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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If Only We Knew Whom We Believe-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누굴 믿는지 안다면..."
(If Only We Knew Whom We Believe)
--야고보서 2:1-4, 14-17.

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2/audio090912kim_c.mp3

지난 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통일교 교주 문선명씨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세인의 관심은 스스로 메시야를 자처하던 교주가 세상을 떠난 다음 통일교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쏠려 있습니다. 언론의 관측에 의하면, 종교 분야는 막내 아들이 맡을 것이고, 사업 분야는 넷째 아들이 맡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문선명씨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내부 다툼이 많았던 가정이기 때문에 '왕자들의 난'으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통일교 세계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은 막내 아들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통일교회의 절차에 따라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아들이 스스로 메시야라던 아버지의 주장과 기괴한 통일교 교리들을 진실로 믿어서 목사가 되고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큰 의문이 남습니다. 통일교 세계 회장의 자리는 적어도 그 세계 안에서는 황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권력과 물적 권력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오를 것이 약속된 상태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믿음을 순수하게 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편지의 저자인 야고보는 자신의 형이 시작한 종교 운동을 이어간 사람이라는 점에서 문선명씨의 막내 아들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을 낳은 후 성모 마리아가 처녀로 지냈다고 믿기 때문에 야고보가 예수님의 친동생이 아니라 사촌 동생일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처녀로 살았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기 때문에 개신교회에서는 친동생으로 봅니다. 마리아가 처녀로 죽었다는 믿음은 마리아 숭배를 위해 후대 교회가 만들어낸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형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 인물이 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수제자들 즉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일찍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선교를 위해 다른 도시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를 가리켜 '예루살렘 교회 초대 감독'(the first bishop of Jerusalem)이라고 부릅니다.

문선명씨의 아들이 목사가 되어 통일교를 이끌고 있는 것과 야고보가 형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던 것은 서로 닮은 점이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문선명씨의 아들의 믿음은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에 오름으로써 얻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거대 종교 왕국의 황제가 되는 일인데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모든 부귀영화를 거부하고 진리를 택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기는 합니다만, 흔히 볼 수는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믿음은 그 진정성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서도 그렇고, 다른 로마 도시에서도 그렇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야고보는 62년 경에 유대 자치 의회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투석형을 당했습니다. 만일 야고보가 자신의 형을 그리스도로 진실로 믿지 않았다면, 이같은 불이익을 감수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편지 야고보서는 그의 믿음이 속임수가 아니라 진리를 담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2.

교회력을 따라 읽은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1절)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편지의 독자들에게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하를 읽어 보면, 그는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복음이 한 나라에 들어가면, 초기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가 부자나 지체 높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별 생각 없이 특별 대우를 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부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입니다.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차별 대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우리는 도시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현상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한 동네에 교회가 하나 밖에 없던 상황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의 부친은 초등학교 교사이셨는데, 장손이기 때문에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거의 평생을 지내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고향 동네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제자이거나 학부형입니다. 어디를 가나 선생님으로 대접받으셨습니다. 제 부친은 40대 중반에 회심하셔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부친께서 교회에 처음 나오셨을 때, 교인들이 어떻게 대했을지 아주 쉽게 상상이 됩니다. 교회 바깥에서 선생님으로 존경받던 분이므로 교회에서도 그렇게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모두들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다음 주일에 남편을 잃고 홀로 근근히 사는 노인이 처음 교회에 나왔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렇다면, 한 주 전에 선생님이 교회에 나오셨다고 잔치를 벌이듯 한 교인들이 그 노인의 출현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로 환영했을까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냉대하는 교회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맞이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초대 교회에서 자주 일어났던가 봅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가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아니 그것은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무심코 사람을 차별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믿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그냥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지 않고,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라고 적습니다. 차별하는 것은 영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New Living Bible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았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어떻게 여러분이 우리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그분은 역차별을 하셨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분은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가셨습니다.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있으면, 그분은 병든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경건하게 사는 사람과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 중에서 죄인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믿는 주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미국에 사는 우리 이민자들은 회개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 민족은 단일 혈통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다른 민족에 대한 차별 의식이 매우 강합니다. 우리보다 나아 보이는 민족에게는 주눅이 들어 이유 없이 웃어가며 무조건 "Yes! Yes!"하면서, 우리보다 못해 보이는 민족에게는 함부로 대합니다. 그래서 한인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한인들에 대한 증오 범죄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 어느 민족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인종 차별에 있어서 가장 심하다면, 우리는 심히 회개해야 합니다.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만 지켜야 할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내 믿음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15-17절)

