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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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 워싱턴 일원에서 지난 27년여 동안 한인들과 피와 땀이
있는 현장에서 발로 뛰며 봉사해온 한인 ‘정세권의 워싱턴 삶의 현장 2부’를 함께한다.
미국 워싱턴 DC 일원 한인사회에서 정세권 씨는 일명 발로 뛰는 ‘억척스런 봉사자’로
불리며 현재는 2세들의 정치력 신장에 힘쓰는 미주 한인재단 전국 총회장으로 봉사
하고 있다. 정 씨는1992년 워싱턴지구 한인회장에 당선된 이후 본격적인 봉사를
시작하게 된다. 그가 한인회장에 당선된 이후 지난 1986년 한인회장 선거
후유증으로 3개 단체로 파생된 한인회를 하나로 합할 수가 없을까 고심했다.
정 씨의 당시 이야기다.
정세권: 왜냐하면, 우리야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필요한데, 그래서 제가 시작한
일이 한인들에게 한인회의 역할, 이것을 알려주고 한인회에서 하는 일을 전해주기
위해서 한인회보를 발간하게 됐지요.
정세권 씨는 당시 한인회보를 발간하면서 한인들로부터 호응을 받기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워싱턴 한인들의 이민역사의 귀중한 자료를 찾고, 한인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이것이 바로 워싱턴 한인들의 이민 역사가 담긴 워싱턴 한인사로 발전해 가게 된다.
정세권: 한인 이민역사의 자료 확보는 회보를 통해 알려줘서, 각 사람이 가진 자료
수집하면 워싱턴 한인사를 발간할 수 있지 않느냐 해 당시 회보 담당으로 언론에
종사했던 채영창 씨가 제의 해 기꺼이 그렇게 합시다.
정세권 씨는 한인회보로 한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귀중한 이민사인
워싱턴 한인사의 발간을 하게 됐다고 설명해 준다.
정세권: 한인회보를 3개월에 한 번씩 내면서 한인회비 납부 명단이 회보에 나가고
해서 한인사회와 한인회가 굉장히 가까워 지게 되고, 이민 역사 책이라 할 수 있는
워싱턴 한인사를 그 당시 발간하게 됐지요.
정세권 씨가 워싱턴지구 한인회장으로 있을 당시 한인들이 많이 사는 LA지역에
폭동이 일어나자 워싱턴에도 폭동의 여파가 미칠 것을 염려해 긴급히
한인안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정세권: 그때 1992년도에 4.29 LA 폭동이 일어났어요. 4 29폭동 이후에
이쪽(워싱턴)에도 우연한 일치인지는 모르지만은 흑인들의 한인상가 강도, 그때
한해에 10여 명 가까이 권총 강도로 인해서 목숨을 잃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한인안전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DC 시장 경찰국장하고 한 달에 한 두 번씩 안전을
위한 회의를 하고.
정세권 씨는 당시 언론에 LA폭동이 한-흑 갈등으로 비춰지는 것을 우려해 강력히
항의 했다고 전한다. LA 폭동에 이어 워싱턴에서도 위기의 순간이었다고 당시를
증언해 준다. 정 씨의 이야기다.
정세권: 한인들이 계속해서 피해를 당하는 것이 언론에 보도되고 하니까 이것이
한-흑 갈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그래서 언론에서 그런 방향으로 몰고 나가려고
해 ‘그것이 아니다.’ 왜냐면 한국사람들이 스몰 비지니스를 많이 하다 보니까
‘그렇지’ 그리고 한국사람들 정말 열심히 일하는데, 안전을 지켜줄 당국에서 그런
안전장치를 안 해 줬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 아니냐? 경찰에 항의하고,
시장실에 가서 어떻게 강도들이 설칠 수 있도록 방치하느냐! 또 실업자들이 먹고
살길이 없어서 그런 짓을 하는데 왜 직장도 안주고 그리고 거리에서 그들이
활보할 수 있도록 나 두었느냐! 경찰은 뭐 하느냐! 이런 식으로 언론에도 그런
점을 주입시켜서 이것이 한 흑 갈등이 아니라 잘못된 정책 때문에 일어난 일로서,
자칫 한-흑 갈등으로 비춰져 서로 대결하는 식으로 나갔다면 이민자(한인)들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그런 그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정 씨는 워싱턴 한인사가 워싱턴 일원의 한인들의 뜨거운 사랑과 참여로
발간되어다고 이야기한다.
