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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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5
세계 어디를 가든 한인들은 한인만의 특별한 향기를 지닌 김치를 즐겨 먹고
불고기와 잡채 등 백의민족의 먹을거리를 전승하고 간직하며 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세계 어디에서 살든 한국 전통의 춤과 풍물을 사랑하며
한국 문화를 알리는 기수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백의민족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볼티모어를 찾아간다.
미국 동부 해안의 뉴욕과 워싱턴 D.C.사이에 자리 잡은 불티모어는
아름다운 관광 명소들로 인해 ‘매력의 도시’라고 불리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볼티모어는 다 인종적
문화유산과 해양 문화유산, 역사 감각, 맛있는 먹을거리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미국 역사의 가치와 관광지로서 호평을 받는 볼티모어에는
한인들이 대략 3만여 명이 살고 있다. 이곳 미국 문화의 산실로 알려진
볼티모어에 한국 풍물패 ‘한판’이 소개된 지 10여 년이 넘어서면서
점차 미국 속의 한국 문화로 성장해 가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볼티모어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에서 한국 전통의 풍물을 널리 소개하고있는 ‘한판’의 박춘기
상임고문을 만나 본다.
박춘기 씨는 고향이 경상북도 대구이다. 1979년 경북대학교 시절 여자친구로
인해 풍물과 접하게 된다.
박춘기: 대부분의 사람이 대학 그룹활동을 통해서 취미 활동을 하게 되는데
저도 대학의 농악단이 있었는데 사실은 여자친구가 농악단 활동을 하고 있어서
뒤 바라지 하고 같이 활동하면서 접하게 됐고 농활 활동 나갈때 같이 지원
나가면서 풍물을 접하게 됐습니다.
학창시절 박춘기 씨가 풍물을 접하는 것은 정규단원들의 뒷바라지 역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춘기: 외부로 나가는 것보다 교내 행사 때에는 항상 풍물이 동원되곤
하니까 그때마다 공연에 참가했고 그때는 제가 정규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잡색 역할을 했지요.
박춘기 씨가 들려주는 군 장교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끈질긴 군인정신이
오늘의 풍물패를 이끌어 오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박춘기: 캠퍼스 연인인 여자친구의 요청도 있고 학교생활을 같이 마감하자 해서
ROTC를 지원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ROTC 교육을 받고 1983년도에 졸업과 동시에
임관했는데 ROTC 21기입니다. 남자답게 군대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후방인
대구로 발령이 났습니다. 나름대로는 국방의 의무를 정말 멋있게 하고 싶어서
전방에 가서 전방 소대장을 하고 싶었는데 후방에 오니까 방위병 관리를 할
것이냐 예비군 관리를 할 것이냐. 그래서 저는 다 싫다. 몇 명 안가는 동해안
소초장을 하겠다고 지원을 해서 울진서부터 포항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소초장
근무를 했습니다.
박춘기 씨는 1987년 미국 이민 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미국에 온 이후 어떻게
풍물패 ‘한판’이 시작되었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박춘기: 제가 처음 미국와 다른 대학선배 부인께서 고전 무용과 장고 이런 것을
전공하신 분이 계셔서 개인적으로 욕심이 생기고 해서 사사를 받았습니다.
설장구를 배우곤 했는데 이분은 교환교수로 잠깐 왔다 돌아가시고 한 10년이
흐른 후, 98년도 쯤 인가 버지니아에 ‘우리문화나눔터’라는 풍물 문화운동
단체가 먼저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체가 메릴랜드 볼티모아에 전파하려고
강습이 있었습니다. 그때 참여를 하게 됐지요.
박춘기 씨가 본격적으로 풍물 강습에서 언어 코스 후배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열심히 전수받아 풍물패 ‘한판’을 만들기로 한다.
박춘기: 막상 가보니까 옛날 우리 같이 미국 와서 언어 코스를 같이 하던
후배들이 거기를 왔더라고요. 그래서 의기 투합이 돼서 열심히 전수받고 이걸
계기로 해서 우리 지역에 문화운동단체를 만들어보자 그렇게 시작이 된 거지요.