이 대목에서 찔끔하실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과거에 가난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부유한 집에 태어나 유복하게 산 사람조차도, 나라 전체가 가난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가난의 경험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도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고, 개인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오죽했으면 한 때 전국에 울려 퍼졌던 노래 중에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라는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살아왔고, 우리의 믿음도 가난을 벗어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가장 인기 있던 부흥사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분이 제안한 '삼박자 축복'이란 것이 있습니다. 요한삼서 2절의 말씀, 즉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축복은 1) 영혼의 축복과 2) 물질의 축복과 3) 건강의 축복, 이 세 박자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설교하셨습니다.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가 마을마다 확성기로 울려 퍼질 시대에 교회에서는 삼박자 축복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민자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이민의 동기가 다양해졌지만, 과거에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동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선전했습니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부지런하기로 따지면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는 우리 민족은 미국에 와서 신속하게 자리를 잡았고, 거대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축복의 땅' 미국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감사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까맣게 잊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무시 당하는 사람들, 밀려난 사람들, 따돌림 받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시고 돌보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예수 믿어 축복 받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축복을 받아들고 그것을 왜 주셨는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축복이 자신 안에 고이게 만들었습니다.

4.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가난의 문제를 하나의 예로 들어 살아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독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냉담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것을 예로 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안다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진정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나듯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차별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한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그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0-11절)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말은 우리 삶의 모든 분야가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뜻입니다. 간음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살인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모든 인간을 존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라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 내용에서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에 수 많은 계명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의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그 정신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차별성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음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정치는 현실이다"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진심이 내 가게 장부에도, 내 침실에도, 나의 컴퓨터에도, 나의 거래 현장에도 드러나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주님께서 주님이 되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신앙의 어떤 면에서는 아주 칭찬받을만할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봉사하는 면에서 칭찬받을만 합니다. 어떤 분은 신실한 기도 생활로 인해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칭찬받을 만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낌없이 재정적으로 헌신하는 것으로 칭찬 받을만 합니다. 선교에 아낌없이 헌신하는 것으로 칭찬받을만한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동스럽습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혹시나 무엇을 잘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망각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자신을 돌아 보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봉사에는 게을리하는 것 아닙니까? 말씀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선교에는 담을 쌓고 있는 것 아닙니까? 봉사는 열심히 하는데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는 데는 등한히 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보는 시험 제도에 '과락'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시험을 치룬 모든 과목의 총점이 합격점을 넘었어도 어느 한 과목에서 낙제를 하면 떨어지는 제도입니다. 과락 제도를 두는 까닭은 모든 분야를 고루 공부하라는 뜻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신앙에도 과락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꽤 심각한 경고를 던집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2절)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믿음 생활을 시험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혹시 과락할만한 과목은 없습니까? 골고루 다 잘 하는데, 어느 한 면에 대해서는 도무지 마음이 안 가는 영역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그 장벽을 허물고 그것까지 끌어 안으라고 우리를 흔드십니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은 가난의 문제에서 많은 이들이 과락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요 1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의 문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까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난의 문제는 주님의 주요 관심사인데, 가난의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므로 그 관심사를 끝까지 붙들라는 뜻입니다.

가난의 문제에 대해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혹시, 그 동안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느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책임을 잊었던 것은 아닙니까? 지긋지긋한 가난을 뿌리치려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까지 외면한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지갑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몫이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가난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므로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며 외면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성령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감사하는가? 그러면서도 머리 둘 곳 없이 사셨던 주님을 섬긴다고 할 수 있는가?"

