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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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8
한민족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고, 애국심이 높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한민족의 민족성에 관한 지적은 그 외에도 다양하다. 결백, 관용, 인내, 양보,
평화 애호, 정의감, 인도 정신, 예술성, 용감성 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그래서 세계에
사는 한인들에게 뒤따르는 애칭은 근면성과 용감성이다. 그래서일까 세계 속의
한인들은 지금도 내일의 희망을 위해 도전의 다리를 뻗쳐 나가고 있어 칭송을
보내는 것이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 워싱턴주 신호범 상원 부의장을 전화로 만나본다. 그는
전쟁고아에서 서울역 거지, 그리고 미국으로 입양돼 검정고시 통과 후 대학교수와
워싱턴주 하원과 상원 의원까지 입지전적인 경력을 가진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신호범씨 그는 일제 점령기에 경기도 파주 금촌에서 태어나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행방불명으로 외할머니 댁에서 살다 6살 때 고아가 되어 역경의 시기를
맞는다. 외할머니 댁에서 4살부터 6살까지 살았는데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외삼촌도 돌아가시고 외할머니 집에 며느리와 아줌마 그리고 어린아이 3명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6살때 어린아이가 먹던 맛있는 엿을 빼앗아 먹다가 두들겨
맞고 결국 가출하게 된다.
신호범: 아줌마가 어디서 구했는지 엿 한 덩어리를 깨트려서 나누어 주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먹는 것을 봤습니다. 6살 먹은 나이에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그래
아줌마 나도 주세요 하니까. 엿이 다 떨어져서 안 주지 않습니까. 하도 먹고 싶어서
꼬마 뒤에 가서 그걸 빼앗아 다 먹었습니다. 어떻게 맛있었던지요. 전 그걸로 끝난 지
알았더니 뒤에서 아줌마가 방망이로 이놈 자식 하고 막 때리지 않습니까. 머리에서
피가 줄줄 나오고 아팟습니다. 그래 겁이 나서 집에서 도망 나왔지요. 밖에 나와서
집을 보니까 아줌마가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가고 저녁때가 되어 배가 고파도 아줌마가
무서워서 못 들어가고 자정이 되면(옛날 등잔불 밖에 없었습니다.) 등잔불이 다 꺼지고
자는데 밖에 있으니까 무서워서 어찌할 줄 모르고 무서워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그래 뒷거름 질 쳐서 금천역까지 걸어왔거든요. 그래 거기서 역 앞에서 쭈그리고서
않아 있다가 통근 기차를 타고 6시에 서울로 왔습니다.
신호범 씨는 6살 때 고아가 되어 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신씨의 어린 시절 회고를
들어보자.
신호범: 학교 갈 때지만은 거리의 소년이 되어 서울역에서 얻어먹고 남대문 시장가서
쓰레기통에서 주워 먹고 이렇게 지냈어요. 그것이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 그러나 저는 그것을 지금 와서 슬프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망의 늪에 빠진 신씨에게 하늘이 도왔을까? 신씨는 당시 구걸하다가 우연히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로 들어가 먹을 것과 잠자리를 자연스레 해결하게 된다. 그때 바로 신씨는
희망의 불씨를 찾았지만 신씨는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 시절에도 외로워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신호범: 6 25사변 때 제가 노량진 다리에서 미군에게 구걸하다가 어느 미군이 트럭에
올려서 임진강 건너서 장단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를 했습니다. 거기서 하우스 보이로
있을 때에 친구도 없고 외롭고 가족이 없으니까 많이 울었어요.
신씨는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 시절 미국 입양의 기회를 맞게 된다. 그리고 오늘의 폴
신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된다. 신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신호범: 노량진 다리에서 굶고 춥고 그럴 적에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미군 부대
가서도 많이 울었어요. 왜냐면 미국 사람들 보니까 먹을 것도 많고 잠자리도 좋은데
왜 우리 한국사람들은 가난한가 생각할 적에 외로워서 제가 자주 울었습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나니까 외롭고 달도 밝고 그래서 언덕에 나가서 가만히 않아서 아무도
안보기 때문에 울고 있었거든요. 한 미군이 나에게 왜 우느냐고 물어요. 창피해서
가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안 가십니다. 또 왜 우느냐고 해요. 가라고 소리를 지르니까.
