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5일 주일설교 <정의, 그 불편한 복음의 진실> 4
“마음의 문제다”(It Is the Matter of Heart)
--로마서 12:1-2; 누가복음 19:1-10
1.
교회에서 오용되는 단어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은혜’입니다. ‘예배가 은혜롭다’, ‘설교에 은혜가 없다’, ‘사람들이 은혜스럽지 못하다’ 등과 같은 말들을 교회 안에서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막상 “은혜가 뭡니까?”라고 물어보면, 간단명료하게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막연히 ‘그냥 좋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은혜’라는 말이 제일 오용되는 경우는 ‘정의’의 반대말로 사용될 때입니다. 교회 안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다 보면, “아, 은혜롭게 그냥 덮어두고 넘어갑시다.”라고 말합니다.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은혜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부정과 비리가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눈 감고 넘어가는 것이 은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유난스럽게 문제를 삼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은혜를 위해’ 덮어 놓은 문제가 나중에 정말 은혜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불거지기도 합니다.
‘은혜’라고 번역된 헬라어 ‘카리스’(charis)가 신약성경에서 170회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첫째,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어야 합니다. 둘째, 매우 값비싼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대신 값을 치렀기 때문에 우리가 대가 없이 그것을 받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의 호의로 말미암아 매우 값진 무엇인가를 받았을 때,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두 종류의 은혜, 즉 ‘일반 은혜’(universal grace)와 ‘특수 은혜’(special grace)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일반 은혜는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모두가 받는 은혜를 말합니다. 태어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받을만한 아무런 대가를 우리가 치루지 않았습니다. 그냥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살도록 지어진 이 우주와 지구도 은혜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것을 누릴 자격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은혜입니다. 눈물도 은혜요, 사랑도 은혜이며, 밤에 잠자는 것도 은혜입니다.
‘특수 은혜’는 믿음을 가져야만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것도 특별한 은혜요, 내 마음이 그 복음에 응답하게 된 것도 은혜이며, 나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대속해 주신 것도 은혜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신 것도 은혜요, 성령을 주셔서 매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도 은혜이며, 이 목숨 다했을 때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받아 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 은혜 하나하나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싼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값을 치르시고 이 모든 선물을 무상으로 주셨습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이 은혜에 깨어나는 것이며 이 은혜에 잠기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강력한지,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은혜에 눈 뜬 사람에게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은혜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고 행하게 해 줍니다. 은혜와 정의는 반대말이 아닙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정의에 대해 모른 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는 정의에 대한 의식을 활짝 깨어나게 하고, 정의를 간절히 사모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진짜 은혜입니다.
2.
은혜를 자각할 때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또한 실천하게 된다는 사실은 오늘 읽은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라는 도시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던, 아주 번화한 도시입니다. 당시 로마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주 중요한 세금원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도시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상당한 권력자였다는 뜻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수한’(pure or clean)이라는 뜻의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이 장차 자라나서 순수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 기대와는 달리 그는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삭개오는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매우 불의하고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하에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로마 사람들이 거룩한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삭개오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들에게 세금을 걷어 들이는 일을 맡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라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는데, 삭개오는 로마 정부의 하수인이 되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불의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세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했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착취와 축재가 이루어졌습니다. 한 도시의 세리장은 로마 정부에서 정해준 액수에 자신이 착복할 액수를 더하여 지역별로 할당합니다. 그러면 지역 세리장은 거기에 자신이 착복할 만큼을 더하여 말단 세리들에게 할당합니다. 말단 세리는 또 그들대로 자신이 개인적으로 착복할 만큼의 액수를 더하여 집집마다 세금을 징수합니다. 결국, 납세자에게 떨어진 세금액은 로마 정부가 원래 정한 것보다 서너 배 더 불어납니다. 물론, 양심적인 세리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일단 부정한 조직 속에 몸을 담고 살려면 어느 정도는 그 조직의 악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으니, 부정의 정도가 훨씬 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는 세관장이었고, 부자였다”(2절)라고 썼습니다.
