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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와싱톤한인교회 / 성령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 /조영진 감독



“우리들 희망의 이유”
로마서 8: 35- 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주간 동안도 평안하셨습니까? 이렇게 또 뵙게 되니까 참
좋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이곳에 모여서 혹은 영상으로 예배 드리시는 교우 여러분 한분,
한분께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희망”이란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종종 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삶 속에서 희망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과연 오늘의 내 삶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 인생에서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희망 안에 어떤 능력이 담겨져
있는지,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이 우리의 삶속에 가져다 준 놀라운 변화를 생각해
보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멋모르고, 재정적인 준비도 없이 서울 유학을 떠났다가 가난을 뼈저리게 체험하며,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를 붙들어 주고, 독학에 매달리게 한 것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검정고시에 패스하고도,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기약없는 투병생활에 하루하루를 보낼 때, 그때도 저를 붙들어 준 것은
회복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세브란스병원 수술방에서 밤새 출혈과 싸우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섰을 때도 희망은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낯선 미국땅에 발을 딛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아련하지만 제 가슴 속에는 보다 신실한 내일의 목회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
니다. 목회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제 가슴 속에는 제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희망이 문득, 문득 제 스스로를 깨우고 있습니다.
희망의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은 바로 내일에 대해 희망을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고, 또 우리 앞에 계셔서 우리를 새로운 내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을 통하여 이제 펼쳐질 미래를 보여주시며, 이 새날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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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약속을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그에게 안정된 삶의 터전, 땅을 주시고,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며, 그는 또 이 땅에서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바로 아브라함이 가슴에 품게 된 희망의 내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은 앞서 가시는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였습니다. 나라가 망한 후 남의 나라 바벨론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 희망의 하나님을 잘
묘사해 줍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43 장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품게 되는 희망의 내용,
그것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나아오면 쉬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칠고 힘든 세상에서 쉼이 있는 삶,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해방의 삶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이 약속의 내용이 바로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희망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말씀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보여 주시며, 이 새로운 미래는 바로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약속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갖는 희망의 내용이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가슴
속에 희망을 안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희망의 기초
물론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상의 사람들도 희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각자 나름대로 보다
나은 인생, 보다 행복한 인생을 바라며,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이
갖는 희망과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희망이 갈라지는 분깃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
세워지는 기초입니다. 희망을 갖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희망을 세우는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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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 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보다 밝고, 행복한 미래를 세워가는 그 기초는 무엇입
니까? 그들이 갖는 희망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기초는 자신의 능력이나 지식, 소유, 혹은 운입니다. 보다 잘 살아보겠다는 열망입니다.
성공해 보겠다는 꿈이 바로 희망의 기초이며, 이유입니다. 물론 이런 기초 위에 노력을
더해서 자신의 꿈, 희망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초들은 충분히 튼튼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길에 고난이 닥쳐오면 쉽게 흔들리고, 무너져 내립니다. 밀려오는
고난과 실패의 아픔, 풍랑 앞에서 희망이 꺾이는 실망과 좌절을 맛보기 쉽습니다. 사업의
실패를 맛보고, 건강이 흔들리고, 하루 아침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가정에 어려움이
밀려오게 되면, 나란 존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결코 우리의 희망을 세우는 튼튼한
반석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마지막 대적, 죽음이 찾아오면 다 내려놓고, 두고
갈 수 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희망의 기초는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의 기초는 세상의 사람들이 갖는 희망의 기초와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가 희망을
세우는 그 기초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희망의 기초는 과연 반석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예수쟁이들의 희망의 기초는 다릅니다. 이 기초는
어떤 풍파가 밀려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기초는 참으로 튼튼합
니다.
오늘 우리는 유명한 로마서 8 장의 마지막 부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찬가를 함께
읽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힘이 솟습니다. 흥분하게 됩니다. 이 사랑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외칩니다.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튼튼한지, 얼마나 견고한지,
얼마나 위대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고난, 어떤 시련, 어떤 박해, 어떤 위협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 사랑은 강력하며,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 끈질긴 사랑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붙들어 주며,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풍파가 밀려와도 주님이 주시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고난의 바다를 헤쳐갈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희망, 우리의 삶이 세워지는
튼튼한 기초, 반석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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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가 함께 부른 찬송가 488 장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1 절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2 절 무섭게 바람 부는 밤/ 큰 물결 높이 설렐 때/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참으로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그런데 후렴 부분이 영어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우리 말 찬송은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로
번역했는데, 영어 찬송은 “On Christ the solid rock I stand/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All
other ground is sinking sand” 주님께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설 것입니다. 다른 모든
기초들은 무너져 내리는 모래입니다. 무너져 내리는 모래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의 광풍
속에서 우리가 설 수 있는 반석, 우리 희망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결코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무너
져 내리는 모래 입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위에 희망을 세우는 사람들의 삶을 본문
8:37 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개역성경 개정판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
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고 옮겨놓고 있습니다.
(1)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에 뿌리를 내리면 우리는
어떤 고난, 어떤 역경, 어떤 박해, 어떤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고난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에서 부딪치는 고난은 참으로 괴롭습니다. 내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때, 우리는 절망과 쓰라린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내가 믿었던 자신의 능력, 자신의
소유가 깨어지고, 흔들리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도 무너져 내립니다. 이제 갈 길이 있는가
묻게 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지, 아니 내게 관심
이나 있으신지 묻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 제일 염려스러운 것은 희망 없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고난의 밑바닥에서 과연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까? 희망을 세울 기초가
다 무너져 내렸는데, 어디서 희망을 불러올 수 있습니까? 과연 길이 있습니까? 길이 있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길이 있습니다. 고난을 딛고 일어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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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희망을 그분의 사랑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고난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실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끈질긴 사랑입니다.
