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주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음악회가 지난 3월 버지니아 캐슬톤에서 열려 화제가 되었다. 세계적인 지휘자 로린 마젤(Lorin Maazel)이 설립한 ‘샤토빌재단’이 주관한 음악회에 한인 성악가 심용석 테너와 다국적 음악인들로 구성된 ‘솔트 오페라 앙상블(SALT OPERA ENSEMBLE)’이 초청돼 많은 한국 가곡을 불러 의미를 더해줬다. ‘침묵을 깨어야 할 시간’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음악회의 사회를 맡은 로린 마젤의 아들 오손 마젤은 관객들에게 북한 인권의 실상을 소개하면서 모두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호소해 눈길을 끌었다. 오손 마젤의 아버지 로린 마젤은 2008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평양에서 공연한 바 있다. 한국전쟁 당시 전투가 치열했던 철원을 배경으로 작곡된 가곡 ‘비목’을 부른 테너 심용석 씨는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이번 음악 공연으로 북한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버지니아 캐슬톤에서 열린 인권 음악회에 출연한 테너 심용석 씨와 함께한다.
심용석 씨에게 어떤 계기로 캐슬톤 북한인권개선을 촉구하는 음악회에 가게 됐는지 물어봤다.
심용석: 1년 전에 버지니아 패어팩스에 있는 투르노 교회에서 A NIGHT OF HOPE 공연, 즉 북한 인권을 위한 북한 탈북자들을 위한 공연을 SALT 오페라단이 주관해서 처음으로 가졌어요. 이 공연에 샤토빌재단 로린 마젤의 아들 오손 마젤이 직접 공연에 참가했습니다. 오손 마젤은 이 팀이 캐슬톤 공연을 했으면 참 좋겠다. 그래서 캐슬톤 페스티벌 2014년 첫 번째 공연을 SALT(Sharing Aiding Loving Together, 다국적 음악인들로 구성) 오페라단을 초청하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참가하게 됐습니다.
이번 캐슬턴 음악회에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소개해 달라고 했다.
심용석: 북한 인권을 위한 그리고 각 나라의 전쟁에 대한 느낌으로 주제를 잡았으면 좋겠다 해서 저희들은 각 나라에 해당하는 전쟁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 걸로 노래 선곡을 했고 물론 한국 전쟁이 가장 중심이 되는 상황이었지요. 이 음악회 프로그램에 탈북자 그레이스 조가 와서 직접 증언을 했고 이어 제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고 비목을 불렀습니다.
심용석 씨는 이렇게 미국에서 미국인들에 의해 북한인권개선을 위해 힘쓰는 것을 보고 감격하게 됐다고 설명해준다.
심용석: 로린 마젤이 설립한 새토빌재단이 주관한 음악회에서 북한인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세계적인 최고의 음악가가 북한인권에 관심을 갖는다는 자체가 이 지역에서 북한인권에 관심을 갖게하는 파급효과가 있었고요. 또한, 캐슬톤 페스티벌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가 노래를 부르는 영광도 갖게 됐고요. 그래 저는 아주 좋은 무대라고 생각했고, 감격스러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항상 우리가 한인사회에서도 북한인권과 관련한 행사들을 하지만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한국 커뮤니티가 아닌 미국인이고 또 권위 있는 샤토빌 재단이 주관하는 음악회에 미국인들이 참가해 북한인권에 관해 관심을 가졌다는데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심용석 씨에게 언제부터 북한인권개선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참여하게 됐는지 물어봤다.
심용석: 2010년도에 이 지역에 흑인영가를 부르는 크리스천 미션 그룹이 있는데, 한국에 탈북이주민을 돕는 단체로부터 초청을 받고 저도 함께 가게 됐어요. 그래 서울에 있는 큰 교회들 10군데를 3주에 걸쳐서 공연을 하고 왔습니다. 그 공연을 통해서 아! 이렇게 한국에 탈북자들이 많이 있구나! 그리고 한국에 적응 하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고 느끼고 미국에 돌아와서 그다음 해에 이뤄진 게 탈북 청소년을 돕기 위한 ‘희망나눔 콘서트 독창회”를 하게 됐지요. 박선영 전 국회의원이 물망초라는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그런 시점이어서 딱 9월 22일 공연했는데, 9월 22일 물망초 대안 학교가 설립된 날입니다. 2012년 9월 22일이 물망초 대안학교가 설립되는 것을 기념해서 워싱턴 일원에서 탈북 청소년을 돕는 독창회를 하게 됐고, 여기서 나온 수입금들을 공연 마치고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러 공연들은 많았지만, 북한자유연합 돕기 ‘A NIGHT OF HOPE’ 공연, 캐슬톤 페스티벌 공연을 하게 됐는데 계속해서 북한 인권과 관련한 행사로 이어지게 됐네요.
