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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우리가 속한 나라 - 와싱톤 한인교회 김 영봉 목사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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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3/audio010613kim_c.mp3

 


"우리가 속한 나라"
(The Kingdom We Belong)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요한복음 18:33-40

 

1.

Happy New Year! 이 인사말 그대로, 2013년도에는 교우 여러분의 삶에 새로움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새로움을 통해 신선한 행복감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일신 우일신'(日新 又日新, Being renewed again and again)의 은총이 성령의 능력으로 일년 내내 지속되기를 기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죄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특히 유명한데, 가룟 유다와 본디오 빌라도가 그렇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 지방을 통치한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황제가 총독을 보내어 우리 나라를 다스렸듯, 로마 황제는 점령한 나라마다에 총독을 보내어 통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황실에게는 아주 골치 아픈 민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람들은 그 유별난 민족을 잘 길들여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유대 총독의 자리는 승진을 위한 좋은 발판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복음서 외에도 몇 가지 역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유세푸스(Josephus)는 빌라도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을 남겨 두었고, 필로(Philo)라는 유대 작가 역시 간단하지만 빌라도에 대한 기록을 남겨 두었습니다. 1961년에는 소위 '빌라도의 돌'(Pilate Stone)이라는 것이 이탈리아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로 인해 빌라도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는 고백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활동하고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셨으므로, 그분은 아무리 일러도 26년 이후에 활동하셨고 아무리 늦어도 36년 이전의 어느 때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는 초대 교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인물이며 따라서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모두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음모설'(conspiracy theory)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마음은 음모설에 쉽게 기웁니다. 어떤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고, 뭔가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음모설에 솔깃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이 원죄에 깊이 물들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종대왕이 꾸며낸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얼토당토 않은 말입니다.


2.

본디오 빌라도가 많은 문학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그가 맡은 역할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황실은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허락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자치 정부가 '공회' 혹은 원어로 '산헤드린'(Sanhedrin)입니다. 유대인들과 관련된 대부분의 일들은 이곳에서 처리하고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산헤드린이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형(capital punishment)을 집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사형 판결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사형을 집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로마 총독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죽게 한 궁극적인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빌라도에게 그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이 부당해 보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로마의 통치에 전혀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관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핑게로든 그를 풀어주려 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끔 뉴스에 보면, 경찰들이 '관할 싸움'이라는 것을 했다는 보도를 접합니다. 영등포에 사는 사람이 강남에서 골치아픈 사건을 저지르면, 강남 경찰서에서 그 범인을 영등포 경찰서에 떠넘기려 합니다. 그러면 영등포 경찰서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강남이니 강남 경찰서에서 담당해야 한다고 다시 돌려 보냅니다. 그와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누가의 기록입니다.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서 빌라도는 그 골치아픈 사건을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낸 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 황제로부터 갈릴리를 분할받아 통치하고 있던 왕입니다. 하지만 헤롯은 유대 땅에서 일어난 문제이니 자기 소관이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그 즈음에 빌라도는 아내에게서, 지난 밤 꿈에서 예수로 인해 몹시 괴로움을 당했으니 관여하지 말라는 전갈을 받습니다(마 27:19).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계속하여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것입니다"(요 19:12)라고 협박합니다. 예수를 놓아주면 황제에게 고발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총독으로서는 가장 공포스러운 협박입니다. 빌라도는 결국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마 27:24)

이렇게 보면, 빌라도는 할 만큼 한 것 같습니다. 예수를 죽게 한 책임은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교 권력자들에게 있지, 빌라도에게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빌라도는 피해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그의 이름을 '사도신경'에 올려, 세상 끝날까지 주일마다 세계 모든 교회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 정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동정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도 한 동안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동정론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요세푸스나 필로같은 사람들이 남겨놓은 글을 통해 빌라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더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로마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총독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관심은 출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폭도들을 잔인무도하게 진압했습니다. 황제에게 과잉 충성을 한 것입니다. 주후 36년에 폐위된 것도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너무 잔혹하게 다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고뇌하는 양심'이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그는 교활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둘째는 빌라도를 동정하는 제 마음의 내면을 보고 나서 그에 대한 동정론을 내려 놓았습니다. 빌라도의 선택을 두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두둔해 주려는 제 마음 안에는 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같은 핑게를 대고 싶은 흉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저지르는 죄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어. 이럴 수밖에 없어. 누구라도 이렇게 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행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그렇게 선택한 것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실와 정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달리 선택했을 것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진리를 따를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짓는 죄들도 모두 저의 욕심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때로 이런 저런 핑게를 대지만, 잘라 말하자면, 저는 손해 보기 싫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빌라도의 행동처럼 저의 행동에 대해서도 동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빌라도를 옹호하지 않고 있습니다.