그분이 저한테 와서 꼭 안아주시면서 하는 말이 미국의 내 얘들이 셋 있는데 너를 양자로
삼고 싶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16살 때 나는 입양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입양이라는 것이 뭔지 몰랐는데 입양하면 미국 갈 수 있다는 조건에
그분에게 입양됐습니다. 그때부터 폴 신이 된 겁니다. 저희 양 아버지가 성암이
폴 인데 그분 말씀이 너 한국의 족보를 보존하기 위해서 한국 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래도 좋다. 그러면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성을 이름으로 써도 좋습니까? 좋다고
해서 그때부터 폴 신이 됐거든요. 한국성 미국성 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속하는데 한 2년 걸려서 미국 나이로 18살 때 부산항을 떠나서 미국으로 왔어요.
신씨는 한국땅 떠나올 때 부산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신씨는 당시 한국을
떠날 때 너무나 배고팠던 나라 외로웠던 나라 고생 많았던 나라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신호범: 부산에서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왜냐면 그때 한국서 미국까지 가는 직통
비행기가 없었거든요. 일본에 가서 갈아 타야 하는데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 때문에
못 가고 그래서 배를 타고 왔습니다. 부산항을 떠날 적에 여러분 죄송하지만, 부두를
보면서 침을 뱉고 떠났습니다. 배고팠던 나라, 외로웠던 나라, 얻어맞았던 나라,
고생이 많았던 나라, 차별을 많이 당했던 나라, 나는 너를 버리고 간다. 굳바이 하고
떠났거든요. 다시 안보겠다고 왜냐면 하도 외롭고 슬펐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면서
떠났습니다. 그것이 55년도인데요. 제가 얼마 전 한국에 갔을 적에 부산 항구를 갔다
왔습니다. 한국을 떠나던 항구를 가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신씨의 오늘이 있게 해준 양 아버지 레이 폴은 어떤 분일까? 레이 폴은 치과의사로
한국 전쟁 때 군의관으로 한국에서 캡틴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레리 폴 양 아버지는
3명의 자녀를 뒀지만, 자신을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처음 미국에 와서 나이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펑펑 눈물을 쏟아 내기도 했다. 그 당시 양 아버지와 학교를
찾아다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호범: 첫날 저녁에 하시는 말씀이 네가 18살인데 미국에서 뭐하고 싶으냐 물었어요.
아버지 저는 공부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내가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공부해서 반드시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나같이 어려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으니까, 좋다, 그러면
18살이니까 고등학교로 가자고 하셔요. 아버지, 저는 고등학교 못 갑니다. 왜 못 가
저는 한국서 초등학교도 졸업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어도 모르기 때문에 고등학교
못 갑니다. 눈물이 글썽글썽 하니까 아버지가 그러면 내일 우리 고등학교 가지 말고
초등학교 가자고 해요. 그래 그 다음날 초등학교에 갔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보시고
껄껄 웃으면서 미안하다. 너는 나이가 많아서 못 받아 주겠답니다. 그래서 중학교에
갔습니다. 중학교 가서도 역시 교장선생님께서 껄껄 웃으면서 I AM SORRY 하지
않습니까. 그때 미국 사람들 I AM SORRY 밖에 모르더군요. 그때 보니까. 할 수 없이
고등학교에 갔는데 교장께서 말씀이 너는 초등학교 중학교도 못 갔는데 어떻게 너를
받아 드리냐 하면서 I AM SORRY 하지 않습니까. 그때 고등학교까지 거절되니까
이젠 교육의 기회가 없거든요. 어떻게 분하든지 그분 앞에서 염치 불고하고서
울었습니다. 너 왜 우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미국에서 공부해서 선생이 되기를
위해서 왔는데 지금 당신께서 나한테 사형선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공부하고 싶으냐고 그러세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는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 미국에는 너 같은 아이들을 위해서 검정고시가 있답니다. 네가 그걸
공부해서 검정고시를 통과하면 졸업장을 받고 대학을 갈 수 있는데 너 한번
해보겠느냐고 해요. 그때 검정고시가 뭔지 몰랐습니다. 그때 솔직히 ABC도
몰랐거든요. 그렇지만은 학교 갈 수 있다는 조건에 그분보고 좋다고 했습니다.
신씨는 한국에서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닌 경험이 없어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어려움이 많았지만 양 부모님의 사랑으로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학입학의 기회를
게 된다.
신호범: 그 다음날 아침부터 교장선생님이 영어교사를 한 분 지도받도록 해 주셨어요.
미국 아줌마인데 그분이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영어를 ABC부터 가르쳐 줬거든요.
