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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시간의 장터에서(In the Market Place of Time)-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2012년 8월 19일 주일 설교
"시간의 장터에서"(In the Market Place of Time)
--에베소서 5:15-20

1.
한국에서 새로 사용되는 말 중에 '시(時 )테크'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의 첫 자를 따고 '테크놀로지'의 첫 자를 따서 붙여 만든 말입니다. 영어로는 time management와 같은 말입니다. 시간을 유익하게 관리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시간을 관리하는 것도 테크놀로지 즉 전문 기술이므로, 연구하고 배우고 훈련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력에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을 보면 '시테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1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우리 말 번역으로만 보면, '시테크'를 배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원문에 사용된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여기서 '세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카이로스'입니다. 이 단어는 '시간' 혹은 '세월'로 번역해서는 안 됩니다. 헬라어에는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크로노스'라는 말입니다. 반면, '카이로스'는 중요한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영어 번역에서는 자주 '기회'(opportunity)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아끼십시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자신을 위해 장터에서 값을 주고 건져내다'라는 뜻입니다. '건져낸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redeem이라는 단어로 번역합니다. 그냥 두면 버려 없어질 것을 값을 주고 건져내어 자신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를 담아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흘러가는 시간의 장터에서 값을 치루어 시간을 건져내어 기회로 만드십시오.

흘러가는 시간을 장터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터에는 좋은 물건이 나왔는지 유심히 살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혹시나 헐값에 나온 진귀한 물품이 없는지 찾습니다. 그냥 두면 먼지 속에서 뒹굴게 될 보물을 값을 주고 건져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redeem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그 시간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사가도록 진열된 상품과 같습니다. 시간의 장터는 매일 열립니다. 시간의 장터를 돌아다니면서도 그 시간의 진가를 모르고 장이 파할 때까지 사지 않으면, 그 시간은 다시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터에서 유심히 살펴서 좋은 물건들을 건져내는 사람처럼, 시간의 장터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건져내어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하루의 시간이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착각입니다. 우리가 값을 주고 사는 것만이 우리의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사들이지 않는 시간들은 마치 장터에 널려 있는 물건들과 같습니다. 그 모든 물건이 우리를 위해 펼쳐져 있지만 우리가 값을 주고 사야만 우리의 것이 됩니다. 하루 24시간의 '크로노스' 중에서 우리가 사는 것만이 우리의 소유 즉 '카이로스'가 되는 것입니다.

2.
장터에서 좋은 물건을 건져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안목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건져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귀중한 순간을 포착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을 보고 그것을 건져낼 수 있는 안목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비유 중 하나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마 13:45-46)

예수님은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상인이 마침내 값진 진주를 발견하듯,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꾸준히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구하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지속적으로 구하는'이라고 의역해야 옳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냥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때로 우리의 오감을 통해 계시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그것을 넘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비행기를 타고 서쪽으로 열 다섯 시간을 가면 저절로 눈 앞에 펼쳐지는 한국이라는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는 저절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찾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는 드러나게 되어 있고, 찾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면 눈이 확 뜨입니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전에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시간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일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직업을 대하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새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를 보았기에 새로운 눈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바울 사도가 쓴 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고후 5:7)

하나님 나라에 눈 뜬 사람은 더 이상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참된 하나님 나라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그 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은 바울이 사는 방법을 보면서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3.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면, 가장 먼저 관계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성령 체험을 하고 난 사람에게 일어나는 공통적인 변화는 배우자가 지극히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만일 대단한 영적 황홀경을 경험한 것 같은데, 배우자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생기지 않으면, 그 체험은 성령 체험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배우자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의무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기 전에 배우자를 보던 눈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서 달라졌기 때문에 저절로 달리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는 나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니, 사랑하고 섬기라고 나에게 붙여주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으로 배우자를 사랑하고 섬기게 됩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아, 내 아내는, 내 남편은 왜 그러지 못할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 아내도, 내 남편도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었으면......"하고 생각합니다. 수십년 예수를 믿어도 변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아내, 내 남편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남편이었고 얼마나 부족한 아내였는지를 자인하고, 하나님 나라를 더 환히 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면, 우리는 비로소 깨달을 것입니다. 문제는 내 아내, 내 남편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단 부부 관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기 전에는 누구를 대하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대했습니다. 상대방을 이용하여 나의 유익을 증가시키는 것이 모든 관계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용 가치가 없다 싶으면 찬바람이 날 정도로 매정하게 등을 돌려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그들을 섬기도록 나에게 붙여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힌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 25:40)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변장하고 나타난 주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주 멋진 인도주의적인 수사법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때 드러나는 진실입니다. 그 나라를 보고 나면, 겉으로 판단하던 습관을 청산하고, 그 사람의 조건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던 버릇을 내려 놓습니다. 오직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처럼 우리도 중심을 보고 모든 사람을 같은 값으로 대하게 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남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눈에 당신이 남들보다 못한 사람으로 보일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은 누구를 경멸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반면, 누구 앞에서도 굽신거리거나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값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빛으로 모든 사람을 똑 같은 값 즉 절대값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관계의 법칙입니다.

