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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원로 방송인 강석희 씨의 삶의 역정 ②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

원로 방송인 강석희 씨가 미국 NBC 방송 근무 당시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취재하고 있다.

사진제공-강석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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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강석희 씨는 6.25 전쟁 혼란기에 서울 유엔방송의 라디오 방송요원으로 활동했는가 하면, 1970년 미국 뉴욕에 이민 와 미국 ABC 방송에 근무하면서 월남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전두환 대통령을 시해하려고 북한이 저지른 버마 아웅 산 폭파사건 같은 굵직굵직한 뉴스를 담당했다. 그리고 1988년에는 미국 NBC 방송에 채용되어 1988년 하계 서울 올림픽의 마라톤과 체조경기를 전 세계 수십억 시청자에게 전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원로 방송인 강석희 씨의 삶의 역정 2부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를 함께 한다.

원로 방송인 강석희 씨가 1970년대 미국에 이민 와 미국 ABC에서 일을 시작한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종군 기자로 일한 한인들의 이야기는 정말 자랑스럽다.

강석희: 제가 민간인으로서 월남전에 참전했습니다. 월남에서 종군 기자들 ABC NBC CBS 등 뉴스 에이젼시가 월남전을 취재하느라고 경쟁을 많이 했습니다. 그 당시에 ABC는 한국 기자들, 카메라멘들 한 3명이 활약했었어요. 최인집 씨, 지금 오스트리아엔가 계시다는데, 생존하셨다면 한 82세나 83세 정도 될 거고, 이태흥 씨라는 분은 월남에도 계셨다가 걸프 전쟁 때 돌아가셨고, 이요섭 씨라고 서울신문사에서 사진부 차장으로 계셨는데 ABC에 프리랜서로 뛰시다가 캄보디아 월남 접경에서 지뢰를 밟아, 다리를 디뎠어요. 그래 서울에 돌아와서 ABC의 출장소 소장까지 하시다가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런 분들의 줄로 해서 ABC 뉴스(미국 맨해튼 본부)에서 저는 한국말도 잘하고 일본어도 능통하므로 주로 극동을 취재하는 뉴스 데스크에서 지시하고 취재 할당(ASSIGNMENT)하는 일을 했습니다.

강석희 씨가 미국 방송사에서 일하던 이야기는 미국 방송 역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강석희: 옛날에는 지금처럼 비디오테이프가 아니고 16mm 필름입니다. 필름 통이 무척 무겁고 두텁지요. 그리고 전원이 있어야 하니까 탄창같이 어깨에 여러 개를 메고 카메라가 무척 무겁습니다. 이런 것을 메고서 전쟁터를 누벼야 하거든요. 라디오나 신문과 달라서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적에 노출됩니다. TV에서는 영상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불이 타오르고 포탄이 터지는 등 이 강렬한 광경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뉴스 제작 프로듀서들도 카메라멘에게 아주 생생한 사진을 보내라고 하지요. 그래서 많은 카메라멘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라든가 518사건 등을 취재했는데 한국 취재원을 투입했는데 두드려 패고 잡아넣고 해서 외국인 카메라멘들을 보냈지요. 그랬더니 생생한 장면들을 보내왔지요. 뉴스를 제작하면서 상당히 기뻤던 건 역사의 현장에 있으면서 생생한 뉴스를 세상에 내 보낸다는 것이 옛 생각으로 떠오르게 되지요.

강석희 씨에게 ABC 방송국에 근무할 때 월남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전두환 대통령을 시해하려고 북한이 저지른 버마 아웅 산 폭파사건 같은 굵직굵직한 뉴스를 취재했던 이야기도 들었다.