그분 덕분에 열심히 하고 낮에는 양 어머니가 저를 차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시고
어디 갈 때 회화를 배웠습니다. 그다음 밤이 되면 양아버지가 치과 의사인데 그분이
얘들 다 잔 뒤에 (장남이 9살이었고 둘째 7살 셋째가 5살이었거든요.)수학 같은
거 물리 같은 거 가르쳐 주셨어요. 그래 팀이 됐지요. 어머니는 회화 가르쳐 주시고
아버지는 물리 화학 가르쳐 주시고 그런 덕분에 내가 영어를 배움으로써 1년 4개월
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했어요.
양 부모님이 사랑을 많이 해 주셔서 양 아버지께서는 제가 어려울 때마다 뒤에서
손잡아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난 너를 믿는다는 말을 해주신 덕분에 열심히 해서
검정고시를 통해 1년 4개월 만에 마쳤습니다.
신호범 씨는 검정고시로 고교과정을 마친 후 브리검 영 대학 정치학 학사 피츠버그대
국제관계학 석사, 워싱턴대 역사학 박사를 거쳐 하와이대와 메릴랜드대 등에서 31년간
교수생활을 하게 된다.
신호범: 75년도에는 박사까지 받아서 대학교수로 31년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또
어떤 분들은 과거 고생 많았으니까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러는데 저에게는 오히려
그 고생이 지금 와서는 고생했기 때문에 꿈과 희망을 품고 노력했다. 고생했기 때문에
기회를 찾았다. 고생했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었다. 그런 감을 주기 때문에
지금 봐서는 감사에 감사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대학교수로서 31년
가르치고 지금은 미국 정계에 들어와 주 의회 하원을 거쳐 상원까지 지금 벌써 12년
동안 봉사하는 데 그것도 하나의 은혜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호범 씨는 나이 들어 다시 한국말을 배우게 된다. 바로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찾으려는 방편이었다고 한다.
신호범: 67년까지 제가 하와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근데 가르치면서
보니까 우리말을 못하고 우리 문화를 모르니까 한국사람을 보면 무서워서 도망
다녔거든요. 그래 자꾸 무서워서 느끼기를 특히 미국 식당에서 쫓겨나던 그때부터
내가 누군가 자꾸 물어보면서 내가 누군가를 알려면 공부를 해야겠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나라 말을 배우려 했거든요. 그래서 박사를 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신청했습니다.
한국사람들 좋은 대학을 좋아하니까 하버드 콜롬비아 스탠퍼드 대학을 신청했습니다.
그 다 오라고 했어요. 하버드에선 장학금까지 주겠다. 콜롬비아에서도 장학금 주겠다.
스탠퍼드에선 연구비, 생활비까지 주겠다고 오라고 했거든요. 제가 워싱턴 대학을
택했어요. 왜냐면 학교의 설명서를 보니까 한국 스터디가 있더군요. 그때 제가 느낀 것이
내가 여기를 가야겠다. 여기를 가야지만 내가 우리의 뿌리를 알 수 있고 언어를
배우니까 무서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고서 워싱턴 대학에 왔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교수님을 뵙는데 아주 잊지 못할 분입니다. 서두수 박사님입니다. 그분이 저를 3년
동안 우리나라 말을 가르쳐 줬어요. 1년째는 한글 문법 발음 등을 가르쳐 주시고
2년째는 옥편을 써 가면서 한문 가르쳐 주시고 3년째는 한국의 문학 같은 거 있지
않습니까 한번 저에게 춘향전을 주십니다. 영어로 번역하라고요. 그걸 어떻게
번역합니까 예를 들어 방자 왈 그러며 뭐라고 하죠. 그분께서 하라 하셨기 때문에
했습니다. 그런 덕분에 제가 한국사람이 됐어요. 한국말을 할 수 있으니까는
한국분들이 무섭지 않고 사랑과 따뜻함을 느끼고 그래서 교포사회에 나가서 심부름도
하고 서두수 박사님이 이만하면 됐으니까 신군 밖에 나가서 교포사회 심부름하면서
도우면서 회화를 배우라고 지금 말하는 거 그때 다 배웠습니다. 쓰는 것도 배웠고
그래서 워싱턴 대학에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신씨는 1975년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가 죽은 옛 친구의 흔적으로 함께한 것과
부산항으로 가서 한국에 사과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호범: 나를 낳아준 나라 문화를 준 나라 그래서 세 가지 이유로 갔습니다. 서울
도착하자마자 봉고차를 빌려서 금천 가서 엿장수 하러 갔거든요. 둘 째는 뭐냐
서울역에 살 때에 아주 잊지 못할 친구를 하나 사귀었습니다. 제가 7살 때 친구는
8살 때인데 겨울이면 너무 추워서 얼어 죽거든요. 낮에는 서로서로 뿔뿔이 해어져서
동냥합니다. 밤이 되면 서로 껴안고 잡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였거든요. 껴안고
자니까 죽지 않았거든요. 한번은 친구가 더 못살아 죽어버릴 거야 그래 형 그러면
안돼 형이 가면 어떡할꺼야 그래서 위로를 했는데 한번 구걸하고서 서울역에 오니까
보이지 않아요. 대합실도 없고 밖에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기차 다니는 레일로 걸어서
