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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51)-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51)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 기원앞 795년 제34세 단군 오루문(奧婁門)왕검 즉위. *맏아들 사벌을 태자로 세우고 서정년(徐正年)을 태자태부로 황태명(黃太明)을 재상으로, 강자삼(姜子三)을 상장에 임명하였으며 이 해에 풍년이 들어 만백성이 기쁘고 또 편안하 므로 도리가(도里歌:신라의 도솔가의 뿌리이며 가악의 시초임)를 지어 불렀다. *786년 두 해(兩日)가 함께 뜨고 누런 안개(黃霧)가 사방을 덮었는데 이는 제9세 단군 아술왕검과 제45세 단군 여루왕검 때에도 이와같은 기록이 나온다. *서양: 814년경 카르타코시 건설. 800년 아테네.스파르타 등 도시국가 성립. 776년 제1회 올림픽 개최, 한편 동양의 인도는 800년에 브라만 세력확립으로 브라만교를 창..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50)-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50)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기원앞 1285년 제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왕검 즉위.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으로, 즉 진한을 진조선(眞朝鮮), 마한을 막조선(莫朝鮮), 번한을 번조선(番朝鮮)으로 고침. *1266년 단군조선의 남국(藍國)이 강해져서 서쪽으로 빈, 기에 이르렀다. 이에 여파달을 보내어 빈.기를 점령하고 그곳 유민들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여(黎)라 하였다. *1250년 변방의 장수 신독(申督)이 반란을 일으켜 임금이 잠시 영고탑(寧古塔)에 피하였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영고탑에 이주하여 살게되어 동북지방의 큰 도시가 되었다. *1238년 임금이 세상을 뜨시고 태자 아홀이 제위에 올랐다. ***기원앞 1237년 제23세 단군 아홀(阿忽)왕..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9)-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9)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신시 력 5906년, 단군조선 력 4342년, 서양력 2009년 10월 3일 개천일을 맞았다. 본 중앙일보사의 적극적인 지원과 미력한 필자의 노력으로 의 연재가 1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5회 정도를 거른 셈인데 본 연재는 50회 또는 51회에서 마무리를 지을 것이기에 단군조선의 역대임금 연표와 동서양의 주요사건의 기록을 간추려 기술함으로서 우리 상고사의 전체모습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선에서 종결 짓겠으나 우리 참역사문화를 알리면 서 바로 세워 민족정기를 회복해나가는 일을 중단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기원앞 1484 년 제 18세 단군 동엄(冬奄)왕검 즉위. 1483년 은나라가 사절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14..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8)-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8)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신시 18대사 및 단군조선 47대사를 옮겨 기술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고대사로부터 전 근대사 소개도 곁들여 보았다. 그러다보니 갈길은 먼데 남은 것이 많다. 결국 최대한 말을 아끼고 간략화 할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중국사를 소개하기 전 단군 13대 흘달 왕검까지를 소개 하였으니 9세에서 13세는 즉위년과 동.서양의 기록만을 옮겨오도록 하겠다. *기원앞 1985년 제9세 단군 아술(阿述)왕검 즉위.(국법전서(國法全書)를 다시 편찬함.) . **기원앞 1950년 제10세 단군 노을(魯乙)왕검 즉위.(고시(考試)로 인재등용, 처음 목축을 권장 하였으며 천문대를 쌓고 감성관을 둠, 등에 윷판이 새겨진 신기한 거북이 출현) . *기원앞 1891년..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7)-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7)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 *기원앞 2182년 제3세 단군 가륵(嘉勒)왕검 즉위. 2181- 을보륵(乙普勒) 박사가 한글의 전신인 국민정음(國民正音) 38자를 만듬 2180 – 고설(高설)에게 배달유기(配達留記)를 쓰게 함. 2177 – 색정(索靖)을 약수(弱水)로 보내어 흉노(匈奴)의 조상이 됨. 2175 – 두지주(頭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여수기(餘守己)가 우두머리 소시모리(素尸毛리)의 목을 베었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하였고 지금은 음이 변하여 소머리가 되었으며 그 후손 협야노가 바다로 도망하여 세 섬(三島:일본) 을 점령하고 참람하게도 왕이라 하였다. 2153 – 25년 만에 건청궁(乾淸宮)을 완성함 *배달유기(配達留記): 동..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6)-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6)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배달나라 신시(神市)의 개천 5906년(기원앞 3897), 단기 4342년 (기원앞 2333)인 2009년 9월, 10월 3일 개천일을 스므날쯤 앞두고 역대 환웅님들의 역년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동양과 서양의 연표를 따로 소개하여 상고시대 인류문명의 발상과 형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도록 해보겠다. 