그때 16주의 강습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때 기초를 배우고 조직을 만들고
이렇게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버지니아에서 활동하는
우리문화나눔터의 지원을 많이 받았지요. 기량이 아주 훌륭한 조현숙 씨나
몇 분들이 계셨어요. 개인별로 잘 다루는 악기를 우리가 전수를 받고 유익한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풍물패 ‘한판’은 1978년 드디어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박춘기 씨의 이야기다.
박춘기: 처음에 바로 강습을 마치고 볼티모어 풍물패라는 이름을 가지고
시작을 했는데 단원들도 늘면서 너무 지역적으로 볼티모어라고 국한을 시킨
것 같고 풍물패 이름 자체에 영어 이름이 들어가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새로
개명을 하자 이렇게 해서 아이디어를 모았는데 우리가 ‘한판’ 거나하게 놀자
‘한판’ 한잔하자 이런 뜻도 있지마는 우리 큰 고유의 말로 아래 하자가 들어가는
한자가 크다는 의미도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크게 한판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런 문화운동 단체가 되자고 하는 식으로 해서 이름을 개명하게 되었고요.
한판이 공연활동을 시작하면서 어떤 공연 준비를 했을까. 박춘기 씨의 설명이다.
박춘기: 우리 한판은 사물놀이 중심으로 하지만은 그 풍물 자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사물놀이의 부류와 마을 궃 형태로 이어져 오는 선반, 악기를 주로 메고
뛰고 춤추면서 발림을 하고 몸동작 손동작을 같이 함께하면서 하는 그런
마을 궃 형태와 김덕수 사물놀이 팀이 처음 시작한 1978년도부터 연주형태로
만들어 낸 사물놀이 이렇게 2개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우리 한판은 두 가지
다 하고 있습니다.
박춘기 씨는 종합 연희의 형태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박춘기: 한판이 성장해오면서 우리 문화를 전파한다는 그 자체는 우리만
모여서 열심히 연습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조화를 공연을
통해서 보여주고 그렇게 해야 되기 때문에 주로 공연 중심으로 나가기 위해서
공연이 너무 단조로울 수 있으니까. 거기에는 모덤북 연주라든지 고성 오광대
탈춤이라든지 봉산 탈춤이라든지 강령탈춤 등 우리 국악의 요소들인 장점을
뽑아서 전체적으로 하는 종합 연희 집단이 서서히 되어가는 형태로 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풍물패 ‘한판’ 단원들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박춘기 씨는 단원들은 어린이부터
60 이 넘은 분까지 다양하다고 이야기한다.
박춘기: 3대가 다 함께 우리 문화를 배우고 읽히고 또 전파를 하는 형태인데요.
어린 학생들은 젊은 엄마의 손에 잡혀와서 7-8세의 초등학생들로부터 몇 년씩
오랫동안 같이 활동해온 60을 바라보는 분들 이렇게 해서 연령층으로는
다양하고요. 지금 현재 활동하는 단원 수는 한 35명 정도 같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박춘기 씨는 한판이 사용하는 악기들을 설명하면서 한국 전통의 오묘한
진리가 담겼다고 자랑한다
박춘기: 우선 사물놀이라고 하면 4가지 악기인데 팀을 리더하는 꾕과리,
장구, 북, 징 이렇게 자연의 소리를 담았다고 하지요. 꾕과리는 우리 자연
중에서 천둥 번개를 의미하고요. 장구는 비를 의미하고, 북은 구름을
의미하고, 다음에 징은 바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연의 소리를
담아내는 사물놀이를 연주하는 그런 의미라고 우리가 얘기하고 그 외에는
사물놀이 연주놀이 형태로 할 때면 이 4가지 연주로 충분하고요. 그런데
선반을 통해서 청중들이 같이 어울려서 마당에서 노는 것 그래서 우리 문화
자체는 그냥 보기만 하는 어떤 연주나 연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보는
사람이 있고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니라 큰 마당에서 같이 노는 겁니다.
10여 년동안 단원들과 활동하면서 미국 학생들에게도 우리 풍물을 전수
하는데 큰 희망을 가졌다고 설명해 준다.
박춘기: 보람 있었던 것은 여기 엘리컷 시티 중심에서 한인 동포들이 모여
사는데 마운트 해브론 이라는 고등학교에 우리 한인 학생들이 많이 다닙니다.