4.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면 또한 일상 생활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직업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여가 생활을 보는 눈이 달라지며, 작고 사소한 일들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직업을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 자체가 재미 있거나 보람 있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억지로 일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지 못해 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터에 나가는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아 보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직업을 '자기 실현의 수단'(means of self-realization)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확인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만 해도 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을 통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고, 그 직업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보면,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일이 하나님 나라에 의미가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알지 못할 때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우연히 택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나라에 눈 뜨고 나니 하나님께서 나를 그 일로 인도하셨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하고 그저 밥벌이로만 생각하고 산 것에 대해 회개하게 됩니다.

휴가를 하는 동안의 어느 날입니다. 무심히 TV 채널을 돌려가다가 벤니 힌(Benny Hinn) 목사가 어느 유대교 랍비와 대담하는 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벤니 힌은 '번영의 복음'(the Prosperity Gospel)을 파는 전도자로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 스캔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이 요즘은 무슨 말을 하고 다니나?' 싶은 호기심에 저는 그 대담을 한 참 지켜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와 대담하는 랍비도 역시 '번영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질을 잃고 물질적인 축복으로 미끌어져 들어간 전도자들은 어느 종교에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대담에서 랍비가 한 말 중에 귀담아 들을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직업을 물을 때 "What do you do for a living?"이라고 묻습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뭐 해서 밥 벌어먹고 삽니까?"라는 뜻입니다. 그 랍비는 이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묻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밥벌이 수단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는 직업을 물을 때 "What do you do to help others?"라고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어떤 직업으로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돕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직업이 밥벌이 수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수단이라는 의식이 자리잡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담을 보는 내내 고개를 저어가며 'No! No! 그건 아니지!'라고 생각했던 저는 이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심코 하는 말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저는 식당을 운영하여 배고픈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세탁소에서 깨끗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아픈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심령이 배고픈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배우려는 학생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다 보면, 자신의 직업이 밥벌이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일을 통해 버는 돈은 덤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을 통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목이 지난 다음 TV를 끄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들은 직업을 물을 때 어떻게 질문해야 할까? "What do you do to glorify your God?" "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혹은 "What do you do to make a difference to God's Kingdom?"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의사로서 이웃의 아픔을 덜어 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돕습니다." "나는 정성껏 사람들의 옷을 세탁해 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룹니다." "나는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배고픈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돕습니다." "나는 하루의 일을 끝내고 간 사람들의 뒷자리를 청소하여 사람들이 산뜻하게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나라를 돕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직업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말할 수 없다면, 그 직업은 없어져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사기를 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나는 이웃을 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기를 칩니다"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렇게 표현하고 진실로 이렇게 믿는 사람은 직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더 잘 먹고 싶어서 부정한 이득을 탐합니다. 하지만 "이웃을 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일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성직'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면, 모든 직업이 성직임을 알게 됩니다. 그 직업을 통해 이웃을 도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무슨 직업이든 성직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모두 다 성직이라고 생각하는 목회를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한다면, 혹은 목회하면서 그 나라에 대한 시각을 잃어 버린다면, 목회는 성직이 아니라 목에 풀칠을 하는 밥벌이 수단이 되고 맙니다. 밥벌이로서 목회를 하는 것은 가장 불행한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경험은 직업만을 새롭게 보게 만들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활동들을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다시 보게 합니다. 영어의 killing ti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험악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 말에도 그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소일'(消日)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일로 소일하십니까?"라는 말은 "무슨 일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쓸어 없애고 있습니까?"라는 뜻입니다. 하루 하루를 쓸어 없애는 것이 하루 하루의 삶이라니,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허망한 삶입니까?