가을이 되면 우리 교회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선교회가 주관하는 바자가 그것이며, 추수 감사절에 가난한 이들의 식탁을 돕기 위해 그로써리 카드를 모으는 것이 또 하나이고, 성탄절에 나다니엘 센터를 통해서 가난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 엔젤 트리 사역을 합니다. 이번 가을에는 또한 굳네이버스를 통해 아동 결연 켐페인도 할 것입니다. 탄자니아에 혹은 멕시코에 단기 선교팀을 보내기도 합니다. 노숙자를 섬기고 라티노를 돕고 양로원에서 노인들을 섬기는 일은 연중으로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업을 추진하다 보면, 이런 저런 불평을 마주합니다. "우리가 낸 헌금으로 교회에서 알아서 하면 되지 왜 또 손을 벌리느냐?"는 소리도 들리고, 자꾸만 뭘 하라는 통에 귀찮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런 소리를 바람결에 듣다 보면 때로 그만 두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죽은 신앙이 되지 않게 하려면 계속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교회가 교인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어야 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불편하게 흔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과목에서 과락을 하지 않게 하려면 끊임없이 흔들어야 합니다.

이번 10월 6일에 하는 바자는 '비움의 바자'라는 취지로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아주 기뻤습니다. 바자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우리 교회 청소년들의 단기 선교 활동을 돕겠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자신을 비우자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안쓰는 물건'을 기증 받았는데, 이번에는 '쓰는 물건'을 몇 개씩 내놓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필요 없어서 내놓은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하지만 내어 놓자는 것입니다. 내어 놓고 더 좋은 것을 사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내 살림을 줄이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부담이 되시지요? 하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억지로 선행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2장 1절에서 야고보 사도가 한 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을 New Living Bible은 이렇게 번역했다고 앞에서 소개했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어떻게 여러분이 우리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구절을 뒤집어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보았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굳게 믿으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누구를 믿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지갑을 열고 손을 뻗으려면 우리의 주님에게 얼마나 든든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에게 깊이 연결되어 있다 보면, 그분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덮고, 그분의 눈이 우리의 안경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 대하는 것이 달라지고, 돈 쓰는 것이 달라지며, 말 버릇이 달라집니다. 삶의 모든 면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6.

지난 수요일 저녁, 10월에 예정되어 있는 멕시코 선교에 참여하는 분들이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멕시코 단기 선교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참여자들 모두의 이야기가 감동이었지만, 오늘 말씀과 특별히 연결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5년 전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던 교우의 이야기입니다. 겨우, 대학 3학년이었습니다. 그 가정은 그 일로 인해 심한 풍랑을 겪어야 했습니다. 몇 개월 동안의 치료 끝에 다행히 정상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5년 동안 재발을 하지 않아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 지난 8월 중순, 5년을 지내며 마지막 검사를 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병원을 찾은 그 어머니에게 담당 의사는 완치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 교우의 말씀입니다. 아들이 고통스러운 치료를 시작할 때부터 5년 동안 많은 교우들께서 기도해 주셨고, 특별히 중보기도팀에서 때로는 가족보다 더 간절히 기도해 주신 것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데, 멕시코 선교팀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헌데,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딸 아이가 10월 초에 출산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딸 아이의 출산을 돌보아주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마음에 감동이 있을 때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그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딸이 한 마디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엄마, Go!" 자신에게는 남편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 오라는 것입니다. 그 딸도 단기 선교를 가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엄마에게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녀 오라고 등을 떠밀더라는 것입니다.

단기 선교를 다녀 오는 것은 상당한 경제적 부담입니다. 여행 경비를 본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또한 그 교우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 동안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아야 합니다. 사업을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신이 직접 관리하던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합하면 적지 않은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흔쾌히 나선 것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은혜가 아들의 사건으로 회복되고 나니, 그냥 감사하는 것으로는 안 되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 놓고 헌신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시험에서 과락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도록 힘쓰십시다. 특별히, 가난이라는 중요한 과목에서 과락하지 않도록 힘쓰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우리가 믿는 영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십시다. 기도로써 혹은 말씀 묵상으로써 더욱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하나되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하십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과목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겠지만, 인류의 영원한 문제인 가난의 과목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내고 나서 우리가 할 말은 오직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것 뿐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귀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에게서 터져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 주님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신 주님,
저희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구합니다.
저희를 채우시고
저희를 다스리소서.
저희를 통해
주님께서 일하소서.
주님 사랑하는 증거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증거가
말과 행실에서 늘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