불의한 사회와 조직에서 홀로 정의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들은 다 ‘해 먹는’ 것을 자신만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내면의 유혹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눈 질끈 감고 남들처럼 꿀꺽 삼켜 버리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주변에서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같은 조직에 있는 사람들이 동조를 권합니다. 권하다가 안 되면 협박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제거를 음모합니다. 그 사람만 없으면 자신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의롭게 살려 하던 사람들도 점차로 타협하게 되고 결국 눈 질끈 감고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삭개오가 처음부터 불의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불의한 조직 속에서 타협하면서 점차로 불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시점까지 그는 매우 불의한 삶을 살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 정의를 향한 목마름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 보입니다. 많은 재산을 모았고 사람들이 벌벌 떠는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자신이 불의하게 살고 있다는 가책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막강한 권력과 돈을 거머쥐기는 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시당했습니다.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돈과 권력에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더욱 외로워져 갔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굽신거리기는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우정과 존경과 사랑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지어 놓으셨기 때문에, 물질에만 빠져 살 때 영적인 갈망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관계적인 존재로 지어 놓으셨기 때문에, 진정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면 결국 그것을 간절히 목말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진리의 존재로 그리고 정의의 존재로 지어 놓으셨기 때문에, 불의한 삶에 오래도록 빠져 있다 보면, “이건 아닌데!”라는 음성을 마음속에서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에게 그런 갈망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외면할 수 있었지만, 그 갈망은 점점 강해져서 나중에는 내면적인 괴로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직업을 그만 둘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사는 것도 방법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마음속으로는 정의를 갈망하면서도 정작 매일 불의하게 행동해야 하는 그의 사정을 해결할 방법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3.
그러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을 듣자 하니, 그분은 탁월한 지혜와 놀라운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같은 거룩한 사람을 감히 자기 같이 불의한 사람이 만나볼 꿈을 꾼다는 것이 말도 되지 않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분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합니다. 삭개오는 생각합니다. ‘혹시나 그분을 만나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는데, 어느 날 그분이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삭개오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갑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그분이 보이질 않습니다. 세리장 체면에 군중을 헤집고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리서 지켜보자니 키가 너무 작아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할까 하다가 꾀를 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을 짐작하여 그곳으로 앞 서 뛰어갑니다. 그리고는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무화과나무(the sycamore tree)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는 저쪽에서 무리들을 거느리고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지켜봅니다. 그분의 발걸음, 손짓, 눈빛, 얼굴 표정, 목소리 등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저분이라면 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을까? 하지만 내 주제에 어떻게 저분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먼 거리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예수께서 삭개오가 있는 나무를 보시는 겁니다. 흠칫했지만, ‘그냥, 둘러보시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그가 올라있던 나무에게로 예수께서 걸어오십니다. 그는 당황스러워졌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탈로 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내려가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상황이 자신의 삶의 상황과 얼마나 닮았는지 모릅니다. 영어로 ‘up a tree’는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다’라는 뜻인데, 딱 그 모양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무 밑으로 오시더니 자신을 부릅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반말로 부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아마 아람어에도 높임말이 있다면 높임말로 말을 걸었을 것입니다.
삭개오 님이시죠? 이제 내려오십시오. 오늘은 제가 당신의 집에서 묵고 싶습니다. (5절)
삭개오는 놀랍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굳이 찾아온 것도 놀랍거니와,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더 놀랍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정겹게 불러 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항상 사람들은 그를 ‘세리장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그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빈정대며 그의 이름을 들먹거렸을 것입니다. ‘삭개오라고? 아이고, 이름값이나 좀 하라고 해. 가장 더럽게 살면서 뭐 삭개오라고?’
그런데 예수께서 잊혔던 그 이름을 지극한 사랑을 담은 음성으로 불러 주십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은 기분이 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집에 와서 하룻밤을 묵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 그것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에게서 영영 버림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불의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영영 단절되었다는 생각이 그의 영혼의 큰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 자신의 집에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4.
