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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샘과 저수지"-와싱톤 한인교회 김 영봉 목사

2013년 9월 1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샘과 저수지"
(Wellspring and Reservoir)
--예레미야 (Jeremiah) 2:4-13

1.

지난 화요일, 밴쿠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밤 늦게 와싱톤-덜레스 공항에 도착하여 꺼 놓았던 휴대 전화를 켰습니다. 켜자 마자 음성 메시지가 떴는데, 그동안 위암으로 투병하시던 교우께서 오후 5시에 소천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임종 전에 뵙고 싶었는데, 하루를 안 기다려 주시고 가셨습니다. 한 편으로 아차 싶으면서, 누군가가 저 위에서 "Welcome to Reality!"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또 다른 부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52세의 열정적인 감리교 목사입니다. 저에게도 3년 후배가 되기 때문에 신학교 시절에 보았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수염이 많아서 항상 아래턱이 검어 보였고, 늘 웃으며, 무엇이든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목회도 잘 했지만, 주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지역으로 청년들을 이끌고 다니며 선교 활동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 전에 중국 심양에서 뺑소니 차에 치어 중상을 입었고, 국내로 호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지난 화요일 끝내 하나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제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감리교 목회자들이 충격 속에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배들에게 사랑받고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목회자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아직도 손길이 필요한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교인들을 남겨 두고 너무도 갑작스럽게 떠났습니다.

홀로 남겨진 친구에게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아내에게 위로가 될까 싶어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워낙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남들의 두 배는 살았다고 볼 수 있어!" 그 말에 아내는 수긍합니다. 물론, 그 말로 그의 이른 죽음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됩니다.

그를 생각하면, 다른 것에 한 눈 팔지 않고 한 가지 목적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한 가지 방향으로 줄기차게 달려온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거룩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그 죽음의 충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느낌입니다. 확실히, 그 사람이 헌신했던 목적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 짓고, 그 사람이 섬겼던 신이 그 사람의 삶의 궤도를 결정 짓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목적 없는 인생은 그럭 저럭하다가 아무렇게나 됩니다. 그렇게 살다 가면,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그 인생의 자취에서 거룩성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허무함만 진하게 느낍니다.


2.

오늘은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Lectionary)에 맞추어 예레미야 2장을 읽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패망한 지 한 참 후에 그리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패망하기 약 50년 전에 예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남왕국 유다가 북왕국 이스라엘과 같은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유다 백성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을 가나안에 인도하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온갖 잡신을 섬기며 혼잡스러워진 가나안 주민들과 달라야 했습니다. 그들은 사랑과 진리와 정의와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루어야 할 '가나안 드림'(Canaan Dream)은 그 땅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자주 그들의 뜻과 어긋났습니다. 가나안 토착민들은 모두들 자기 좋을 대로 사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있을 때에는 기쁘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지만, 그 사랑이 식어가면서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돌리고 등을 돌렸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눈치를 보면서 야금야금 죄를 탐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보란듯이 죄를 즐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백성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이 뭍어납니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의 조상이 나에게서 무슨 허물을 발견하였기에,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서
헛된 우상을 좇아다니며 자신들도 허무하게 되었느냐? (5절)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으로 인도해서,
그 땅의 열매를 먹게 하였고,
가장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들어오자마자 내 땅을 더럽혔고,
내 재산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7절)

너희는 한 번 키프로스 섬들로 건너가서 보고,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서,
일찍이 그런 일이 일어났던가를 잘 살피고 알아 보아라.
비록 신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신을 섬겨도,
한 번 섬긴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꾸는 민족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데도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전혀 쓸 데 없는 것들과 바꾸어 버렸다. (10-11절)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것이 '쓸 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그리고 그들 아래에 있는 신들은 물질적인 번영과 다산의 복을 약속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 신들에게 풍성한 제물을 바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악하게 살아도, 아무리 부도덕하게 살아도, 그리고 아무리 제 멋대로 행동해도 그 신들은 눈 질끈 감고 복을 내려 준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에게는 풍요의 신, 번영의 신, 쾌락의 신을 섬기는 것이 더 '쓸 모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11절에서 달리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전혀 쓸 데 없는 것들과 바꾸어 버렸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바알을 섬기는 것이 '쓸 모 없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유다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쓸 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힘쓰는 것이 '쓸 모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쓸 모 없는 일'을 위해 살다 보니, 그들의 인생까지도 쓸 모 없게 되어 버렸다고 하십니다. 5절 마지막에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헛된 우상을 좇아다니며 자신들도 허무하게 되었느냐?


우리의 삶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신을 섬기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유다 백성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백성'이 되기 원했고, 그래서 바알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한 동안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육체적인 쾌락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그들은 '쓸 모 없고' '허무하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3.