기원앞 3511년 배달나라 신시의 제5세 환웅 태우의(太虞儀)의 치세 중. 복희씨가 팔괘를 만들고 환역(桓易)을 지을즈음인 기원앞 3500년 경 슈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에 진출하였고 또 이집트 나일 강 유역에 도시국가 분립이 있었다. 제12세 주무신(州武愼)환웅의 재위기간인 기원앞 2850년에는 메네스왕이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를 통일하였고, 제1..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5)-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5)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본류를 떠나 중국인들의 문명은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도 아니고, 중국이라는 민족국가 성립의 자체가 우리의 신시, 단군조선의 통치를 뒤엎고 세워졌다는 사실에 접근하여 보았다. 의외로 그 분량이 많아 곁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말았으나 결코 시간의 낭비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유익한 일이었다고 사료된다. 당연히 13대 단군 흘달(屹達)왕검부터 다시 이어가겠지만, 그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최대한 간략 하게 요점만을 기술 하되 우리민족의 국가형성기로 볼 수 있는 신시(神市)로부터 기술하겠다. 즉 지금으로부터 9206년 전(B.C 7,197) 환국(桓國) 제1세 환인 안파견(安巴堅 )으로부터 제7세 환인 지위리(智爲利 )까지의 환국의 기록은 빼고,..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4)-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일본이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고 조작하고 왜곡한 목적은 한국을 영원한 자기들의 식민국가로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문화를 축소시키고 왜곡시켜 부끄 러운 역사문화, 내세울 것 없는 선조들임을 각인시켜 열등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식민지배를 숙명 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군조선을 신화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에 이어 한무제에 의한 한사군의 통치를 받는 식민국가로 우리의 고대사는 시작된다. 한사군 반도내 설치설은 중국의 사서 어디에도 그 기록이 없는데 한 예를 들면 중국의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여기에서 낙랑군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3)-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3)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진나라의 분서갱유, 춘추필법과 사필원칙, 우리민족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제단 소도(蘇塗)를 비롯한 수많은 왕릉 등의 유적들을 말소시키는 과정과 우리 역사 말살의 10대 수난사를 겪어냈음에도 그들의 역사서에는 그들과 대치된 동이민족, 단군조선(조선)의 얘기가 자주 등장한다. 가령 그들의 조상이라는 황제 헌원의 탁월한 인물됨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치우천황 (신시의 14대 자오지 천황)을 대치시켜야 했던 것처럼 비록 왜곡되고 비하는 됐을지언정, 그들이 그들의 우수성 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상고사를 완전하게 소멸시킬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영토는 여전히 반도를 벗어난적이 없고, 고조선은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위만조..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2)-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2)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앞 칼럼에서 진시황은 한족(漢族) 언어를 쓰는 나라들을 통일한 후에도 대대로 신봉해온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을 말살하지 않고서는 (화하, 화산족)의 천자국 단군조선 숭배사상을 지워버릴 수 없다고 보고 내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이계열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이들을 숙청하고, 서적을 불태우고, 조작된 사서들을 다시쓰고, 수만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 하였으며 그러고도 단군조선의 공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만리장성 축조사업정책을 펼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과연 동이족의 흔적을 다 지웠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고도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처치 곤란한 유물과 유적이 남을 것이다. 그것도 헤아릴 수 없을만큼 엄청난 수량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