삭개오는 급히 뛰어 내려 와서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제자들과 모든 무리들을 초청합니다. 그는 종들을 시켜 큰 잔치를 준비합니다. 가장 아끼던 그릇을 모두 내어놓고,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합니다. 아까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삭개오가 얼마나 불의하게 살았는지를 모르시는 것처럼 그의 환대를 받으셨고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한 참 잔치의 흥이 고조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삭개오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향하여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주겠습니다. (8절)
말 그대로 폭탄선언입니다. 듣는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자기 귀를 의심해야 했고, 삭개오가 제 정신인지 의심했을 것입니다. 순간, 모두가 충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잠시 묵직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부엌에서 와장창 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삭개오의 아내가 음식을 가지고 나오다가 남편의 말을 듣고 졸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저의 추측입니다만, 매우 근거 있는 추측입니다. 그런 선언을 듣고 놀라지 않을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이 삭개오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삭개오는 이 순간에 ‘정의의 투사’로 돌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떴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힙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히면, 다른 모든 관계도 바로잡힙니다. 나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물질과의 관계가 모두 바로잡힙니다. 그렇게, 관계가 바로잡히면,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다는 것이 당연해 보였는데, 은혜에 눈 뜨고 보면 얼마나 값비싼 선물인지 알게 됩니다. 관계가 바로잡히면, 생명을 허비해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생기고, 나만을 위해 사용하기에는 너무도 값진 선물이라는 사실에 눈을 뜹니다. 은혜에 눈 뜨기 전에는 이 세상이 당연해 보였는데, 은혜에 눈 뜨고 보면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알게 됩니다. 관계가 바로잡히면, 이 지구 환경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듭니다. 은혜에 눈 뜨기 전에는 이웃 사람들이 경쟁의 상대와 치부의 도구로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바로잡히자, 그들이 사랑할 대상으로 보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보니, 전에는 괜찮아 보였던 관행이 청산해야 할 부정이요 불의로 보입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든든한 바위처럼 보이던 재산이 은혜에 눈 뜨고 보니 죄 덩어리로 보입니다.
다 은혜가 만들어낸 일입니다. 삭개오의 아내가 졸도한 것도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는 때로 이렇게 애꿎은 피해자를 만들어냅니다. 그 같은 변화를 보고 예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9-10절)
예수님은 삭개오의 결단을 보고서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였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구원 받았음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눈 뜨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이는 것을 가리켜 ‘칭의’(just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어긋난 관계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맺은 모든 관계가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깨어진 관계들 속에서 인간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정의를 갈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대견합니다만, 어긋난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안다 해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이 관계를 바로잡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래서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의로운 존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존재로 인정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바른 관계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녀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칭의'(justification)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정의가 눈에 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히고, 그로 인해 우리의 모든 관계가 바로잡힐 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정의는 칭의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정의’를 의미하는 히브리말은 ‘차디크’(tsadiq)이고, 헬라말은 ‘디카이오쉬네’(dikaiosune)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성경에서 ‘정의’(justice)라는 뜻보다는 ‘바른 관계’(righteousness)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히브리 사람들도 그렇고, 그리스 사람들도 그렇고, 정의를 생각할 때 먼저 바른 관계 혹은 바른 상태를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칭의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정의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동력이 되어 정의를 행하면, 자신이 정의를 행하고 있다고 의식하지도 않고, 자기가 행한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칭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투사처럼 행동하고 자기 공로감에 사로잡힙니다. 또한 칭의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정의는 때로 비정한 칼날과 같이 작용합니다. ‘불의한 사람’을 상대로 싸우기 쉽습니다. 반면, 칭의가 동력이 되어 정의를 행하는 사람은 ‘불의한 행동’을 대상으로 싸웁니다. 칭의에서 나오는 정의는 날카로운 칼이 아니라 칼을 잡은 외과의사의 부드러운 손과 같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계속 세리장의 직책을 유지했다면, 로마 정부에서 주는 봉급으로 만족하고 로마 정부가 부과하는 세금만을 징수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 살던 저택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인들도 모두 내보냈을지 모릅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부하 직원들이 부당하게 착복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삭개오는 적지 않은 저항에 직면해야 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가족들과 불화를 겪어야 했을지 모릅니다. 폭탄선언을 한 그 날부터 아내가 주기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집안을 뒤집어 놓았을지 모릅니다. 과거처럼 돈을 물 쓰듯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부하 직원들로부터의 저항에도 직면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판 음모에 걸려 해고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더 이상 불의한 권력에 협조할 수 없어서 사표를 내고 다른 직업을 찾았을지 모릅니다. 그가 받은 은혜가 더 이상 과거처럼 불의에 손을 담그고 살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이름 뜻 그대로 순수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뜨는 것은 이토록 위험한 일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당연히 누리던 기득권과 특권과 관행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 은혜는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에 대해 소유권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말 그대로, 삶 전체를 제물로 하나님께 내 놓게 만듭니다. 바울 사도는 이 같은 변화를 생각하면서 로마서 12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제물’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당시에 소 한 마리 혹은 양 한 마리를 잡아 바치는 것은 커다란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손실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비교할 수 없이 컸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삶이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뜨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나의 삶을 드리는 것이 ‘산 제물’로 사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갔습니다.
