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수장군님을 기억하십니까?
6.25전쟁 개전시에 육군대령으로 수도사단 참오장으로 전투에 임하셨고, 전쟁말기에는 육군준장으로 철원백마고지를 지키실때는 2군단 참모장과 2사단장으로 전쟁을 치르셨고, 1961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셨으며 현재는 미국에 살고 계시는 김웅수장군님의 회고록 게재를 시작하며 너무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럽기만 합니다.
김웅수장군님 2008년 7월 13일 워싱톤 한인교회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에 의해 그 타당성과 객관성이 증명되었습니다.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 니키타 후루쇼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6.25전쟁, 6.25사변, 6.25동란이라 부르고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일본은 조선전쟁, 중국은 항미원조전쟁, 미국은 한국전쟁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잊혀져 가는 6.25 전쟁 김웅수장군님의 회고록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21세기를 우리의 장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1부 한국전쟁회고 / 제2부 휴전후의 한국군 / 제3부 제2의 인생을 갖게한 5.16
순으로 게재될 김웅수 장군님의 회고록에 많은 찬사와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1950년 6월25일의 한국 전쟁 회고 "머릿말"에서
김 웅 수
6.25전쟁 개전시에 육군대령으로 수도사단 참오장으로 전투에 임하셨고, 전쟁말기에는 육군준장으로 철원백마고지를 지키실때는 2군단 참모장과 2사단장으로 전쟁을 치르셨고, 1961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셨으며 현재는 미국에 살고 계시는 김웅수장군님의 회고록 게재를 시작하며 너무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럽기만 합니다.
김웅수장군님 2008년 7월 13일 워싱톤 한인교회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에 의해 그 타당성과 객관성이 증명되었습니다.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 니키타 후루쇼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6.25전쟁, 6.25사변, 6.25동란이라 부르고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일본은 조선전쟁, 중국은 항미원조전쟁, 미국은 한국전쟁 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잊혀져 가는 6.25 전쟁 김웅수장군님의 회고록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21세기를 우리의 장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1부 한국전쟁회고 / 제2부 휴전후의 한국군 / 제3부 제2의 인생을 갖게한 5.16
순으로 게재될 김웅수 장군님의 회고록에 많은 찬사와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1950년 6월25일의 한국 전쟁 회고 "머릿말"에서
내 나이 이제 80이 넘었다. 기억력이 남아 있을 때 내가 겪었던 한국전쟁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나는 창군 때부터 군문에 종사한 덕분으로 전쟁 중 비교적 고급장교의 한 사람으로서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남북의 많은 피난민들의 고생과 굶주림, 전쟁미망인과 고아들을 보며 가정들이 파괴됨을 보았다. 전쟁은 군인 못지 아니한 많은 민간인의 희생을 동반 하였고 학살 납치 실종등으로 수복은 또 하나의 국민 비애가 되었다. 전쟁터에서의 가옥을 필두로한 재산의 피해도 서울과 대전이 초토화 됨도 보았고 전쟁 중 평양을 방문하여 미군에 의해 가설된 주교를 통해 대동강을 건너보았고 피난간 마을의 잠겨있는 빈집에서 이부자리를 운반하는 군인들께 분노해 보기도 했고 사단 법무관에게 전투지역에서 여인을 강간한 병사에게 사형언도를 강요해 보기도 하였다. 야음에 밀려 적의 전차 망에 들어갔다가 부하를 잃은 경험도 하고 북한군의 서울 진입 을 확인하며 서울 탈출을 위해 학생복으로 변장하고 지나가는 배 머리를 잡고 한강을 넘기도 하였다. 전쟁터에서 실종되어 어려운 거름에 지처 행인의 소도 빌려 타 보았다. 부대 철수 명령 하달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낙동강에 뛰어 들어가 강물에 떠나려가는 경험도 해 보았다. 그리고 가족의 피난사리에 고민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처남이 전사를 하게
되었고 대를 이여야할 사촌 동생을 전지에 나가 전사케 하는 쓰라림도 갖어 보았다.
주요 6.25 한국 전쟁 일지와 나에 대한 기록
1950년
1월12일 미국 아치슨 국무장관의 한반도 미 태평양 방위선
제외 선언과 한국내 미 지상군 철수 시작
나의수도사단 참모장(1950.6.10-7.)