3.

이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빌라도를 '사도신경'에 올려 정죄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을 죽게 한 장본인으로 정죄하기 위해 빌라도의 이름을 올렸다면,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오른 이유는 그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모양의 권력자를 상징합니다. 그 자리에 헤롯이라는 이름을 넣어도 좋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이름을 넣어도 좋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넣어도 좋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고백은 ”예수께서 세상 권력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고백하면서 "왜 빌라도지?"라고 질문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어, 왜 예수님이 세상 권력자들에게 고난을 받으셔야 했지?"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 물음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 아주 중요한 진실을 말해 줍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님을 정치 혁명가(revolutionary)로 그리려는 학자들이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가장 먼저 제자들이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분은 정치 권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갈릴리의 군중들이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도 그분은 미련없이 몸을 감추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분은 왕좌에 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올라 정치범으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적인 구원자'로만 그립니다. 그분은 오직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도 그렇게 믿어왔고 또한 생각해 온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 나라 그리고 개인의 영혼에만 관심을 두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교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치 권력을 탐하여 정치 혁명을 도모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오해이지만, 그분이 오직 인간의 영혼에만 관심을 두셨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오해입니다. 그분은 개인 개인의 영혼을 주목하셨지만 또한 하나님 나라를 보고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만나 그의 영혼을 들여다 보실 때 그분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계셨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는 '작은 사건'들이 모여 온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변화하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권력을 원하지 않으셨지만,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시기 원하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살아 이 세상에 온전한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 하셨습니다. 과거에 총과 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 나라'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꾸미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오직 섬김으로만, 오직 희생으로만 그 나라는 이루어집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나라가 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왕이나 대통령같은 큰 권력을 가진 사람도 그렇고, 작은 권력을 가진 사람도 그렇습니다. 원죄의 굴레 속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대로 살기를 원하고, 그 수단으로서 권력을 얻으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 권력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만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권력자들은 예수를 불편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거하는 데 대제사장들과 헤롯과 빌라도가 손을 맞잡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개인에게서 시작하지만 결코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이지만 영적인 것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을 참되게 만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변화를 받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달라지고, 자녀들 혹은 부모와의 관계가 달라지며, 친구들과의 관계가 달라지며, 원수와의 관계까지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사는 사회가 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에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려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은 아주 불편하고 거북스러운 것이 됩니다.


4.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신문 받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유대인 지도자들이 고발하는 것이 맞느냐고, 스스로 왕이라고 주장했느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36절)

이 구절의 첫 번째 문장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는 말은 "내 나라는 이 세상과 관계 없소. 내 나라는 다른 세상에 속한 것이오"라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 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하지만 또한 이 세상을 포함합니다. 이 세상 안에 이루어져야 하는 나라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아는 그런 나라와 종류와 성격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지도에 그려 넣을 수 있는 혹은 총과 칼로 지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빼앗고 지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힘을 빼고 자신을 열 때 임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지금 이곳에 임하지만 또한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나라에는 정의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나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던 빌라도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37절)

긴 말 하지 말고 딱 부러지게 대답해 달라는 뜻입니다. 나라는 하나의 종류 밖에 없고 왕은 모두 같은 왕이라고 생각했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그쳐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당신이 말한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37절)

뜻을 담아 이 말씀을 풀어 쓰자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왕이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니오. 내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요. 내 왕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오. 내가 왕인 것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참된 진리를 알기 때문이고 진리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오. 당신이 나를 몰라보는 이유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오.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내 말을 알아듣고, 내 나라의 시민이 된다오. 당신도 진리에 눈 뜨면 내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소. 그래 보지 않겠소?