6.
우리 교회를 통해 나이 50이 다 되어 하나님께 돌아오신 분이 계십니다. 원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대학을 다니면서 교회를 떠나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준 재벌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 자신도 역시 매우 능력 있는 사업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중년이 되어 물질적으로는 부족할 것 없이 살고 있었지만, 무엇인가 비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것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동안의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심한 후 일 년이 넘도록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얼마 전에 그분에게 깊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시면서 유산 상속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분은 당연히 상속세법에 따라 자신에게 남겨진 몫에 대해 세금을 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에 연연하여 부정을 행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산 상속에 연루된 다른 가족들이 반발을 하는 겁니다. 한 사람이 정직하게 상속세를 내면 다른 사람들도 보조를 맞추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상속세율이 너무도 높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상속세를 법대로 내는 사람은 바보라는 통념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만 관계되는 문제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가족과 친척이 연루되다 보니,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흘렸던 눈물은 진짜였습니다. 그분은 오늘의 삭개오입니다.
<구멍 뚫린 복음>(The Hole in Our Gospel)의 저자인 리차드 스턴슨(Richard Stearns)는 고급 그릇 제조업체인 레녹스(Lenox)의 CEO였습니다. 탁월한 능력으로 인해 그는 유수한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구호기관인 월드비전(World Vision)의 대표로 일해 달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그는 마치 이스라엘을 이집트으로부터 해방시키라는 부름 앞에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던 모세처럼 그 부름을 외면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고, 월드비전의 대표직을 받아들입니다. 한 순간에 그의 월급은 4분의 1로 줄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고급 호텔로만 다니면서 최고급 식당에서 최고위층 사람들만 대하던 그는 세계의 오지를 누비면서 가난하고 헐벗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허름한 텐트에서 냄새나는 침낭에 몸을 맡기고 잠을 청해야 하는 때도 많았습니다. 물질적인 형편은 이렇게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의 마음은 천국을 얻은 듯했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스스로를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여겼던 자신의 과거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졌습니다. 리차드 스턴스, 그도 역시 이 시대의 삭개오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다 보면, 정의가 지식의 문제요 두뇌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샌델 교수가 누누이 강조하듯, 우리는 매일의 크고 작은 결정들 앞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고민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삶의 지성의 문제이기보다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영어 표현에 “The heart of the matter is the matter of the heart.”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의 중심은 중심의 문제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눈 뜨고 그 은혜에 감동하면, 비로소 정의가 눈에 보이고 정의를 실천할 이유와 능력을 발견하게 되기에 정의는 마음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복음이 담고 있는 정의에 관한 네 번째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합니다. 정의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에 눈을 뜨고 나면 그 은혜는 우리를 더 이상 같은 상태로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주고, 우리의 모든 관계를 바로잡아주며, 그 새로워진 관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더 이상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내 삶을 내어 주도록,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두렵습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얼마나 뜨겁게 경험했습니까? 우리가 경험한 은혜는 우리를 얼마나 바꾸어 놓았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삭개오처럼 대단한 결단은 아니더라도,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가는 변화가 우리의 삶 속에 있습니까? 예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을 보신다면, 무엇을 보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실까요?
부디, 더 깊이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치고 그로 인해 더 깊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정의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주님으로부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말씀을 듣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들이 살아온 것이
삭개오 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눈뜨게 하소서.
은혜의 빛으로 정의를 보고
은혜의 능력으로 정의를 행하게 하소서.