12 년 전에 돌아가신 여성 작가 박완서님의 책 한 말씀만 하소서를 소개하는 글을 Naver 의
Blog 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박완서님은 사랑하는 남편을 암으로 먼저 보낸 지, 석달 만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서울대학 병원에서 마취과 전문의 과정을 밟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의사로서 좀 그럴듯한 분야를 하지 왜 마취과 의사냐고 물었을
때, 아들은 마취과 의사는 환자가 수술을 받는 가장 중요한 시간에 생명줄을 잡고 있는
사람인데, 수술이 끝나면 사람들이 기억해 주지 않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자신은 이 외로움
이 좋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이 깊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분의 저서에서 몇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통곡이 치받쳤다. 며칠 동안 주리 참듯 참았던
울음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사랑하는 아들이 창창한 나이에
어두운 땅속에 누워있다는 걸 내가 믿어야 한다니 발작적인 울음이 북받쳤다...”
이같은 고통 속에서 이해인 수녀님을 비롯한 사랑하는 이웃들과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박완서님은 깨닫습니다. “내가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 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망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 로 고쳐 먹을 수 있다면 구원의
실마리가 거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Blog 의 마지막 부분은 박완서님의
글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한 말씀만 하시옵소서. 그러나 하느님은 일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 고통의 순간을 지나올 때, 내가
그렇게도 원망할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의 원망을 받아줄
하느님이 안계셨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에 수많은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질 때, 그 원망을 고스란히 들어 주셨던 하느님 그 분의 침묵은 더 많은 원망을
듣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이다.” 참으로 좋은 글 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께서 지으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 안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God is love, 우리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의지하면, 우리는 다시 희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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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꿀 수 있습니다. 고난의 폭풍도 헤쳐갈 수 있습니다 희망의 하나님, 희망으로 우리를
붙러 주시는 하나님께서 앞장서 가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분은 폭풍을 잔잔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우리 인생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면 인생의 마지막 대적인 죽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만” 하고 찾아와서 삶의 희망을 빼앗아 가는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죽음은 참으로 무례한 것입니다. 예고없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또한
공평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예외없이, 찾아오는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 너머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죽음 너머의 세계가 불안을 몰아다 주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을 두고 가야만 하는 분리(Separation)입니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도 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혼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함께 갈 수 없고, 또 대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아주 외로운 길입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는 외롭게, 그저 요단강을 건너갈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희망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알 수 없는 죽음 너머의 세계가 불안을, 두려움을 안겨 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 앞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희망의 끈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관계는 끊어져도,
죽음 앞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튼튼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8:38 이하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죽음도, 삶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아멘.
이 끈끈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입니다.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요즈음 많이 보고되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연구도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갖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만, 우리 희망의 결정적
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분과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관계가 영원한
희망이 세워지는 반석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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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혼돈 속에서 진통하는 교회들에게도 희망을
줍니다. 이 튼튼한 사랑의 끈을 붙들면 우리는 오늘의 아픔, 이 혼돈을 이길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저희 교회가 속한 연합감리교단은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교단을 떠나는 교회들, 남는
교회들 모두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상처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교단 전체가 큰 폭풍 속을 헤쳐가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이같은 교단의 현실 앞에서
가야할 길에 대한 분별의 과정을 헤쳐오고 있는데, 제게는 한가지 분명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이 진통 속에서도 우리 주님께서는 여전히 떠나는 교회에도, 남아 있는 교회
에도, 함께 하시며, 오늘의 혼돈은 바로 새날을 잉태하는 모판이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이 동성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개최한 2019 년 특별총회때
기도팀의 일원으로 그 총회 속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준비하는 기도 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연합감리교 역사에서는 처음으로 총회가 시작되기 전 6 시간 이상을 함께
기도하며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총회의 결과로 교단은 더 큰 파열음이 생기고, 분열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 때 동료 감독과 대화하면서 저는 이 혼돈과 아픔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혼돈 속에 질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서 교회들이 새날을 향해 나아가는 과도기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줄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이같은 희망의 이유는 끊어지지 않는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고난, 어떤 아픔, 어떤 질병과 도전 앞에서도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 끈질긴
희망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우리들이 갖는 희망의 이유입니다.
가끔 무언가 쓰고 싶을 때 적어 놓았던 것이 있는데, 이 글을 함께 나누면서 오늘 제 설교를
줄입니다. 이 글의 제목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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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시커먼 먹구름 하늘을 덮고/세찬 비바람 앞길을 막을 때,
끝없이 밀려오는 고난의 물결/내 무릎 꺾어 주저앉힐 때,
고난 앞에서 깨어진 믿음의 파편들/불안과 걱정을 몰아다 줄 때,
말라붙은 사랑의 샘/쓰디쓴 미움만을 토해낼 때,
무너진 꿈의 터전 위에/아픈 가슴 울리는 탄식의 소리 메아리 칠 때,
모든 것 깨어지고/모든 것 무너지고/모든 것 사라지고
모든 것 떠나버린 절망의 밑바닥에서/인생의 끝자락에서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 내게 손짓할 때,
과연 희망이 있습니까?/길이 있습니까?/아직 꿈을 꾸고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입니까?
끊어지지 않는 질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아직 길이 있습니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절망의 봇짐 이제 내려 놓으십시오
절망에 부지런 떨지 말고/주를 향해 두손 들고 이제 일어나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끈질긴 하늘의 사랑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새날이 있습니다
사랑이신 그분 때문에/임마누엘이신 그분 때문에
아직 희망이 있으니 이제 힘을 내십시오 이제 일어서십시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아직 희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