올라가 보니까 철도에 누워 있더군요. 부랴부랴 내려가 봤더니 이미 죽었어요.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했습니다. 내가 그 친구를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75년에 가서 재현아 내가 왔어 우리 자란 거 기억하는데 우리같이
살기로 했지 너는 죽었지만 난 죽지 않고 왔어 공부해서 박사가 돼서 교수가 돼서 왔어
너 그리워 보고 싶어 하루종일 재연이와 놀았습니다. 그다음에 하는 말이 너는 갔지만
나는 미국에 가서 너를 위해 한 못 해줄게 이렇게 약속을 했어요. 세 번째 약속이
뭐냐면 부산항을 떠날 적에 침을 뱉고 떠나지 않았습니까 거기 가서 똑같은 장소
부산항에 얻드려서 대한민국에 사과하러 왔습니다. 그때 뭣더 모르고 침뱉고 떠났는데
용서해 주세요.
신씨는 외할머니 집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이야기를 담은 엿에 얽힌 기억으로
한국에 가자마자 엿장수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자.
신호범: 여섯 살 나이에 결심한 것이 뭐냐면 나는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서 엿장수가
되겠다. 그래서 이 엿을 갖다 어려운 아이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거든요.
여섯 살때 집에서 쫒겨날 때 그때 가지고 있던 꿈이 엿장수가 되는게 꿈인데 제가 미국
와서 공부하고서 한국에 처음 갔을 때---하하하 신촌역에서 봉고차를 빌려서 엿을 잔뜩
사서 금촌까지 가서 아이들에게 나눠줬거든요. 아이들이 쫓아오면서 엿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기쁘던지 내 마음이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갈 때마다 엿을
나눠줬는데 지금 고향 가면은요. 그게 안돼요. 왜냐면 전부가 아파트 단지라 어디가
어딘지 모르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엿장수를 못합니다.
신호범 씨는 세계의 한인 젊은이에게 WHY NOT라는 질문을 자꾸 던지고 먼저 행동에
옮기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신호범: 저는 미국 와서 꿈을 갖고 살았습니다. 내가 목적이 이거니까 해야겠다.
하나 둘 셋 했는데 하니까 되더군요. 하면 됩니다. 저는 CAN DO를 믿습니다. 하면 된다
있지 않습니까. 여기 미국서 낳았다 하더라도 우리 한국의 핏줄은 버릴 수 없다.
바꿀 수가 없어서 그래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서 열심히 하고서
미국사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또 제가 입양되어 오고 또 입양으로 둘을 데리고
왔습니다. 입양아들에게도 그런 말을 합니다. 너희들이 입양해 왔지만 한국인
피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우리나라 조상에 대해 연구도하고 앞으로 아무리
국 얼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여기서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2세들에게 교육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내가 이렇게 하니까 되더라는 것을
가르치거든요.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전쟁고아에서 미국으로 입양돼 검정고시 통과 후 대학교수와
워싱턴주 하원과 상원 의원까지 입지전적인 경력을 가진 미국 워싱턴주 신호범 상원
부의장의
인생역정의 삶 1부였다. 다음 시간에는 동양인으로 정계 입문하는 인생역정의 삶 2부가
방송된다.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또한, 한민족의 민족성에 관한 지적은 그 외에도 다양하다. 결백, 관용, 인내, 양보,
평화 애호, 정의감, 인도 정신, 예술성, 용감성 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그래서 세계에
사는 한인들에게 뒤따르는 애칭은 근면성과 용감성이다. 그래서일까 세계 속의
한인들은 지금도 내일의 희망을 위해 도전의 다리를 뻗쳐 나가고 있어 칭송을
보내는 것이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 워싱턴주 신호범 상원 부의장을 전화로 만나본다. 그는
전쟁고아에서 서울역 거지, 그리고 미국으로 입양돼 검정고시 통과 후 대학교수와
워싱턴주 하원과 상원 의원까지 입지전적인 경력을 가진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신호범씨 그는 일제 점령기에 경기도 파주 금촌에서 태어나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행방불명으로 외할머니 댁에서 살다 6살 때 고아가 되어 역경의 시기를
맞는다. 외할머니 댁에서 4살부터 6살까지 살았는데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외삼촌도 돌아가시고 외할머니 집에 며느리와 아줌마 그리고 어린아이 3명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6살때 어린아이가 먹던 맛있는 엿을 빼앗아 먹다가 두들겨
맞고 결국 가출하게 된다.