저희의 삶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지게 하소서.
아멘.
“마음의 문제다”(It Is the Matter of Heart)
--로마서 12:1-2; 누가복음 19:1-10
1.
교회에서 오용되는 단어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은혜’입니다. ‘예배가 은혜롭다’, ‘설교에 은혜가 없다’, ‘사람들이 은혜스럽지 못하다’ 등과 같은 말들을 교회 안에서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막상 “은혜가 뭡니까?”라고 물어보면, 간단명료하게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막연히 ‘그냥 좋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은혜’라는 말이 제일 오용되는 경우는 ‘정의’의 반대말로 사용될 때입니다. 교회 안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다 보면, “아, 은혜롭게 그냥 덮어두고 넘어갑시다.”라고 말합니다.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은혜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부정과 비리가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눈 감고 넘어가는 것이 은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유난스럽게 문제를 삼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은혜를 위해’ 덮어 놓은 문제가 나중에 정말 은혜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불거지기도 합니다.
‘은혜’라고 번역된 헬라어 ‘카리스’(charis)가 신약성경에서 170회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첫째,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어야 합니다. 둘째, 매우 값비싼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대신 값을 치렀기 때문에 우리가 대가 없이 그것을 받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의 호의로 말미암아 매우 값진 무엇인가를 받았을 때,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두 종류의 은혜, 즉 ‘일반 은혜’(universal grace)와 ‘특수 은혜’(special grace)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일반 은혜는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모두가 받는 은혜를 말합니다. 태어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받을만한 아무런 대가를 우리가 치루지 않았습니다. 그냥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살도록 지어진 이 우주와 지구도 은혜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것을 누릴 자격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은혜입니다. 눈물도 은혜요, 사랑도 은혜이며, 밤에 잠자는 것도 은혜입니다.
‘특수 은혜’는 믿음을 가져야만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것도 특별한 은혜요, 내 마음이 그 복음에 응답하게 된 것도 은혜이며, 나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대속해 주신 것도 은혜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신 것도 은혜요, 성령을 주셔서 매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도 은혜이며, 이 목숨 다했을 때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받아 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 은혜 하나하나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싼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값을 치르시고 이 모든 선물을 무상으로 주셨습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이 은혜에 깨어나는 것이며 이 은혜에 잠기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강력한지,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은혜에 눈 뜬 사람에게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은혜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고 행하게 해 줍니다. 은혜와 정의는 반대말이 아닙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정의에 대해 모른 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는 정의에 대한 의식을 활짝 깨어나게 하고, 정의를 간절히 사모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진짜 은혜입니다.
2.
은혜를 자각할 때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또한 실천하게 된다는 사실은 오늘 읽은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라는 도시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던, 아주 번화한 도시입니다. 당시 로마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주 중요한 세금원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도시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상당한 권력자였다는 뜻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수한’(pure or clean)이라는 뜻의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이 장차 자라나서 순수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 기대와는 달리 그는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삭개오는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매우 불의하고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하에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로마 사람들이 거룩한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삭개오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들에게 세금을 걷어 들이는 일을 맡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라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는데, 삭개오는 로마 정부의 하수인이 되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불의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세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했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착취와 축재가 이루어졌습니다. 한 도시의 세리장은 로마 정부에서 정해준 액수에 자신이 착복할 액수를 더하여 지역별로 할당합니다. 그러면 지역 세리장은 거기에 자신이 착복할 만큼을 더하여 말단 세리들에게 할당합니다. 말단 세리는 또 그들대로 자신이 개인적으로 착복할 만큼의 액수를 더하여 집집마다 세금을 징수합니다. 결국, 납세자에게 떨어진 세금액은 로마 정부가 원래 정한 것보다 서너 배 더 불어납니다. 물론, 양심적인 세리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일단 부정한 조직 속에 몸을 담고 살려면 어느 정도는 그 조직의 악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으니, 부정의 정도가 훨씬 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는 세관장이었고, 부자였다”(2절)라고 썼습니다.