그러자 빌라도가 다시 반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38절)

"이 대목에서 왜 갑자기 진리에 대해 말하시오? 나는 그런 것에 관심 없소"라는 뜻입니다. 실로, 요세푸스와 필로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의 유일한 관심사는 권력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로마 황제의 마음에 들어 로마 황실의 귀족으로 올라서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나라가 충돌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빌라도의 나라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왕이 마주 선 것을 봅니다. 진리의 왕과 빌라도라는, 로마 황제를 대신해 왕 노릇하고 있는 사람이 마주 서 있습니다.

두 나라의 대결에서 인간의 나라가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총독 빌라도에게 진리의 왕 예수는 무력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 나라는 허튼 소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죽임 당하신 예수께서는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그의 나라는 국경을 넘어 누룩처럼 번져갔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예수를 왕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칼을 휘둘렀지만, 그럴수록 그 나라는 더 널리, 더 깊이 퍼져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신이라 불리기 원했던 황제 콘스탄틴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누가 진짜 왕인지, 어떤 나라가 참된 나라인지, 환히 드러난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왕으로 섬기는 분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가 속한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참 신이요 참 인간으로 오신 그분을 주님으로 믿을 때, 그분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고 그분의 성령은 우리를 새로 지어 주십니다. 새로 지음받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죽어서 그 나라에 임할 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며, 그렇게 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 생각합니다. (빌 3:18-19)

이것이 2천 년 전에 쓰인 글이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는다"는 말은 육체적인 만족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산다는 뜻입니다.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다"는 말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죄를 자랑하고 선전한다는 뜻입니다. "땅의 것만 생각한다"는 말은 물질적인 것을 전부로 여기고 산다는 뜻입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 불리는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에 딱 맞는 말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이 세상 나라의 삶의 방법입니다. 빌라도의 삶의 방법이고, 가야바의 삶의 방법이며, 티베리우스 황제의 삶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참 신이시고 참 인간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영원한 나라, 참된 나라, 하나님 나라에 눈을 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나라의 기준을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잇는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3:20-4: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빌라도의 나라와는 다른 사상으로 살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수치를 수치로 알고 죄를 죄로 알며,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오직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사랑 때문에 겪어야 하는 수고와 고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나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죽어서 천당 가기 이전에 이미 이 땅에서 천국 시민이 되어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나라가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로, 자신의 권력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처럼 만들기 위해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더 이상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권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통해 누리던 것들을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권력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진실하게 믿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사는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참된 믿음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예수님처럼 본디오 빌라도에게, 즉 세상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그분의 능력으로 축복받아 살다가 죽고 나서 천당 가는 것이 전부라고 아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아무런 위험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 관심 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골치거리가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혼자 축복받고 자기 혼자 천국 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믿음은 나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우리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까? 우리가 이미 그 나라의 시민임을 믿고 있습니까? 그 나라의 시민다운 삶의 변화가 내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기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는 열정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수치를 영광으로 자랑하며, 오직 땅의 것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 땅의 빌라도, 이 땅의 헤롯, 이 땅의 가야바들이 과연 우리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저런 신자들이라면 그들로 인해 이 땅이 가득 채워진다 한들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주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땅의 권력자들이 우리로 인해 불편해 하고, 그래서 때로 박해를 당하는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으면 빌라도에게 무시당할 뿐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빌라도의 자리에 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대제사장 가야바가 믿음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를 통해 확산되어 가고 있던 하나님 나라를 없애 버리려 했습니다. 까딱하면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할 때, 우리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말했듯이, 그것은 마치 가시 돋힌 채찍을 발길로 차는 것(행 26:14)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받은 부름을 잊지 마십시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는 삶에 결단하십시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을 거부하고 외면하고 박해하려는 빌라도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나의 이익과 욕망을 생각한다면 나도 빌라도의 친구가 되어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수치를 자랑하며 땅의 것만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가장 잘 사는 길처럼 보이지만 가장 희망 없는 삶입니다. 때로 손해를 당하고 때로 무시를 당하고 때로 박해를 당해도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공하는 길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 해를 시작하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적인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이신 주님,
저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주님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 마음에 주님 나라를 품고
이 땅을 살게 하소서.
빌라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주님처럼 살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 나라에 기억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