6월 25일 새벽 인민군 전면 기습 공격
6월 25일 쏘련 대표 궐석 UN 안보리 북한군 철수 요구 결의
6울27일 미 대통령 미 육해공군에게 한국 지원 명령
6월28일 육군 본부 서울 철수, 인민군 서울 진입
6.29 맥아더 장군 한강 방어선 시찰
7.1 미군 선발대 한국 상륙(재일 미군)
7.4 미군 오산 철수
나의 제일 군단 인사참모(1950.7.5-8.5)
7.18 한국군 작전 지휘권 UN 사령관께 위임
7.21 대전 철수
나의 종합학교 생도 대장(1950.8.6-1951.2.28)
9.15 미 10군단과 한국 17연대및 한국 해병대 인천 상륙
낙동강 방어부대 공세 전환
9.28 서울 탈환
10.1 한국군 38선 돌파
10.8 중공 모택동 북한 지원군 출병 명령
10.19 미군 평양 입성, 한국군 7연대 수색대 압록강변 초산도착
10.13 경 중공군 18개 사단 약 30만 앞록강 도하
10.25경 UN군 진격 청천강에서 중공군에게 저지 당함
11월 말경 나의 평양 방문
12.1 미 8군 철수 개시
12.5 평양 철수
12.9-11 미 10군단과 한국 1군단 함흥 원사 철수
1951년
1.4 서울 재 철수, 평택 장호원 제천 삼척선 적 출혈 강요 지연
작전
2.21 재 반격 개시
나의 제 8사단 부사단장(1951.3.1-7.14)
3.13 공산군 전면 후퇴 개시
3.15 서울 재 입성
4.3 8군 38선 재 돌파
4.11 만주 폭격 주장한 맥아더 사령관 해임
7.10 마리크 주 쏘련 UN대사의 휴전 제안과 개성에서 휴전
협상 개시
나의 육군 본부 비서실장(1951.7.15-12.9)
나의 육군 대학 학생 시절(1951.12.10-1952.6.19)
1952년
12.2 미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 하우워 장군 한국 방문
1953년
나의제2군단 참모장(1952.6.20-1953.4.30)
나의 육군 제 2사단장(1953.5.1-12.14)
나의 야전군 참모장(1953.12.15-1954.6.4)
5.8 한국 정부 UN 휴전 조건 불 수락 통고
6.3 한국 정부 휴전 4개 조건 제시
6.18 미 정부 요청에 거부한 이승만 대통령 거제 포료
수용소에서 반공포료 27,000명 석방
6월 아이젠하우워 미 대통령 특사로 Robertson 국무차관보
와Collins 육군 참모 총장 한국 급파
7.15 한미 휴전 협정 합의
7.27 휴전 성립
10.1 한미 방위 협정 한미 양국 조인
1954년
1월 한미 양국 의회 한미 방위 조약 인준 공식화
1960
나의 제 6군단장(1960.10.30-1961.5.21)
5.16 군사 쿠테타
1961
나의 예편, 육군 소장으로 11월 15일부
1962
8.11 나의 도미 유학
약력
성 명 김 웅 수 (1923년 4월 11일 생)
학 력
1972 미국 Washington D.C. 카토릭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1962-1966 미국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경제학 학사와 석사
1955 미국 Ft Leavenworth 참모지휘대학 졸업
1952 한국 육군 참모학교 졸업
1945 서울 대학 법과 2년에 편입 1946년 잠시 통학하다 국대안 반대로 중지
1944년 일본 경도제국대학에 입교 되었으나 조국해방으로 귀국
1944 만주 여순 일본 고등학교(당시 일본 제국대학 예과격) 졸업
민간경력
1994-1999 건양대학교 경제학과 초빙교수
1995-1999 건양대학교 경영연구소 소장
1980-1993 미국 카토릭 대학 부교수
1990 서울 연세 대학교 초빙교수
1982 서울 고려 대학교 초빙교수
1973 미국 Washington D.C. 카토릭 대학 조교수
1972 미국 Washington D.C. 카토릭 대학 연구교수
1969-71 미 육군성 공병감실 수자원 투자 효율 분석관
자문 경력
1982 한국 포항제철 주식회사의 장래를 위한 방책 건의
1973-1981 미 육군 공병감실 수자원 투자에 관련된 연구
주요 사회 활동
현재 워싱턴 한인교회 원로장로, 한미 장학재단 동부지회 이사, 한미재단
및 미 동부 재향군인회와 국가 유공자 회 고문, 국제 한국학회 이사
2000-2002: 국제 한국학회 이사장
1995-1999: 한국 논산 제1 감리교회 원로 장로
1995-1999: 한국 논산지역 YMCA 창립 준비 위원장
1994: 미국 워싱턴 지역 한인사 편찬 후원회 회장
1985-1990: 미국 한미 장학재단 회장 및 전국 이사장
1972.10: 한국 정부 유신 체제 반대를 미국에서 지휘함으로 귀국 포기
2008년 7월 15일 미국 Virginia주 Great Falls시에서
육군 예비역 소장 경제학 박사 전 카토릭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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