거기에 우리 풍물이 정규 서클로 채택되면서 지도교사가 있고 우리 한인들
뿐 만 아니라 미국 친구들과 같이 풍물을 배우고 읽히는 걸 보면서 보람을
느꼈고요. 그다음에 아무래도 풍물패가 있으니까 한국에서 갓 이민 오거나
홀로 떨어져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친구 만들기도 어렵고 외롭고 해서
사춘기를 맞아 방황했어요. 그런 친구들을 사물패에 오게 해서 미국에
정착하는데 조금 위안을 삼는 그런 계기가 됐고, 그러면서 미국에 정착하고
공부도 잘 따라가고 이렇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줬다는 것이 좋아고요.
특히 여기서 태어난 2세들이 한국말도 서툴고 한국 풍습이나 관습에도
서툴지마는 서서히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어른들에게 예의를 가출 줄도
한국말도 늘어가고 그런 몸가짐에서 우리 장구를 열심히 배워서 현란한
손놀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제대로 뿌리를 찾아가는 구나 하는 그런 보람도
느꼈지요.
풍물패 ‘한판’이 펼친 공연 중에서 2003년 이민 100주년 기념 공연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말한다.
박춘기: 2003년도 이민 100주년 기념으로 볼티모어지역 ‘이너하버’
(Baltimore, Inner Harbor)명소에서 미리 허가를 받아서 4시간 정도 대규모
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때는 다른 주에서 활동하는 풍물단체와
연관해서 그 단체를 초청하고 한국에서도 풍물패를 초청하고 해서 대규모
공연을 했는데 우리 잔치이지만 외국사람들이 우리 풍물의 장단에 맞춰서
같이 춤추고 노래하고 따라 하고 그렇게 하는 걸을 보고 참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우리 장단이 사실 타악기로 구성된 사물놀이 이기 때문에
상당히 흥겹다면 흥겨워요. 그래서 오히려 외국사람들이 더 빨리 적응을
해서 우리와 동화되는 그런 현상을 보는데 나름대로 민족성 차이겠죠. 이
한국민의 민족성은 조금 겸손과 겸양 이런 것 때문에 이렇게 좀 사양하다가
마지막 막판에 가면 흥겨워지고 서서히 뜨거워지는 끈기가 있는 그런
민족이라서 그렇지 않나 나름대로 판단합니다만 그런 공연을 통해서 같이
외국사람들이 풍물 음률에 맞춰서 같이 놀아주고 춤추고 동화될 때 우리가
하는 일들에 대해 보람을 느끼는 거지요.
우리 전통문화와 관련해 한인 2세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박춘기: 우리의 문화가 얼마나 우세했는지 우리의 풍물이 얼마나 교묘하게
참 재미있는지 이런 스스로 자부심이 있어야 만 우리 2세들에게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종용을 하고 접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 2세들은 그런 자부심을 안고 배우게 된다면 얼마든지 남에게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전수하고 배우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춘기 씨는 볼티모어에 사는 자랑을 이렇게 들려준다.
박춘기: 볼티모어는 독립전쟁 당시 격전지로도 유명하고요. 그래서
스콧 키(Francis Scott Key) 라는 분이 전쟁의 포화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가운데서 시를 지은게 결국 미국 애국가의 가사가 됐지요. 그런 역사적인
유적지이기도 하고 항구도시로서 아름다운 바다와 인접할 수 있는 좋은
배경으로 우리 한국동포들도 3-4만이 거주하는 적당한 도시, 뉴욕이나
LA처럼 바쁘고 쫓기는 곳이 아니고 텍사스나 오하이오처럼 너무 한적한
곳도 아니고 적당하게 우리 한국문화도 접할 수 있으면서 전원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메릴랜드가 아닌가 자화자찬을 해 보고요.
풍물과 함께하는 박춘기 씨의 회고이다.
박춘기: 저 개인적으로는 이 풍물을 위해서 우리 문화를 위해서 같이 활동해온
동지자 후배인 박기찬 씨와 박기웅 두 형제 그리고 박권상 김방훈 이분들이
같이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이 많은 세월을 같이 재미있게 해오지 않았나
싶어요.
박춘기 씨는 다행스럽게도 개인 사업으로 풍물패 활동하는 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해온 덕분에
스쿠버 다이빙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박춘기 씨에게 영원히 한국의 풍물
전도사가 되기를 당부해 본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볼티모어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에서
한국 전통의 풍물을 널리 소개하고 있는 ‘한판’의 박춘기 상임고문을 만나 봤다.