불의한 사회와 조직에서 홀로 정의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들은 다 ‘해 먹는’ 것을 자신만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내면의 유혹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눈 질끈 감고 남들처럼 꿀꺽 삼켜 버리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주변에서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같은 조직에 있는 사람들이 동조를 권합니다. 권하다가 안 되면 협박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제거를 음모합니다. 그 사람만 없으면 자신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의롭게 살려 하던 사람들도 점차로 타협하게 되고 결국 눈 질끈 감고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삭개오가 처음부터 불의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불의한 조직 속에서 타협하면서 점차로 불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시점까지 그는 매우 불의한 삶을 살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 정의를 향한 목마름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 보입니다. 많은 재산을 모았고 사람들이 벌벌 떠는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자신이 불의하게 살고 있다는 가책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막강한 권력과 돈을 거머쥐기는 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시당했습니다.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돈과 권력에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더욱 외로워져 갔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굽신거리기는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우정과 존경과 사랑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지어 놓으셨기 때문에, 물질에만 빠져 살 때 영적인 갈망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관계적인 존재로 지어 놓으셨기 때문에, 진정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면 결국 그것을 간절히 목말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진리의 존재로 그리고 정의의 존재로 지어 놓으셨기 때문에, 불의한 삶에 오래도록 빠져 있다 보면, “이건 아닌데!”라는 음성을 마음속에서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에게 그런 갈망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시하고 외면할 수 있었지만, 그 갈망은 점점 강해져서 나중에는 내면적인 괴로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직업을 그만 둘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사는 것도 방법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마음속으로는 정의를 갈망하면서도 정작 매일 불의하게 행동해야 하는 그의 사정을 해결할 방법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3.
그러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을 듣자 하니, 그분은 탁월한 지혜와 놀라운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같은 거룩한 사람을 감히 자기 같이 불의한 사람이 만나볼 꿈을 꾼다는 것이 말도 되지 않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분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합니다. 삭개오는 생각합니다. ‘혹시나 그분을 만나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는데, 어느 날 그분이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삭개오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갑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그분이 보이질 않습니다. 세리장 체면에 군중을 헤집고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리서 지켜보자니 키가 너무 작아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할까 하다가 꾀를 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을 짐작하여 그곳으로 앞 서 뛰어갑니다. 그리고는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무화과나무(the sycamore tree)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는 저쪽에서 무리들을 거느리고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지켜봅니다. 그분의 발걸음, 손짓, 눈빛, 얼굴 표정, 목소리 등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저분이라면 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을까? 하지만 내 주제에 어떻게 저분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먼 거리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예수께서 삭개오가 있는 나무를 보시는 겁니다. 흠칫했지만, ‘그냥, 둘러보시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그가 올라있던 나무에게로 예수께서 걸어오십니다. 그는 당황스러워졌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탈로 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내려가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상황이 자신의 삶의 상황과 얼마나 닮았는지 모릅니다. 영어로 ‘up a tree’는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다’라는 뜻인데, 딱 그 모양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무 밑으로 오시더니 자신을 부릅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반말로 부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아마 아람어에도 높임말이 있다면 높임말로 말을 걸었을 것입니다.
삭개오 님이시죠? 이제 내려오십시오. 오늘은 제가 당신의 집에서 묵고 싶습니다. (5절)
삭개오는 놀랍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굳이 찾아온 것도 놀랍거니와,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더 놀랍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정겹게 불러 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항상 사람들은 그를 ‘세리장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그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빈정대며 그의 이름을 들먹거렸을 것입니다. ‘삭개오라고? 아이고, 이름값이나 좀 하라고 해. 가장 더럽게 살면서 뭐 삭개오라고?’
그런데 예수께서 잊혔던 그 이름을 지극한 사랑을 담은 음성으로 불러 주십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은 기분이 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집에 와서 하룻밤을 묵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 그것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에게서 영영 버림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불의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영영 단절되었다는 생각이 그의 영혼의 큰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 자신의 집에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4.