자, 여기, 두 가지의 상반된 견해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쓸 데 없는 일이요 허무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때론 손해를 보고 때론 박해를 받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 쓸 데 없는 일이요 허무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아마도 유다 백성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제 후배 목사님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하나님 믿어야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데,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데,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막대기와 지팡이'(시 23:4)로 지켜 주신다는데, 안 그러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 중 하나인 아삽은 다음과 같이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시 73:13)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질문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와 같은 흔들림의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가 신앙적인 면에서 '위기'이면서 또한 '기회'입니다. 한자의 '위기(危機)'는 '위험'(危險)의 '위'와 '기회'(機會)의 '기'가 합쳐진 말입니다. 위기를 잘 활용하면 기회가 됩니다. 하지만 잘 못 다루면 위험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허사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드는 순간을 잘 못 다루면 불신앙으로 빠지고 유다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등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위기를 잘 다루면 더 깊은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형식적이고 교리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던 믿음이 진실한 믿음으로 깊어집니다. 인과응보적인 단순한 사고에 머물던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믿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유다 백성이 헛된 것을 추구하여 허무하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왜 허무한 것입니까?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되었든, 아니면 바알의 축복이 되었든, 많은 재산을 모으고 자녀들이 잘 되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즐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왜 쓸 모 없는 것이고, 그것이 왜 허무한 것입니까? 그것이 진짜가 아닙니까? 그것이 실속 있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내 손에 쥔 것이 제일 믿을만한 것 아닙니까?

정말 그렇게 믿습니까? 그렇다면, 시간을 내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River Road를 타고 포토맥 지방을 지나다 보면, 거대한 대지에 성채와 같은 집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주인은 그 성채 안에 살면서 자신의 거대한 자아를 자랑하고 싶은지 모릅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볼 때, 여러분에게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 나도 저렇게 되어 보고 싶다!"는 부러움이 들던가요? 혹은 "저게 뭘까?" 싶은 마음이 들던가요? 그 모습이 허무해 보이지 않던가요? 그 감정은 가지지 못한 자의 비틀린 심정일까요?

혹시 자신이 '가진' 권력 혹은 '가졌던'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을 만나 보셨습니까? 혹은 돈 자랑에 침이 마르지 않는 사람을 대해 보셨습니까? 입만 열면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과 한 자리에 앉아 보셨습니까? 어떻던가요? 그 앞에서 주눅이 들던가요? "나도 그런 권력을 가져 보았으면..." 싶던가요? "왜 나는 이렇게 돈이 없나?" 싶던가요? "내 자식들은 왜 저렇지 못한가?" 싶어서 한탄스럽던가요? 혹은 그 자랑이 헛되게 들리지 않던가요? 덧 없어 보이지 않던가요? 그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열등감의 표현일까요?

육체적인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켜 본 적이 있습니까? 최고의 음식을 차려 놓고 마음 껏 먹어 본 일이 있습니까? 천국에 닿은 것처럼 느낄만큼 쾌락을 누려 보았습니까? 절경을 찾아 값비싼 호텔에서 여행을 즐겨 보았습니까? 그랬더니 어떻던가요? 늘 그렇게 살면 좋겠다 싶던가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권태감과 허무감이 밀려 오지 않던가요? 육체적인 만족과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느끼지 못하겠던가요? 제가 그런 기가막힌 즐거움을 못 누려 보았기 때문에 하는 말일까요? 정말 그럴까요?


4.

오늘 읽은 말씀의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의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13절)

하나님은 여기서 샘물과 물 웅덩이를 비유로 삼으십니다. 물 웅덩이를 저수지로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을 믿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힘쓰는 것은 마르지 않는 샘물을 얻는 것과 같고, 육체적인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사는 것은 마치 저수지를 가지고 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샘물'은 지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물을 말합니다. 샘물은 맑고 깨끗합니다. 또한 샘물은 가물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지하 깊은 곳에 저장된 거대한 호수로부터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시원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며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힘쓰는 것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언제든지 샘에서 물을 길어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해 초막절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요 7:37-38)

반면, 저수지는 빗물을 저장해 두는 곳입니다. 저장된 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굳이 마시려면 정수해야 합니다. 또한 가뭄이 들면 금새 마릅니다. 물이 마른 저수지 바닦은 보기에 흉합니다. 만일 저수지가 유일한 식수의 원천이라면, 그 사람은 늘 기갈에 허덕일 수밖에 없고 또한 가뭄이 들면 심한 위기를 만납니다.