강석희: 버마에서 일어난 폭파사건은 컸지요. 왜냐면 17명의 각료가 폭사하지 않았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조금 늦는 바람에 목숨은 구했지만 17명의 각료가 정말 실력 있고 장래가 촉망한 여러 사람이 희생당한 건데 그 당시 필름을 구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미국에서는 한 예로 레이건 대통령이 힝클리에게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도 한 5분 후에 중계차를 통해서 전 세계에 방송되지 않았습니까? ) 아웅 산 사건은 수행기자만 있었고 외신기자가 없었기 때문에 필름을 구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청와대에 부탁 하니까는 공보관이 필름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누가 이걸 허락하느냐 했더니 대통령이 하는데 너무 처참한 장면이기 때문에 그 필름을 내 줄 수 없다고 해 이게 무슨 소리냐! 북한의 김정일이가 이렇게 비 인도적인 살상 테러를 하는데 이걸 전 세계에 알려야지! 실랑이가 오가다가 그 당시 즉시 방송이 못 나가고 나중에 자료를 제공했는데 그때는 벌써 시간이 흘렀는데 뉴스는 영어 자체로 새로운 뉴스이거든요. 그러니까 벌써 시간이 지나면 기록 다큐멘터리나 들어가고 옛날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강석희 씨는 ABC 방송이 합병하면서 명예퇴직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1988년에는 NBC 방송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강 씨는 1988년 하계 서울 올림픽의 마라톤과 체조경기를 전 세계 수십억 시정 자들에게 생생히 전달했던 이야기는 한인으로 자랑스럽다.

강석희: 서울 올림픽이 시작돼서 미국서 유나이트 에어라인 전세 내어 서울에 도착했어요. 그때 감개무량했던 게 서울이 그렇게 발전된 거였어요. 한강의 기적이라고 며칠 사이에 한강 다리가 페인트칠이 바뀌고 도로를 보니까 자원봉사자들이 꽃들을 심고 재향군인들이 나서서 청소하는 광경이 아주 뜻 깊게 보여 지더라고요. 속으로는 저는 한국 출신으로서 자랑스러웠지요.

강석희 씨에게 서울 올림픽 마라톤 중계 이야기 마자 들어보자!

강석희: 마라톤은 선두에 서서 사진을 찍으려면 지리도 잘 알아야 되지마는 자동차가 매연을 내뿜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없었는지 일본 후쿠시마에서 가져온 전기차에 카메라를 달아서 사진을 찍었어요. 선두주자보다 앞서서 먼저 가야 하니까? 배기가스가 나가면 안 되거든요. 그리고 운전기사가 일본 사람이니까? 일본말로 명령해야 하니까? 그래 전 코스를 커버 했지요. 그게 감게 무량하고 그 다음에 기계체조도 마라톤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경기를 펼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이 많지요. 그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경합을 벌였지요. 그때 아마 미국 여자 선수가 개인기로 금메달을 딴 거로 기억됩니다.

강석희 씨는 미국 ABC 방송 근무할 때 유명한 앵커 테드 카플과 함께 일했다고 한다.

강석희 씨가 미국 ABC 방송 근무 당시 'NIGHT NINE' 진행자 TED KOPPEL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제공-강석희 씨)사진제공-강석희 씨강석희: ABC 뉴스 데스크에서 주로 주말에 많이 일했어요. 그 당시 주말에 WEEKEND NEWS 가 있었어요. 담당 앵커는 테드 카플(TED KOPPEL) 이라는 유명한 사람이지요. 테드 카플은 한국 동양 사람들하고도 가깝고 아주 인간성이 좋아서 대인 관계가 좋은 기자입니다. 그분이 근무할 때 이란에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소위 팔레비 국왕을 축출하고 회교도의 극단주의자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령해 미국인 영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아서 그래서 매일 밤 대사관 직원들의 안위와 사건의 진행을 매일 밤 보도하기 시작했어요. 제목 자체도 ‘미국인이 인질로 잡히다.’로 해서 1일 2일 3일 등 매일 같이 보도하니까 시청률이 크게 올라갔어요. 미국 국민들이 자국민의 안전과 그런 소위 인질로 잡혔다고 할 때는 관심이 많고 아주 분계 하거든요. 그래 시청률이 올라가고 결국은 카터 정부에서는 인질 석방에 실패하고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이란에서 인질들을 석방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위크엔드 뉴스로 죽 나오다가 시청률이 높아지니까? 프로그램 이름을’NIGHT NINE’로 바꿔 매일 테드 카플이 사건 대상자들 그날그날 뉴스를 대담과 해설로서 진행해 미국에서는 유명한 프로그램으로 발전했지요.

북한의 전 지도자 김정일이 사망했다. 북한에도 자유가 찾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강석희: 중동의 자유의 바람이 휘몰아치는데 북한에도 어떻게 그러한 어떤 변화가 오지 않을까? 정말 실마리 같은 그런 기대를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북한의 우리 동포들이 자유의 몸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런 자유를 누렸으면 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원로 방송인 강석희 씨의 삶의 역정 2부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를 함께 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