세계의 한국인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불고기와 잡채 등 백의민족의 먹을거리를 전승하고 간직하며 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세계 어디에서 살든 한국 전통의 춤과 풍물을 사랑하며
한국 문화를 알리는 기수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백의민족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볼티모어를 찾아간다.
미국 동부 해안의 뉴욕과 워싱턴 D.C.사이에 자리 잡은 불티모어는
아름다운 관광 명소들로 인해 ‘매력의 도시’라고 불리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볼티모어는 다 인종적
문화유산과 해양 문화유산, 역사 감각, 맛있는 먹을거리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미국 역사의 가치와 관광지로서 호평을 받는 볼티모어에는
한인들이 대략 3만여 명이 살고 있다. 이곳 미국 문화의 산실로 알려진
볼티모어에 한국 풍물패 ‘한판’이 소개된 지 10여 년이 넘어서면서
점차 미국 속의 한국 문화로 성장해 가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볼티모어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에서 한국 전통의 풍물을 널리 소개하고있는 ‘한판’의 박춘기
상임고문을 만나 본다.
박춘기 씨는 고향이 경상북도 대구이다. 1979년 경북대학교 시절 여자친구로
인해 풍물과 접하게 된다.
박춘기: 대부분의 사람이 대학 그룹활동을 통해서 취미 활동을 하게 되는데
저도 대학의 농악단이 있었는데 사실은 여자친구가 농악단 활동을 하고 있어서
뒤 바라지 하고 같이 활동하면서 접하게 됐고 농활 활동 나갈때 같이 지원
나가면서 풍물을 접하게 됐습니다.
학창시절 박춘기 씨가 풍물을 접하는 것은 정규단원들의 뒷바라지 역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춘기: 외부로 나가는 것보다 교내 행사 때에는 항상 풍물이 동원되곤
하니까 그때마다 공연에 참가했고 그때는 제가 정규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잡색 역할을 했지요.
박춘기 씨가 들려주는 군 장교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끈질긴 군인정신이
오늘의 풍물패를 이끌어 오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박춘기: 캠퍼스 연인인 여자친구의 요청도 있고 학교생활을 같이 마감하자 해서
ROTC를 지원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ROTC 교육을 받고 1983년도에 졸업과 동시에
임관했는데 ROTC 21기입니다. 남자답게 군대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후방인
대구로 발령이 났습니다. 나름대로는 국방의 의무를 정말 멋있게 하고 싶어서
전방에 가서 전방 소대장을 하고 싶었는데 후방에 오니까 방위병 관리를 할
것이냐 예비군 관리를 할 것이냐. 그래서 저는 다 싫다. 몇 명 안가는 동해안
소초장을 하겠다고 지원을 해서 울진서부터 포항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소초장
근무를 했습니다.
박춘기 씨는 1987년 미국 이민 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미국에 온 이후 어떻게
풍물패 ‘한판’이 시작되었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박춘기: 제가 처음 미국와 다른 대학선배 부인께서 고전 무용과 장고 이런 것을
전공하신 분이 계셔서 개인적으로 욕심이 생기고 해서 사사를 받았습니다.
설장구를 배우곤 했는데 이분은 교환교수로 잠깐 왔다 돌아가시고 한 10년이
흐른 후, 98년도 쯤 인가 버지니아에 ‘우리문화나눔터’라는 풍물 문화운동
단체가 먼저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체가 메릴랜드 볼티모아에 전파하려고
강습이 있었습니다. 그때 참여를 하게 됐지요.
박춘기 씨가 본격적으로 풍물 강습에서 언어 코스 후배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열심히 전수받아 풍물패 ‘한판’을 만들기로 한다.
박춘기: 막상 가보니까 옛날 우리 같이 미국 와서 언어 코스를 같이 하던
후배들이 거기를 왔더라고요. 그래서 의기 투합이 돼서 열심히 전수받고 이걸
계기로 해서 우리 지역에 문화운동단체를 만들어보자 그렇게 시작이 된 거지요.
그때 16주의 강습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때 기초를 배우고 조직을 만들고
이렇게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버지니아에서 활동하는
우리문화나눔터의 지원을 많이 받았지요. 기량이 아주 훌륭한 조현숙 씨나
몇 분들이 계셨어요. 개인별로 잘 다루는 악기를 우리가 전수를 받고 유익한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풍물패 ‘한판’은 1978년 드디어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박춘기 씨의 이야기다.