심용석 씨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립음악대학 최고 과정 오페라 과를 졸업한 바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하게 된 동기를 물어봤다.
심용석: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2000년도에 유럽 오스트리아로 갔는데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둘째가 4살 남자아이와 함께 가족이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사실 가족을 데리고 유학길을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립음대를 사실 제 나이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연히 유학길 1년 전에 여행차 비엔나를 갔다가 얼떨결에 오디션을 했는데 비엔나 국립음대에서 저를 원해서 오페라 과에 작품 주인공 역을 맡아서 PICK UP 하는 식으로 입학하게 됐습니다.
심용석 씨에게 성악가로서 유럽에서 활동한 이야기도 들려달라고 했다.
심용석: 비엔나 국립음대 3년을 졸업하고 졸업장을 가지고 3년 뒤에는 린스 오페라 극장에 바로 취직이 됐습니다. 그래 4년 동안 오스트리아 린스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에 오게 됐지요.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이뤄지는 오페라 작품이나 여러 가지 연주를 하면서 음악인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지요. 저의 첫 번째 공연 작품인 일 트로 바토레( IL TRO VATORE)인데 이 작품은 헝가리에서 2002년도에 출연했는데 그러니까 제가 유럽을 가서 처음으로 주인공 역을 맡고 헝가리 여름 페스티벌에 초청이 돼서 8회 공연을 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하면서 60일 동안 가족들과 함께 체류하면서 공연을 했는데 저의 첫 작품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지요.
심용석 씨에게 유럽생활에서 어떤 기쁨이 있었는지 회고해 달라고 했다.
심용석: 제가 늦은 나이에 비엔나 국립음악대학을 졸업하는 시점, 바로 졸업장을 받는 그때가 가장 내 마음속에 기쁨을 가졌지 않았나! 뭐 사실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런 걸 보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유럽 생활을 하는 가운데 큰 축복으로 이뤄주시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그다음에 유럽 생활을 하면서 또 하나의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저희들 가족입니다. 가족이 참 남편 따라 공부를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이 가족들이 고생을 하면서도 자녀들이 건강하고 밝게 잘 자라줘서 너무너무 감사한 그런 기쁨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들 이야기도 들려달라고 했다.
심용석: 저의 처도 유럽에서 피아노 공부를 마쳤고요. 지금은 저와 같이 같은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피아노 지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이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올 때가 13세였거든요. 오스트리아에서 14세 이하 수영의 평형에서 오스트리아 챔피언을 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미국 와서 14세 때 미국 전역에서 13세 14세 나이의 수영대회에서 1등 2등 6등의 어워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 수영선수로 활동하고 있고요. 둘째 심규찬은 고등학교 10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심용석 씨가 성악을 하게 된 동기는 교회 성가대대원이 되고자 한데서 시작됐다고 한다.
심용석; 사실은 제가 음악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저는 제 친구 중에 음악을 하는 몇 명의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 친구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아니! 노래하는 것은 여자들이 하지 거지 남자들이 하는 것 아니야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제가 사관학교 시험을 쳐서 군인이 되고자 하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관학교 시험 3차 시험에서 떨어져서 마지막 막바지에서 학교를 결정하는 단계에서 저희 교회 성가대 지휘자가 너 성가대를 어렸을 때부터 하기를 원했는데 음대를 가라 그랬어요. 그때가 음악대학 실기 시험 치르기 딱 한 달 전 이었어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아! 음대를 가면 내가 성가대대원으로 오디션 없이 성가대를 할 수 있겠구나! 이런 단순한 마음에 저는 하나님 찬양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음대를 갈까 그래서 결정을 하고 음대 시험을 치른 거예요. 그런데 시험 치른 한 달 만에 합격이 됐어요. 그래 사실은 합격이 됐는데 실기 성적이 한달 연습해서 특별히 좋을 수가 없지요. 그때는 입학생을 뽑을 때 실기 성적 40%, 내신성적 20%, 학력고사 40% 공부가 60% 비중이 컸었어요. 그래 공부에 덕을 보면서 사실 입학이 이루어졌어요. 그래 입학해서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사실 노래하는데 상당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학 3학년 시점에 정말 좋은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선생님에게 배우면서 목소리가 터지고 발성적으로 제대로 배우게 되고 그때부터는 대학 졸업하는 시점에 실기 성적은 1등으로 졸업하게 되는 영광을 갖게 됐지요.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버지니아 캐슬톤에서 열린 인권 음악회에 출연한 테너 심용석 씨와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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