'은퇴' 이후의 나날들은 '소일' 혹은 killing time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은퇴 이후에 편안히 놀고 먹는 것이 가장 좋은 은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What do you do for a living?"이라고 질문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고 직업을 통해 이웃을 돕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마음을 쏟는 사람에게는 은퇴가 없습니다. 직업에서는 은퇴가 있다 해도, 이웃을 돕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편안히 먹고 논다고 '노년'이 아닙니다. 노년은 이웃을 돕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더욱 헌신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5.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그 나라의 빛으로 우리의 관계와 일상을 새롭게 보게 되면, 하루 24시간 전체를 redeem할 수 있습니다. 장터에서 건져내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소일의 대상이었던 나날들을 건져내어 값진 나날로 만들 수 있습니다. 덧없어 보이던 일상이 영원의 빛깔을 입게 됩니다. 삶의 질이 달라지고, 삶의 빛깔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월을 아끼십시오"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새로운 눈을 뜨라는 뜻입니다. 매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변장하고 나타난 주님'으로 대하고, 이웃을 돕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려는 목적으로 모든 일들을 섬기게 되면, 허비되는 시간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쓸어 없애는 '소일(消日)의 삶'이 아니라, 하루 하루를 건져내어 쌓아올리는 '적일(積日)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매일 우리에게 열리는 시간의 장터에서 보물을 건져내는 일입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라는 말씀을 한 뒤에 바울 사도는 곧바로 "때가 악합니다"라고 적습니다. "때가 악하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세월을 아끼십시오"라는 말과 관계하여 그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여기서 '세월을 허비하게 하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우리에게 열리는 시간의 장터에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게 만드는 악을 말합니다.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이해관계에 따라 굽신대게도 하고 외면하게도 하는 악을 말합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을 돈벌이로만 생각하게 만드는 악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소일하여 결국 인생 전체를 텅 비게 만드는 악을 생각하고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2천 년 전, 바울 사도가 활동할 당시에도 이 악은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합니다.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물질주의'(meterialism), 나 혼자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개인주의'(individualism), 돈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황금만능주의'(mammonism), 지금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쾌락주의'(epicureanism), 먹는 게 남는 거라고 믿는 '소비주의'(consummerism) 같은 시대 정신들이 우리를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이비 과학정신이 합세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무시하고 외면하며 경멸합니다. 이러한 시대 정신에 속으면 영락없이 시간의 장터에서 날이 저무는지 모른채 놀이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살게 됩니다. 일생동안 잘 산다고 노력했는데, 돌아보니 인생이 빈 껍데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악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값진 진주를 찾아 세상 구석 구석을 찾아 다니는 상인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꾸준히, 끊임없이, 매일, 지속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매일 깊은 기도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마음과 영혼을 다해 예배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에게 자신을 열고 영적 사귐을 나눠야 합니다. 이웃에게 자신을 낮추어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찾는 길입니다.
그렇게 찾는 사람에게는 필경 그 나라가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한 순간에 환히 드러내기도 하고, 조금씩 드러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마 7:7-8)

그동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워줄 약속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구하라고, 찾으라고, 문을 두드리라고 권하시는 대상은 우리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 보기를 구하고, 그 나라 경험하기를 찾으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문을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를 사모하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됩니다.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그렇게 하면 됩니다.

6.
하나님 나라에 눈 뜨면, 우리에게 보이는 이 세상은 전혀 달라 보입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니 전과는 달리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전과는 달리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기 위해 우리에게 '시테크'의 기술도 필요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변화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악한 세대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살고, 육신 안에 살고 있으면서 영생을 누리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의 장날이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지난 주간에도 92세의 노령에도 한 참을 더 사실 것 같던 집사님께서 아침 잠을 주무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한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청년처럼 활발히 활동하시던 분이 심장마비로 인해 속절없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의 장날은 한 없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불원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시간의 장날은 영원히 마감됩니다.
그러니 "세월을 아끼십시오"라는 말씀을 흘려 듣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시간 있을 때,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그 나라의 눈으로 이 세상을 살아 하루 하루를 건져내어 영원의 창고에 쌓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를 찾아다니는 '하늘의 상인'이 되십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를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천국의 나그네'가 되십시다. 그것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부르심이요, 인생에서 진정한 성공을 이루는 길입니다.

오, 주님,
저희로 하여금
주님 나라 보기를 갈망하게 하시고
그 갈망으로써 그 나라를 보게 하소서.
그 나라를 봄으로
매일 열리는 시간의 장터에서
소일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주님처럼 대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는 모든 일을
예배처럼 섬기게 하소서.
이 악한 세대에서 저희를 건져 주시고
주님의 나라에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