삭개오는 급히 뛰어 내려 와서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제자들과 모든 무리들을 초청합니다. 그는 종들을 시켜 큰 잔치를 준비합니다. 가장 아끼던 그릇을 모두 내어놓고,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합니다. 아까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삭개오가 얼마나 불의하게 살았는지를 모르시는 것처럼 그의 환대를 받으셨고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한 참 잔치의 흥이 고조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삭개오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향하여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주겠습니다. (8절)
말 그대로 폭탄선언입니다. 듣는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자기 귀를 의심해야 했고, 삭개오가 제 정신인지 의심했을 것입니다. 순간, 모두가 충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잠시 묵직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부엌에서 와장창 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삭개오의 아내가 음식을 가지고 나오다가 남편의 말을 듣고 졸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저의 추측입니다만, 매우 근거 있는 추측입니다. 그런 선언을 듣고 놀라지 않을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이 삭개오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삭개오는 이 순간에 ‘정의의 투사’로 돌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떴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힙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히면, 다른 모든 관계도 바로잡힙니다. 나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물질과의 관계가 모두 바로잡힙니다. 그렇게, 관계가 바로잡히면,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다는 것이 당연해 보였는데, 은혜에 눈 뜨고 보면 얼마나 값비싼 선물인지 알게 됩니다. 관계가 바로잡히면, 생명을 허비해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생기고, 나만을 위해 사용하기에는 너무도 값진 선물이라는 사실에 눈을 뜹니다. 은혜에 눈 뜨기 전에는 이 세상이 당연해 보였는데, 은혜에 눈 뜨고 보면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알게 됩니다. 관계가 바로잡히면, 이 지구 환경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듭니다. 은혜에 눈 뜨기 전에는 이웃 사람들이 경쟁의 상대와 치부의 도구로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바로잡히자, 그들이 사랑할 대상으로 보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보니, 전에는 괜찮아 보였던 관행이 청산해야 할 부정이요 불의로 보입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든든한 바위처럼 보이던 재산이 은혜에 눈 뜨고 보니 죄 덩어리로 보입니다.
다 은혜가 만들어낸 일입니다. 삭개오의 아내가 졸도한 것도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는 때로 이렇게 애꿎은 피해자를 만들어냅니다. 그 같은 변화를 보고 예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9-10절)
예수님은 삭개오의 결단을 보고서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였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구원 받았음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눈 뜨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이는 것을 가리켜 ‘칭의’(just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어긋난 관계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맺은 모든 관계가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깨어진 관계들 속에서 인간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정의를 갈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대견합니다만, 어긋난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안다 해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이 관계를 바로잡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래서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의로운 존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존재로 인정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바른 관계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녀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칭의'(justification)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정의가 눈에 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히고, 그로 인해 우리의 모든 관계가 바로잡힐 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정의는 칭의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정의’를 의미하는 히브리말은 ‘차디크’(tsadiq)이고, 헬라말은 ‘디카이오쉬네’(dikaiosune)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성경에서 ‘정의’(justice)라는 뜻보다는 ‘바른 관계’(righteousness)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히브리 사람들도 그렇고, 그리스 사람들도 그렇고, 정의를 생각할 때 먼저 바른 관계 혹은 바른 상태를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칭의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정의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동력이 되어 정의를 행하면, 자신이 정의를 행하고 있다고 의식하지도 않고, 자기가 행한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칭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투사처럼 행동하고 자기 공로감에 사로잡힙니다. 또한 칭의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정의는 때로 비정한 칼날과 같이 작용합니다. ‘불의한 사람’을 상대로 싸우기 쉽습니다. 반면, 칭의가 동력이 되어 정의를 행하는 사람은 ‘불의한 행동’을 대상으로 싸웁니다. 칭의에서 나오는 정의는 날카로운 칼이 아니라 칼을 잡은 외과의사의 부드러운 손과 같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계속 세리장의 직책을 유지했다면, 로마 정부에서 주는 봉급으로 만족하고 로마 정부가 부과하는 세금만을 징수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 살던 저택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인들도 모두 내보냈을지 모릅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부하 직원들이 부당하게 착복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삭개오는 적지 않은 저항에 직면해야 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가족들과 불화를 겪어야 했을지 모릅니다. 폭탄선언을 한 그 날부터 아내가 주기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집안을 뒤집어 놓았을지 모릅니다. 과거처럼 돈을 물 쓰듯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부하 직원들로부터의 저항에도 직면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판 음모에 걸려 해고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더 이상 불의한 권력에 협조할 수 없어서 사표를 내고 다른 직업을 찾았을지 모릅니다. 그가 받은 은혜가 더 이상 과거처럼 불의에 손을 담그고 살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이름 뜻 그대로 순수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뜨는 것은 이토록 위험한 일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당연히 누리던 기득권과 특권과 관행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 은혜는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에 대해 소유권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말 그대로, 삶 전체를 제물로 하나님께 내 놓게 만듭니다. 바울 사도는 이 같은 변화를 생각하면서 로마서 12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제물’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당시에 소 한 마리 혹은 양 한 마리를 잡아 바치는 것은 커다란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손실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비교할 수 없이 컸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삶이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뜨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나의 삶을 드리는 것이 ‘산 제물’로 사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갔습니다.
