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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남북한의 성씨와 족보편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탈북자 중에서는 자기 본관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기야 부모로부터 듣지 못하고 성장한데다가 먼 윗대조상을 챙길 사회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니까요

북한에서도 성씨와 본을 밝히는 스마트폰 프로그램이 나왔다지요? 그럼 앞으로 북한에서도 각 문중의 족보를 편찬할 일도 있고 아주 높은 윗대 조상제사도 지낼 수 있는 날이 오겠네요. 그래서 통일문화산책 오늘은 남북한의 성씨와 족보에 관해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이야기 나눕니다.

임채욱 선생: 네, 그렇군요. 북한에서도 성씨와 본을 밝혔다 하니 반가운 일이군요. 아주 윗대 조상제사야 문중의 공유재산이 없으니 제사비용 마련이 어렵지요. 하지만 족보편찬 같은 것은 당장은 못해도 필요에 따라 나라에서 할 수도 있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 방대한 족보편찬을 어떻게 하지요?

북한에서 밝힌 성씨 숫자는 얼마나 됩니까?

임채욱 선생: 이제 말한 그 프로그램은 ‘조선의 성과 본’이란 것인데, 성씨 221개, 본관 550개를 내놓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성씨 숫치는 1981년 말 현재 북한 17세 이상 성씨가 212개(문화어학습 1991년 제3호)였다는 숫자보다는 좀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숫치는 우리나라 성씨 전부를 밝히지 못했고 본관도 한국에서 알려진 것에 아주 미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씨에 따른 본관을 나름대로 해설을 하고 있어서 자기 본관을 알 경우 조상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상식을 주겠지요.

한국에서 파악하는 성씨와 본관 숫자는 얼마입니까?

임채욱 선생: 한 자료에 따르면 728개 성씨가 나타납니다. 이 728개 성씨에 따른 본관은 4200여개가 넘습니다. 본관은 관향이라고도 하는데 관향은 성씨의 시조가 태어난 곳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이 같더라도 본관이 다르면 같은 문중이 될 수 없지요. 이 숫치는 북한이 파악한 숫치보다 훨씬 높지요.

그런데 북한 주민들 중에는 자기본관을 모르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임채욱 선생: 그럴 가능성은 있을 것 같습니다. 탈북자 중에서는 자기 본관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기야 부모로부터 듣지 못하고 성장한데다가 먼 윗대조상을 챙길 사회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니까요. “... 우리의 아버지 김일성 원수님, 우리의 집은 당의 품, 우리는 모두 다 친형제, 세상에 부럼 없어라”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회에서 자기 조상을 찾는 것이 허용될 리 없지요. 모두가 장군의 식솔인데 뭣을 찾을까요? 더욱이 ‘사회주의적 대가정’이란 명분으로 수령과 당과 대중이 통일체를 이루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더 중시하는 사회에서 자기 문중이나 본관을 찾을 수는 없었지요.

실제로도 북한주민은 본관이나 족보에 대한 관념이 약하겠군요.

임채욱 선생: 북한사람들 대부분은 자기들 본관을 잘 모릅니다. 설혹 조상에 대한 관념이 있어도 그걸 찾기 힘들고 해서 그냥 잊은 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한사람들과 다른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통치자 김씨 일가는 본관을 제대로 챙기고 있지요?

임채욱 선생: 선대통치자 김정일이 남쪽 언론사 사장들 앞에서 자기 본관이 전주라고 밝히면서 시조이름까지 댔습니다. 이로 보면 자기 조상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되지요. 그러면서도 일반 북한주민들은 그런 관념조차 가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알아보니 그 조상은 태서공이라는데 그 묘는 전주 모악산에 실제 있다고 합니다. 그 때 김정일은 남쪽에 가면 모악산에 가서 참배도 하겠다고 말했다는군요. 실제로 북한에서 나온 자료에는 김일성 몇 대 조상 김계상이란 사람이 전주에서 북쪽으로 왔다고 돼 있습니다.

성씨나 본관에 대한 문헌도 드물겠네요?

임채욱 선생: 학술잡지나 대중잡지에서 성씨나 본관에 대한 기사가 나온 것도 1990년대 후반입니다. ‘천리마’ 같은 대중잡지에서 노인들이 고향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들딸들을 시집장가 보낼 때 상대방 성이나 본관에 대해 묻기도 한다면서 성과 본관에 대해 관심 갖는다고 말하는 기사가 나온 것도 1997년 7월입니다. 마치 북한 늙은이들이 늘상 해 온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래도 그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성씨와 본을 자세히 알려면 결국 족보가 있어야 하는데 북한에서 족보 발간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임채욱 선생: 북한에서는 족보를 착취사회의 소산물로 봅니다. 봉건지배계급들이 자기들의 계급적 특권을 합법화하고 유지공고화하려는 착취수단의 하나로 이용했다고 말합니다. 특히 조선조 시기에는 왕으로부터 권력을 보장받기 위해 집안내력도 신비화시키면서 조작하는 관청까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족보가 과거 봉건사회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내력을 밝히는데 참고로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족보가 가까운 시일 안에 발간 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족보에 대한 관념은 거의 없거나 파기해야 할 것으로 보는군요.

임채욱 선생: 족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보겠습니다. 1992년 5월 개성에서 ‘성원록’이란 책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책은 고려왕조에 관한 역사책인데 고려 때 편찬되었다고 하나 실제 책은 전해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개성을 방문했을 때 한 노인이 자기 집 가보로 내려온 족보를 바치겠다면서 내놓았어요. 그런데 이 책 군데군데 불에 탄 흔적이 있어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노인 말이 자기 아들이 불태워 없애려는 것을 겨우 막아서 일부가 훼손 된 것이라고 했지요. 노인의 아들은 봉건시대 유물이라고 없애려 했고 노인은 왕씨 가문에서 전해 내려 온 책이라 지키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런 내력을 가진 이 책은 나중에 북한학자들이 검토해보니 1798년에 간행된 고려성원록이란 책으로 굉장히 중요한 책이었던 것입니다. 족보라지만 단순한 족보 책이 아니라 고려 왕씨의 계보가 실리고 고려 태조의 선대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당국은 이 책을 2001년 국보로 지정합니다. 이 노인성이 왕씨여인데, 그래서 북한에서는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족보를 왕건의 족보라고 봅니다. 한국에서 1467년 간행된 안동김씨 족보인 성화보나 1562년에 간행된 문화유씨 족보 가정보를 가장 오래된 족보로 파악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앞으로 서로 연구해 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선 여전히 족보에 대한 관심이 높지요?

임채욱 선생: 한국에는 족보박물관도 있고 성씨공원도 있습니다. 각 문중의 족보도 매년 찍어내고 있는 출판사가 있습니다. 요즘은 족보도 한자 모르는 젊은이들이 읽기 좋게 한글도 함께 쓰는 족보도 있고 과거와 달리 시집간 딸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자족보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족보 양상이 달라지고 있지요. 조상을 하늘처럼 여기는 정신은 전보다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자기를 의식하는 한 족보는 존재확인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