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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하나님 안에 타인은 없다 - 와싱톤 한인교회 김 영봉 목사

2012년 3월 4일 설교     "하나님 안에 타인은 없다"  (No Strangers In God)
                                                  누가복음(Luke) 15:25-32

방송 설교 듣기
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2/audio030412kim_b.wma

1.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차례로 보아 가면서 기도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부름 중에서 '우리'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하라고 하셨을까--이것이 오늘 생각해 보려는 질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바로 전에 예수님은 기도하는 태도에 대해 가르치
십니다. 위선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 6:6)

기도는 하나님과 기도자 사이의 사적인 사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 중에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한 눈을 팔면 안 됩니다. 한 눈 파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기분 상하는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서로에게 전심으로 집중하여 대화하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더구나,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 되면, 기도의 핵심을 놓치는 셈입니다. 사람들에게 '기도 많이 하는 사람' 혹은 '기도 잘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지는 몰라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기도자는 당연히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라고 불러야 마땅해 보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너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으니,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라고 해야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옆에 아무도 없는데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이상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데에는 분명히 뜻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또한 이 표현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정서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이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원래 이런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받은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경우,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로부터 시작합니다.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일대일로 만나 그분의 아들 혹은 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기도 중에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라고 말할 뿐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도 말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말은 진리의 한 면입니다. 그분은 그 같은 사랑으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 진실을 잊지 않으려면 우리는 "나의 아버지여!"라고 고백하는 회수만큼 "우리 아버지여!"라고도 고백해야 합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것입니다.


2.

기독교 신앙은 홀로 수도 정진하여 득도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즉시로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순간, 옆으로 형제자매들과 연결됩니다.

어느 날,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마 22:36)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유대교 랍비들이 자주 토론하던 주제였습니다. 율법서에 기록되어 있는 613가지의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를 묻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적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37-40절)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라는 말은 "둘째 계명은 다음과 같은데"라는 뜻이 아닙니다. "둘째 계명도 첫 번째 계명과 똑 같이 중요한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참되게 사랑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다면 이웃에 눈을 뜨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나는 다 싫다. 나는 혼자서 예수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과 상관하지 않고 혼자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리고 그가 만난 하나님이 이웃에게 문을 열게 하지 않았다면, 그 하나님은 우상이거나 잡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빠'라고 부르신 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눈 뜨게 하고 문을 열게 하며 손을 뻗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각자 흩어져서 골방에 들어가 홀로 기도하며 영적인 발돋움을 위해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동안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불러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홀로 있지만 이제 곧 골방을 나가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삶을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홀로 있음'과 '더불어 있음'의 두 요소가 균형을 잡아야만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 '따로 또 같이'라는 뚜엣 가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기독교인들의 별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골방에 들어가 '따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사귐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사적인 시간을 가진 다음, 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모여 한 몸을 이루어 예배하고 사귀며 섬겨야 합니다. 따로 또 같이, 따로 또 같이를 끊임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따로'만 있어도 안 되고, '같이'만 있어도 안됩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지적했듯,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있어 줄 수 없고, 다른 사람과 같이 있어줄 수 없는 사람은 홀로 있지도 못하는 법입니다.


3.

하나님을 향해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같이 하면 교회가 됩니다. 교회는 참으로 중요하고 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예배드리고 서로 삶을 나누며 세상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연합하여 공동체(community)가 되어야만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삶을 나누고 생사고락을 함께 해야만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아무리 좋은 예배당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공동체가 되지 못하면 아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분란이나 갈등으로 인해 상처를 입어 본 사람들은 조용히 믿고 싶어 합니다. 교회에 나와 아무와도 얽히지 않고 하나님만 만나고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또 때로는 영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얼마 동안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믿음의 방식이 된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을지, 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여 교회를 이루고 한 몸이 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견디기 힘 든 사람들,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신경 거스리는 사람들, 나와는 질적으로 달라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한 몸이 되어 일하는 것이 '우리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작년, YouTube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끈 영상이 있었습니다. 올 해 23세의 제퍼슨 벳키(Jefferson Bethke)라는 랩퍼(rapper)가 올린 "Why I Hate Religion But Love Jesus"("나는 왜 종교를 미워하고 예수를 사랑하는가")라는 제목의 영상입니다. 이 영상은 하룻밤 사이에 백만명이 접속할 정도로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는 이 영상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 종교에 의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노래합니다. 종교는 허위적이고 위선적이며 때로는 악마적이어서, 종교의 껍질을 벗고 예수를 만나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요즈음 미국의 젊은이들이 "나는 영적인 사람이지만 종교인은 아니다"(I am spiritual but not religious)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제레미 벳키의 노래는 이 같은 정서에 호소했기에 그같이 이례적인 주목을 끌었습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 그리고 교회라는 종교 단체에 대해 매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모두 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자초한 일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삶을 통해 보여주어야 하는데, 자주 인간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때로는 악마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예수가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어느 모로든지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이상적인 교회요 모범적인 교회라고 알려졌다 해도, 부족한 점과 불완전한 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는 완전한 교회를 향해 가는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때로 교회가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귀에 들리는 교회의 추문들은 정도를 넘어 섰습니다. 교회가 그만큼 정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 중에 활동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만난 사람들을 한 몸으로 묶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보고 '싫다' 혹은 '밉다'고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교회가 없었다면, 저나 여러분이나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겠습니까? 전능자 하나님을 향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교회로 모여야 하며, 교회를 귀하게 여기고 교회를 위해 기꺼이 헌신해야 합니다.


