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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2)'믿음의 원점'- 김 영봉 목사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2)
"믿음의 원점"(Ground Zero of Faith)
--요한복음 20:24-29

방송듣기: 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2/audio120212kim_c.mp3
1.

예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 첫 오순절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음의 길로 간 가룟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라는 제자를 뽑아 세운 다음, 열 두 사도와 다른 제자들이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의 영감이 사도들에게 강력하게 임합니다. 사도들은 한 동안 성령의 감동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그러자 야고보가 일어나 "나는 그의 유일하신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열 두 사도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차례로 고백하여 '사도신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아십니까? 네 복음서 중 하나입니까? 아니면 사도행전에 있던가요? 꼭 그럴 것 같지만, 실은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 4백년 이상 지난 6세기 경에 만들어진 전설입니다.

'사도신경'은 어느 한 순간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한 문장의 신앙 고백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불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나온 첫 번째 신앙 고백은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가 당신 자신이 예언한 그대로 부활하셨다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사도신경' 안에 포함된 다른 모든 신조들은 그 이후에 따라 붙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부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에 대한 연속 설교를 예수님으로부터 그리고 부활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도마의 이야기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사도신경'의 출발점이 되는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유로이 물질계를 넘나들 수 있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도마가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에 돌아오자,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요 20:25)

여기서 도마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는 믿을 수 없다는 유물론자(materialist)의 입장도 대변하고 있고,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인정할 수 없다는 이성주의자(rationalist)의 입장도 대변하고 있으며, 느끼는대로 산다는 감각주의자(sensualist)의 입장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후,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다가가셔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7절)

그러자 도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28절)

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는 엄청난 비약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말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창조주 하나님에게만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요, 이 세상에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라는 믿음은 유대교 신앙의 핵심과도 같았습니다. 그 칭호를 다른 누구에게 붙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요 우상 숭배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도마는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판단력을 상실한 것일까요? 제가 공부하는 중에 만난 어느 교수님은 이 구절을 감탄사로 해석하셨습니다. "My Lord, My God!"이라는 말은 "Oh, my God!"이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런 감탄사를 터뜨릴만큼 도마의 마음에는 놀라움의 감정이 요동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감탄사로 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실마리를 "여드레 뒤에"(26절)라는 어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도마는 의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문이 많다는 사실은 생각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 도마였으니, 다른 제자들로부터 부활한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여드레 동안 그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고 말은 해 놓았지만, 그 생각을 떨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태도에 뭔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아직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 그것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마는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여드레면 매우 긴 시간입니다. 특별히 심각한 생각거리가 있는 사람에게 여드레는 장구한 세월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 많은 생각 끝에 그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진실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면, 그분은 단순한 예언자도 아니고, 위대한 랍비도 아니다.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활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진실이라면,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나는 그분에게 내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할 나의 주님이시다!

이와 같은 결론을 이미 마음 속에 담고 있던 도마였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았던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들뜬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도마는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했기에 부활 사건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결국, 부활에 대해 가장 늦게 믿은 것은 도마였지만, 그는 가장 먼저 부활 신앙을 통해 믿음의 도약을 이루었습니다.


3.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그 동안 도마의 마음에 엉켜 있던 많은 의문들이 풀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 본 적이 있는지요? 저는 어릴 적에 엉클어진 실타래를 푸는 일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다 보면, 중요한 매듭을 발견합니다. 그 매듭 하나만 풀면 다른 작은 매듭들은 술술 풀립니다. 그처럼, 부활은 예수님에 관한 엉클어진 비밀을 푸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매듭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면 그분은 분명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의 매듭이 풀리자, 도마의 생각 속에서 다른 작은 매듭들이 술술 풀려 나간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당도한 이후 그분은 갈릴리에서 드러냈던 그 엄청난 이적의 능력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능력이라면 단숨에 로마 군인들을 몰아내고 유대인 자치 정부를 세울 수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마자 마치 방전된 배터리처럼 무력하게 모든 모욕과 고난을 받아 안으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래야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의문이 풀립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신 사건임을 알겠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돌발적인 비극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던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당하신 죽음은 아주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것 같았습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살아 생전에 그분이 하셨던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이해가 되었고, 납득이 되지 않던 그분의 행동과 생활 방식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자주 강조하던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중에 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분이 그렇게도 자주 왜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보라"고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사실, 탄생부터 십자가에서의 죽음까지만 두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살펴 본다면,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심각한 지적 딜렘마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정상적인 인간으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말을 많이 했고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문학자이자 기독교 변증가였던 C. S. 루이스(Lewis)가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라는 책에서 지적한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도덕 교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복음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이 딜렘마를 해결해 줍니다. 만일 그분이 십자가에서의 비극적인 삶으로 인생을 마쳤다면, 그분은 과대망상증 환자였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예수에게 홀딱 속아 넘어간 자신도 불쌍하고, 자신과 많은 이들을 속여먹은 예수가 밉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실패와 실수를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만일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맞습니다.


4.

