접고 새벽이슬같은 모습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 주시렵니까?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만나게 하는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이면 다른 것은 다 해결됩니다. 이 사실을 무시하고 살다가 나중에서야 뼈아프게 후회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부딪치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다. 공부가 우선되고, 성공이 우선되면, 나중에 다 헝클어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되면, 비록 출발은 늦어도, 비록 처음에는 헝클어지는 것 같아도, 결국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니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으로 품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 안에 자라도록 도우십시다. 자녀에게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이렇게 하도록 힘쓰십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사랑할 만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그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고, 때로 위로하고 때로 호소하고 때로 간청하고 또 때로 도전하면서 하나님을 대면하도록 돕는 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전가지는 우리의 이 노력을 귀찮아할지 모르지만, 그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가 왜 그랬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내게 가장 귀한 선물을 주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6. 우리는 8월 한 달 동안 ‘영적 여정에로의 초대’라는 주제를 가지고 은혜를 나눌 것입니다. ‘전도’라는 말이 너무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이미지로 변색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여정에로의 초대’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적 여정에로 초대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삶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8월 한 달 동안 우리는 이 일에 대해 말씀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며 우리가 할 일을 찾아 볼 것입니다. 오늘 그 첫 시간, 우리 모두 자신을 돌아 보는 기회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몇 가지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 보십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까? 그 사랑을 경험해 보았습니까?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진실하게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랑이 더 깊어지고 더 충만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랑을 사모하며 그 사랑에 압도될 때까지 힘쓰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말, 눈빛, 그리고 행동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나도 그렇게 내 가족을 그리고 이웃을 ‘아직 사랑할 상태가 아닐 때조차’ 사랑하고 있습니까? 만일 조금이라도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 사랑의 능력이 더 강해지도록 힘쓰십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그 사랑을 힘 입도록 간구하십시다. 셋째, 우리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까? 내가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일이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믿습니까? 그렇게 돕기 위해 내 마음에 두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의 형제 자매가 여러분의 기도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웃이 여러분의 기도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기도와 노력이 열매 맺을 때까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부터라도 여러분의 기도에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 중 가장 귀한 일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일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일에 있어서 무럭무럭 자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랑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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