박춘기: 처음에 바로 강습을 마치고 볼티모어 풍물패라는 이름을 가지고
시작을 했는데 단원들도 늘면서 너무 지역적으로 볼티모어라고 국한을 시킨
것 같고 풍물패 이름 자체에 영어 이름이 들어가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새로
개명을 하자 이렇게 해서 아이디어를 모았는데 우리가 ‘한판’ 거나하게 놀자
‘한판’ 한잔하자 이런 뜻도 있지마는 우리 큰 고유의 말로 아래 하자가 들어가는
한자가 크다는 의미도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크게 한판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런 문화운동 단체가 되자고 하는 식으로 해서 이름을 개명하게 되었고요.
한판이 공연활동을 시작하면서 어떤 공연 준비를 했을까. 박춘기 씨의 설명이다.
박춘기: 우리 한판은 사물놀이 중심으로 하지만은 그 풍물 자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사물놀이의 부류와 마을 궃 형태로 이어져 오는 선반, 악기를 주로 메고
뛰고 춤추면서 발림을 하고 몸동작 손동작을 같이 함께하면서 하는 그런
마을 궃 형태와 김덕수 사물놀이 팀이 처음 시작한 1978년도부터 연주형태로
만들어 낸 사물놀이 이렇게 2개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우리 한판은 두 가지
다 하고 있습니다.
박춘기 씨는 종합 연희의 형태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박춘기: 한판이 성장해오면서 우리 문화를 전파한다는 그 자체는 우리만
모여서 열심히 연습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조화를 공연을
통해서 보여주고 그렇게 해야 되기 때문에 주로 공연 중심으로 나가기 위해서
공연이 너무 단조로울 수 있으니까. 거기에는 모덤북 연주라든지 고성 오광대
탈춤이라든지 봉산 탈춤이라든지 강령탈춤 등 우리 국악의 요소들인 장점을
뽑아서 전체적으로 하는 종합 연희 집단이 서서히 되어가는 형태로 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풍물패 ‘한판’ 단원들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박춘기 씨는 단원들은 어린이부터
60 이 넘은 분까지 다양하다고 이야기한다.
박춘기: 3대가 다 함께 우리 문화를 배우고 읽히고 또 전파를 하는 형태인데요.
어린 학생들은 젊은 엄마의 손에 잡혀와서 7-8세의 초등학생들로부터 몇 년씩
오랫동안 같이 활동해온 60을 바라보는 분들 이렇게 해서 연령층으로는
다양하고요. 지금 현재 활동하는 단원 수는 한 35명 정도 같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박춘기 씨는 한판이 사용하는 악기들을 설명하면서 한국 전통의 오묘한
진리가 담겼다고 자랑한다
박춘기: 우선 사물놀이라고 하면 4가지 악기인데 팀을 리더하는 꾕과리,
장구, 북, 징 이렇게 자연의 소리를 담았다고 하지요. 꾕과리는 우리 자연
중에서 천둥 번개를 의미하고요. 장구는 비를 의미하고, 북은 구름을
의미하고, 다음에 징은 바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연의 소리를
담아내는 사물놀이를 연주하는 그런 의미라고 우리가 얘기하고 그 외에는
사물놀이 연주놀이 형태로 할 때면 이 4가지 연주로 충분하고요. 그런데
선반을 통해서 청중들이 같이 어울려서 마당에서 노는 것 그래서 우리 문화
자체는 그냥 보기만 하는 어떤 연주나 연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보는
사람이 있고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니라 큰 마당에서 같이 노는 겁니다.
10여 년동안 단원들과 활동하면서 미국 학생들에게도 우리 풍물을 전수
하는데 큰 희망을 가졌다고 설명해 준다.
박춘기: 보람 있었던 것은 여기 엘리컷 시티 중심에서 한인 동포들이 모여
사는데 마운트 해브론 이라는 고등학교에 우리 한인 학생들이 많이 다닙니다.