4.

기도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회복된 사람들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혹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마치 집을 나간 자식 혹은 부모와 절연하고 사는 자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하늘 아버지는 그들을 여전히 자녀로 여기십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향해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자식이 아닙니다"라고 소리치고 가출을 했다고 해도, 그 아버지에게 그 사람은 여전히 자식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산다면, 그리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자식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때마다 하늘 아버지를 떠나 살고 있는 '잃어버린' 형제자매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읽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비유의 후반부, 즉 자기 몫의 유산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던 큰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큰 아들은 가출했던 동생이 돌아오자 그를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풀며 좋아하는 분별없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습니다. 집안에 들어가 잔치에 참여할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던 나날들이 갑자기 손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나는 바보라서 이렇게 살고 있는 줄 아는가, 싶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달려 나와 그를 달랩니다. 그러자 아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9-30절)

여기, 마지막에 큰 아들이 동생을 가리켜 하는 말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큰 아들은 "나의 이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그를 아들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자신은 그를 동생으로 여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

사랑에 아낌이 없었던 '탕부'(prodigal father) 아버지는 큰 아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바로잡아 줍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얘야, 네 심정을 이해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라. 나의 이 아들은 너의 동생이 아니냐? 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왔는데, 네가 기뻐해야 하지 않겠니?"


5.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겨냥하여 이 이야기를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들 중에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유대교인들만을 형제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의 자녀로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따졌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차별하고 무시하고 외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큰 아들의 행동에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태도를 오늘날 믿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은 틀림없이 구원 받았다는 자만심, 복음을 수호한다는 구실로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영적 교만, 그리고 '잃어버린 형제자매들'을 '하나님이 버린 자식'으로 생각하는 배타성을 기독교인들에게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고, '보수요 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매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에게는 형제가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한 형제가 자주 집을 나가 할머니의 속을 썩였습니다. 자식이 많다 보면 그 중에 '검은 염소'가 있게 마련이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검은 염소'는 말썽꾸러기를 상징하는 비유인데, 더 이상 쓰지 말아야 할 비유입니다. '검은색 혐오증'(black phobia)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염소는 무슨 죄랍니까? 그건 그렇고, 저의 할머니께서는 집 나간 자식을 위해 늘 눈물로 기도하고, 때론 그로 인해 시름시름 앓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보다 못해 맏형인 아버지께서는 그 동생을 찾아 나서곤 했습니다. 그 동생을 데려다 놓아야만 어머니가 웃으며 사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집 나간 형제자매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늘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인생을 탕진하고 있는 '잃어버린' 형제자매들에 대해 우리는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집 나간 자식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습니까? 혹시나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나만 잘 믿으면 되는 거 아니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떠나 혹은 당신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자식들을 찾아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이 비로소 참된 행복을 찾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늘 아버지 품에 돌아올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전도(evangelism)를 하자는 것은 교회를 키우자는 뜻도 아니요 기독교의 세력을 확장시키자는 뜻도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을 풀어 드리자는 뜻입니다. 잃어버린 내 형제 자매를 되찾자는 뜻입니다. 잃어버린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하늘 아버지 앞에 인도하려는 열심을 품은 사람들만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마음껏 부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형제자매들에 대한 관심도 없고 열심도 없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마다 양심에 울리는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너는 네 형제자매들을 향한 내 마음의 아픔을 알고 있느냐?"

우리가 복음이 미치지 못한 곳에 나가 선교(mission)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집을 떠나 고통 중에 사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형제자매로서의 책임을 다하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 인해 겪는 고통을 덜어주면서 하늘 아버지께 돌아오도록 인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잃어버린 형제자매들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아픔을 안다면, 우리는 선교하는 데 인색할 수 없습니다. 집 나가 굶고 있는 동생을 찾아가 밥을 사서 먹이고 옷을 사서 입히는 형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마음 깊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전능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만한 담력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기 바랍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그렇게 친근하게 체험하고 또한 사귀며 살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나의 아빠일 뿐 아니라 내 이웃의 아빠요, 내 원수의 아빠이며, 무신론자들의 아빠이고, 다른 종교인들의 아빠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인종이 어떻든, 종교가 어떻든, 국적이 어떻든, 성별이 어떻든,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대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연대하여 거룩한 몸을 이루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 곧 우리의 잃어버린 형제자매들을 찾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할 일을 찾을 수 있기 바랍니다.

이제, 기도 중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도가 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 한 마디 부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과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앞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마다, 그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깊고 큰 의미가 마음에 울리고, 그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알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교회와 인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