'사도신경'의 두 번째 신조, 즉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이와 같은 경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위에서 저는 도마의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만을 추적했습니다만, 이 같은 변화가 처음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불길이 번지듯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과 놀라운 행동을 보고 그분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으나,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자 그 모든 궁금증을 내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갔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부활 사건으로 인해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은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신앙 고백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용어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용어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도신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 혹은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향해 자주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기도할 때는 당시에 어린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아바')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말과 행동에서 성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은유로서 '독생자' 혹은 '유일하신 아들'이 선택된 것입니다.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이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에 봉착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기 이전에 성자 예수께서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그 신비의 일부를 벗겨 보여 주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요 1:1-3)

이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알듯말듯한 말씀입니다. '알듯말듯함'이 이 말씀의 본질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다 알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영적 사기꾼으로 여기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비밀과 신비를 느끼게 해 주려고 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그 신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도신경'은 예수님을 향해 '주'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성부 하나님에 대해 사용하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정부는 로마 황제를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이 세상을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 사람에게 충성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통치권은 부활하신 주님에게 있으며, 따라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생을 바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도신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하도 익숙하게 사용되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가 성인 것처럼 오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김영봉 목사'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가 무엇하는 사람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말 '메시야'에 해당하는 헬라어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기름부어 세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5.

그러므로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나는 나사렛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 나는 나사렛 예수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음을 믿습니다.
• 나는 성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성자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믿습니다.
• 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주권자임을 믿습니다.
• 그래서 나는 그분을 나의 구원자요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입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 자주 사용되는 로고가 있습니다. 물고기 모양의 로고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을 당시에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서로 은밀하게 주고 받던 암호였습니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 요즈음에는 차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물고기 모양이 기독교인의 암호로 사용되었는지 아시는지요? '물고기'를 의미하는 헬라어 '익스투스'(ἰχθύς)의 알파벳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핵심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례로 읽으면,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에서 '주님'이라는 말만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라는 고백은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이 땅에서 활동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된 한 유대 청년 예수가 단순한 인간도 아니고, 위대한 스승도 아니며, 인류의 위인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보냄 받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믿음의 원점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지금도 우리 중에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앞에 고개를 숙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설교한다고 말해 놓고서 성부 하나님에 관한 첫 번째 신앙 고백을 뛰어 넘어 두 번째의 신앙 고백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도신경'의 내용 중 절반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 고백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나서야 성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고, 성령에 대해서도 눈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으로 보자면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맨 처음이지만, 내용적으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맨 처음입니다.


6.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 각자의 믿음의 원점으로 돌아가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원점에서 예수를 다시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원점에 서서 예수라는 분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분이 그저 존경받을만한 위인 정도에 그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스크라테스를 존경하든 무시하든, 그것은 우리 인생에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라면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라면,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결정이 아닙니다. 하면 좋고 안 하면 손해 볼 것 없는 그런 결정이 아닙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정이며, 그 결정에 인생의 성패가 걸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어찌하렵니까? 도마처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임을 믿으며, 그래서 나의 주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십니까?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나에게 그 무엇도 주인이 될 수 없다고 고백하십니까? 내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잃고 내 목숨을 잃어도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수 없다는 고백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이 더욱 깊어지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한 순간에 잡으면 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방치해 두면 약해집니다. 매일같이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그 온기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뿌리가 아직도 든든히 자리잡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 믿음이 늘 살아있도록 보살피고 가꾸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결정을 못하고 지금까지 미뤄왔습니까?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마음에 가지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까?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라는 사람이 설사 2천년 전에 살아 있었다 해도, 어찌 그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사람이 여전히 살아서 활동한다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알지도 못하는 예수라는 사람을 나의 주님으로 모셔 들인다는 것이 어찌 가능한 일인가?"라고 질문하고 계십니까?

그 의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하게 여길 것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라에 눈 뜨기 전까지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도약을 꿈꾸고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까지고 미결 상태에서 저울질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늦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예배 드리고 따뜻한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었던 이수경 권사님께서 그렇게 홀연히 떠나실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아직 기회 있을 때, 예수께 대한 입장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 입장 정리는 나의 영원한 운명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강절(the Advent)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기억하고 축하하며, 미래에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지금 성령을 통해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맞아들이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주님께서는 더 가까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오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초청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주님이 되어 주십니다. 이 만남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무의미합니다. 이 고백이 든든히 서지 않으면, '사도신경'의 다른 모든 고백도 의미가 없습니다.

부디, 이 귀한 계절에 믿음의 원점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분명한 입장 정리를 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고 함께 동거함으로 인해 그분께서 열어주시는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묵상: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미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도 아직 열어놓지 않은 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문까지 열어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아직 열지 못한 문을 열고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저에게 더 깊이 오시어 저를 다스리시옵소서."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이 계십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결단을 막고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판단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죄에 대한 가책 때문일 수도 있고, 삶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더 이상 미루지 말기를 바랍니다. 더 미룰 시간이 없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분 앞에 무장해제하시고 그 앞에 항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느끼신다면, 마음의 문을 열고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제 마음을 엽니다. 저의 인생에 들어오셔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저의 주인이 되어 주옵소서."

(묵상)

묵상 후: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든, 진실하게 기도하셨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들어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은 느껴서 믿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영이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약을 먹고 그 약이 내 속에서 약효를 내고 있음을 믿듯,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으니, 그분이 내 안에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을 믿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인이 바뀌었으니, 여러분의 삶도 바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