신호범: 아줌마가 어디서 구했는지 엿 한 덩어리를 깨트려서 나누어 주지 않습니까.
신호범 씨는 6살 때 고아가 되어 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신씨의 어린 시절 회고를
들어보자.
신호범: 학교 갈 때지만은 거리의 소년이 되어 서울역에서 얻어먹고 남대문 시장가서
절망의 늪에 빠진 신씨에게 하늘이 도왔을까? 신씨는 당시 구걸하다가 우연히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로 들어가 먹을 것과 잠자리를 자연스레 해결하게 된다. 그때 바로 신씨는
희망의 불씨를 찾았지만 신씨는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 시절에도 외로워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신호범: 6 25사변 때 제가 노량진 다리에서 미군에게 구걸하다가 어느 미군이 트럭에
신씨는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 시절 미국 입양의 기회를 맞게 된다. 그리고 오늘의 폴
신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된다. 신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신호범: 노량진 다리에서 굶고 춥고 그럴 적에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미군 부대
신씨는 한국땅 떠나올 때 부산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신씨는 당시 한국을
떠날 때 너무나 배고팠던 나라 외로웠던 나라 고생 많았던 나라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신호범: 부산에서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왜냐면 그때 한국서 미국까지 가는 직통
신씨의 오늘이 있게 해준 양 아버지 레이 폴은 어떤 분일까? 레이 폴은 치과의사로
한국 전쟁 때 군의관으로 한국에서 캡틴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레리 폴 양 아버지는
3명의 자녀를 뒀지만, 자신을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처음 미국에 와서 나이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펑펑 눈물을 쏟아 내기도 했다. 그 당시 양 아버지와 학교를
찾아다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호범: 첫날 저녁에 하시는 말씀이 네가 18살인데 미국에서 뭐하고 싶으냐 물었어요.
신씨는 한국에서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닌 경험이 없어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어려움이 많았지만 양 부모님의 사랑으로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학입학의 기회를
게 된다.
신호범: 그 다음날 아침부터 교장선생님이 영어교사를 한 분 지도받도록 해 주셨어요.
양 부모님이 사랑을 많이 해 주셔서 양 아버지께서는 제가 어려울 때마다 뒤에서
손잡아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난 너를 믿는다는 말을 해주신 덕분에 열심히 해서
검정고시를 통해 1년 4개월 만에 마쳤습니다.
신호범 씨는 검정고시로 고교과정을 마친 후 브리검 영 대학 정치학 학사 피츠버그대
국제관계학 석사, 워싱턴대 역사학 박사를 거쳐 하와이대와 메릴랜드대 등에서 31년간
교수생활을 하게 된다.
신호범: 75년도에는 박사까지 받아서 대학교수로 31년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또
신호범 씨는 나이 들어 다시 한국말을 배우게 된다. 바로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찾으려는 방편이었다고 한다.
신호범: 67년까지 제가 하와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근데 가르치면서
신씨는 1975년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가 죽은 옛 친구의 흔적으로 함께한 것과
부산항으로 가서 한국에 사과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호범: 나를 낳아준 나라 문화를 준 나라 그래서 세 가지 이유로 갔습니다. 서울
신씨는 외할머니 집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이야기를 담은 엿에 얽힌 기억으로
한국에 가자마자 엿장수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자.
신호범: 여섯 살 나이에 결심한 것이 뭐냐면 나는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서 엿장수가
신호범 씨는 세계의 한인 젊은이에게 WHY NOT라는 질문을 자꾸 던지고 먼저 행동에
옮기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신호범: 저는 미국 와서 꿈을 갖고 살았습니다. 내가 목적이 이거니까 해야겠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전쟁고아에서 미국으로 입양돼 검정고시 통과 후 대학교수와
워싱턴주 하원과 상원 의원까지 입지전적인 경력을 가진 미국 워싱턴주 신호범 상원
부의장의
인생역정의 삶 1부였다. 다음 시간에는 동양인으로 정계 입문하는 인생역정의 삶 2부가
방송된다.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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