거기에 우리 풍물이 정규 서클로 채택되면서 지도교사가 있고 우리 한인들
뿐 만 아니라 미국 친구들과 같이 풍물을 배우고 읽히는 걸 보면서 보람을
느꼈고요. 그다음에 아무래도 풍물패가 있으니까 한국에서 갓 이민 오거나
홀로 떨어져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친구 만들기도 어렵고 외롭고 해서
사춘기를 맞아 방황했어요. 그런 친구들을 사물패에 오게 해서 미국에
정착하는데 조금 위안을 삼는 그런 계기가 됐고, 그러면서 미국에 정착하고
공부도 잘 따라가고 이렇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줬다는 것이 좋아고요.
특히 여기서 태어난 2세들이 한국말도 서툴고 한국 풍습이나 관습에도
서툴지마는 서서히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어른들에게 예의를 가출 줄도
한국말도 늘어가고 그런 몸가짐에서 우리 장구를 열심히 배워서 현란한
손놀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제대로 뿌리를 찾아가는 구나 하는 그런 보람도
느꼈지요.
풍물패 ‘한판’이 펼친 공연 중에서 2003년 이민 100주년 기념 공연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말한다.
박춘기: 2003년도 이민 100주년 기념으로 볼티모어지역 ‘이너하버’
(Baltimore, Inner Harbor)명소에서 미리 허가를 받아서 4시간 정도 대규모
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때는 다른 주에서 활동하는 풍물단체와
연관해서 그 단체를 초청하고 한국에서도 풍물패를 초청하고 해서 대규모
공연을 했는데 우리 잔치이지만 외국사람들이 우리 풍물의 장단에 맞춰서
같이 춤추고 노래하고 따라 하고 그렇게 하는 걸을 보고 참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우리 장단이 사실 타악기로 구성된 사물놀이 이기 때문에
상당히 흥겹다면 흥겨워요. 그래서 오히려 외국사람들이 더 빨리 적응을
해서 우리와 동화되는 그런 현상을 보는데 나름대로 민족성 차이겠죠. 이
한국민의 민족성은 조금 겸손과 겸양 이런 것 때문에 이렇게 좀 사양하다가
마지막 막판에 가면 흥겨워지고 서서히 뜨거워지는 끈기가 있는 그런
민족이라서 그렇지 않나 나름대로 판단합니다만 그런 공연을 통해서 같이
외국사람들이 풍물 음률에 맞춰서 같이 놀아주고 춤추고 동화될 때 우리가
하는 일들에 대해 보람을 느끼는 거지요.
우리 전통문화와 관련해 한인 2세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박춘기: 우리의 문화가 얼마나 우세했는지 우리의 풍물이 얼마나 교묘하게
참 재미있는지 이런 스스로 자부심이 있어야 만 우리 2세들에게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종용을 하고 접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 2세들은 그런 자부심을 안고 배우게 된다면 얼마든지 남에게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전수하고 배우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춘기 씨는 볼티모어에 사는 자랑을 이렇게 들려준다.
박춘기: 볼티모어는 독립전쟁 당시 격전지로도 유명하고요. 그래서
스콧 키(Francis Scott Key) 라는 분이 전쟁의 포화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가운데서 시를 지은게 결국 미국 애국가의 가사가 됐지요. 그런 역사적인
유적지이기도 하고 항구도시로서 아름다운 바다와 인접할 수 있는 좋은
배경으로 우리 한국동포들도 3-4만이 거주하는 적당한 도시, 뉴욕이나
LA처럼 바쁘고 쫓기는 곳이 아니고 텍사스나 오하이오처럼 너무 한적한
곳도 아니고 적당하게 우리 한국문화도 접할 수 있으면서 전원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메릴랜드가 아닌가 자화자찬을 해 보고요.
풍물과 함께하는 박춘기 씨의 회고이다.
박춘기: 저 개인적으로는 이 풍물을 위해서 우리 문화를 위해서 같이 활동해온
동지자 후배인 박기찬 씨와 박기웅 두 형제 그리고 박권상 김방훈 이분들이
같이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이 많은 세월을 같이 재미있게 해오지 않았나
싶어요.
박춘기 씨는 다행스럽게도 개인 사업으로 풍물패 활동하는 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해온 덕분에
스쿠버 다이빙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박춘기 씨에게 영원히 한국의 풍물
전도사가 되기를 당부해 본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볼티모어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에서
한국 전통의 풍물을 널리 소개하고 있는 ‘한판’의 박춘기 상임고문을 만나 봤다.
세계의 한국인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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