이런 빛에서 보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만족과 쾌락을 저수지 물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일입니다. 물질적으로 번영하는 것, 많은 돈을 버는 것, 세상적으로 유명해지는 것, 자식이 잘 되는 것, 권력을 가지는 것, 건강해지는 것, 예뻐지는 것, 공부 잘 하는 것, 잘 먹고 잘 사는 것, 값비싼 여행을 즐기는 것, 육체적 쾌락을 누리는 것--이 모든 것은 저수지의 물과 같습니다. 그것은 잠시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지만, 쉽게 권태롭게 만들고 지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마치 저수지의 물처럼 환경에 따라 흘러 넘치기도 하고 바닦까지 말라 버리기도 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저수지 물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물질적인 번영으로, 육체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샘물을 버렸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고 그분에게 힘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영적 기갈에 지치게 되었고, 그들의 희망이던 저수지 물은 고갈되어 버렸습니다.

저수지 물도 필요하지만, 샘물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제가 시골에 살아 보아 아는데, 좋은 샘물을 가진 사람에게도 저수지 물은 필요합니다. 저수지 물은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습니다. 농작물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되고, 가축을 기르는 데도 저수지 물이 좋습니다. 샘물은 없고 저수지 물만 있다면 그 사람은 늘 갈증에 시달릴 것이고, 머지 않아 병에 걸려 큰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반면, 샘물은 있는데 저수지 물이 없다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생활에는 불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저수지 물을 다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만, 동시에 육적인 존재요 땅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살고 있으며 하루 세 끼 밥을 먹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물질이 있어야 하고, 우리 육신의 욕구는 적당한 정도로 충족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은 잘 활용하면 좋은 도구가 되고, 유명해지는 것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건강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이며, 결혼의 제도 안에서 육체적인 사랑을 주고 받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도 축하하고 축하받을 일이며, 때로 좋은 곳을 여행하는 것도 바랄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수지 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만족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수지의 물은 흘러 넘치기도 하지만 자주 마릅니다. 우리 영혼의 진정한 만족은 오직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는 것이 곧 생수를 마시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고 또한 그렇게 살도록 힘쓸 때, 우리에게는 마르지 않는 생수가 터져 납니다.

생수를 통해 진정한 만족을 얻으면, 저수지 물에 목 매지 않고 살게 됩니다. 저수지 물이 넘친다고 하여 교만해지거나 자랑삼아 떠들지 않습니다. 저수지 물이 고갈되었다 하여 절망하거나 한탄하지 않습니다. 저수지 물에 대해서는 자족하면서 샘물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물질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물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5.

두 주일 전, '신학생/목회자 멘토링 컨퍼런스'를 섬기느라고 사흘 동안 침묵과 묵상과 기도에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의 영혼이 점점 목말라가고 있었던가 봅니다. 목요일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저의 기도의 자리에 앉아 기도를 시작했는데, 아, 샘물에 목을 추긴다는 말이 그런 뜻임을 새삼 경험했습니다. 충분한 시간 동안 기도하고 난 다음, 저의 영혼에 기쁨이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저의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우주의 중심

며칠 만에
강단 뒤
내 기도의 자리에 앉다

아,
여기가 내 자리다
나는 여기에 있어야 나다
이 자리에 앉을 때
내가 바로 보인다

여기가
내 우주의 중심이다
여기 앉으니
세상이 바로 보인다
나를 위협하던 거대한 근심들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여기가
어머니의 품이다
이곳에 앉으니
따뜻한 품이 나를 감싸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 품을 파고 든다

아,
여기서 죽어도 좋겠다

이 기도문에서 저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수를 마시는 만족감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며 이 기도문을 다시 읽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내가 다른 무슨 경험을 했다 하여 이토록 깊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사드립니다. 제게 영혼의 생수를 주신 주님께,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도 이 생수의 맛을 보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수를 마시고 영혼의 해갈을 얻고 나면, 내가 가진 다른 모든 것은 저수지의 물과 같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압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 빚어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것임을 압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한 번 주어진 인생을 가장 알차게 사는 길임을 압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52세의 이른 죽음에도 불구하고 꽉 채워진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은 100세를 살아도 허탕 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수를 마시고 영혼의 만족을 얻은 사람은 저수지 물에 대해 자족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성공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사막으로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해서 오만해지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부족하다 하여 주눅이 들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넉넉하다 하여 한 없이 사치를 즐기지 않고, 물질이 부족하다 하여 한 없이 쪼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에게서 감사와 기쁨의 원인을 찾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물질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기원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마르지 않는 생수의 샘이 터지기를! 생수의 샘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고 하나님께서 주신 저수지 물을 잘 활용하여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꽉 찬 인생이 되기를! 그럴 때,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며,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진실로 행복할 것입니다. 또한 그 행복이 우리 안에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번져 나갈 것입니다. 이 은혜와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
저희 안에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도록
저희를 주님 안에 붙들어 매어 주소서.
헛된 것을 좇아 살다가 허망해지지 않도록
저희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주소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고
주님 안에서 삶의 방향을 찾으며
주님 안에서 삶의 이유를 찾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