6.
우리 교회를 통해 나이 50이 다 되어 하나님께 돌아오신 분이 계십니다. 원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대학을 다니면서 교회를 떠나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준 재벌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 자신도 역시 매우 능력 있는 사업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중년이 되어 물질적으로는 부족할 것 없이 살고 있었지만, 무엇인가 비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것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동안의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심한 후 일 년이 넘도록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얼마 전에 그분에게 깊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시면서 유산 상속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분은 당연히 상속세법에 따라 자신에게 남겨진 몫에 대해 세금을 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에 연연하여 부정을 행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산 상속에 연루된 다른 가족들이 반발을 하는 겁니다. 한 사람이 정직하게 상속세를 내면 다른 사람들도 보조를 맞추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상속세율이 너무도 높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상속세를 법대로 내는 사람은 바보라는 통념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만 관계되는 문제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가족과 친척이 연루되다 보니,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흘렸던 눈물은 진짜였습니다. 그분은 오늘의 삭개오입니다.
<구멍 뚫린 복음>(The Hole in Our Gospel)의 저자인 리차드 스턴슨(Richard Stearns)는 고급 그릇 제조업체인 레녹스(Lenox)의 CEO였습니다. 탁월한 능력으로 인해 그는 유수한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구호기관인 월드비전(World Vision)의 대표로 일해 달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그는 마치 이스라엘을 이집트으로부터 해방시키라는 부름 앞에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던 모세처럼 그 부름을 외면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고, 월드비전의 대표직을 받아들입니다. 한 순간에 그의 월급은 4분의 1로 줄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고급 호텔로만 다니면서 최고급 식당에서 최고위층 사람들만 대하던 그는 세계의 오지를 누비면서 가난하고 헐벗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허름한 텐트에서 냄새나는 침낭에 몸을 맡기고 잠을 청해야 하는 때도 많았습니다. 물질적인 형편은 이렇게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의 마음은 천국을 얻은 듯했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스스로를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여겼던 자신의 과거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졌습니다. 리차드 스턴스, 그도 역시 이 시대의 삭개오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다 보면, 정의가 지식의 문제요 두뇌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샌델 교수가 누누이 강조하듯, 우리는 매일의 크고 작은 결정들 앞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고민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삶의 지성의 문제이기보다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영어 표현에 “The heart of the matter is the matter of the heart.”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의 중심은 중심의 문제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눈 뜨고 그 은혜에 감동하면, 비로소 정의가 눈에 보이고 정의를 실천할 이유와 능력을 발견하게 되기에 정의는 마음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복음이 담고 있는 정의에 관한 네 번째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합니다. 정의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에 눈을 뜨고 나면 그 은혜는 우리를 더 이상 같은 상태로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주고, 우리의 모든 관계를 바로잡아주며, 그 새로워진 관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더 이상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내 삶을 내어 주도록,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두렵습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얼마나 뜨겁게 경험했습니까? 우리가 경험한 은혜는 우리를 얼마나 바꾸어 놓았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삭개오처럼 대단한 결단은 아니더라도,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가는 변화가 우리의 삶 속에 있습니까? 예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을 보신다면, 무엇을 보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실까요?
부디, 더 깊이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치고 그로 인해 더 깊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정의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주님으로부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말씀을 듣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들이 살아온 것이
삭개오 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눈뜨게 하소서.
은혜의 빛으로 정의를 보고
은혜의 능력으로 정의를 행하게 하소서.
저희의 삶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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