정세권: 처음에 한인사를 만든다고 하니까 별로 관심을 안 뒀어요. 처음에는 미미
했는데, 이제 그 자문단을 구성하고 원로급들 그 당시 생존해 계신 최제창 박사,
박원규씨 등 정말 원로 분들이 자기들 생존할 때 한인역사를 담은 책이 나온다면
자기들이 가진 자료들을 기꺼이 내주겠다 이렇게 해서 그분들이 많이 후원해주고
또 기부금을 내는 분들의 명단을 그 당시 워싱턴 한국일보가 유일하게 일간지로
배달 됐는데 한국일보의 협력을 받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한인사 발간 기금 내신
분들의 명단이 나감으로써 많은 분들이 동조를 많이 했어요. 아! 이런 분도
50-100불 내는데 나도 내야지 그래서 아주머니들도, 나이 드신 분도, 젊은 분도
참여해줘서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기부금이 모였습니다.
워싱턴 한인사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120년간의 워싱턴 한인 이민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설명해준다.
정세권: 워싱턴은 1883년 9월 15일에 보빙 사절단이 민영익 단장을 중심으로
해서 보빙 사절단이 처음으로 워싱턴에 도착한 날부터 해서 1993년까지 한인들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겼는데요. 그때에는 정식으로 이민 온 것은 아니지만,
한미외교가 1882년에 수립이 되어서 1883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민
온 것은 그 뒤 20년 후인 1903년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 이민이
이민의 공식적인 이민인데 그 당시 하와이로 왔지마는) 워싱턴 지역에는 간혹
정부에서 외교관계로 오신 분들 그다음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사실 유학생도
많지 않았지요) 그렇게 해서 한인들이 살았는데, 해방되기 전에 일제하에 있을 때
독립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곳이 하와이를 비롯해서 워싱턴 구미위원부(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미외교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외교담당기관)도 여기 있고 해서 지난 120여 년 동안에 어떻게 오늘의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는지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정세권 씨는 2001년 3월 동경에서 해외 한민족 대표자 회의에 참석해 하와이에서
이민 100주년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워싱턴에서도 100주년 행사를 위해
준비를 한다.
정세권: 이민 100주년이 2003년인데요. 저희가 발기인 대회를 열고 원로들의
의견을 들어보니까 워싱턴에도 100주년이 되면, 기념행사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이뤄져 워싱턴 1세라고 할 수 있는 90대 이상 되신분을 비롯해 젊은
1.5세 포함해 워싱턴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만들었지요. 그때 회장으로 박윤수
박사님을 모시고 그 당시 최제창 박사님, 김웅수 교수님, 정규섭 대사님 등
원로들이 전부 고문으로 참여해 2003년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10대 사업을
선정했고, 우리 한인들의 위상이 100주년을 맞이해 비로소 주류사회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정 씨는 당시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2003년 100주년 기념 전국만찬 행사를 하게
되고 또 10대 사업을 선정해 이민자로서 새로운 도전자로서 기틀을 마련해 가기로
한다. 정 씨의 이야기다.
정세권: 10대 사업을 보면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은 고종황제
때 2만 5천 달러를 주고 산 건물이 한일 합방 직전에 단돈 5달러에 일본에 빼앗긴
적이 있어요. 그래 그걸 우리가 다시 사서 우리 후손들에게 교육목적으로
재매입하자는 것과 변수가 한인으로서 처음 미국 정규대학에서 공부를 한 학생인데
메릴랜드에 묘소가 있는데 그 묘소를 미화 작업하는 것, 이민 유적지가 여기 많이
있는데 그걸 발굴 해서 우리 후손들이 알 수 있도록 발굴 추진하는 것 그리고
100주년 기념 전국만찬행사 한국에서 450명의 축하방문단 등 1,500여 명이 참석
했습니다. 우리가 2003년이 지나면 새로운 100년을 위해서 우리가 세워야 될 일들을
계속해서 해야 된다고 해서 미주한인재단을 설립하는 것 등으로 10대 사업을
선정하고 그 일을 하게 됐지요.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2003년에 워싱턴 DC에서 100주년 기념 전국 만찬을
하고 전국에서 모인 100주년 기념사업회 임원들이 모여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처음으로 이민선이 도착하는 그날을 ‘미주 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로
선정해 기념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안이 나와 그때부터 의회에 로비를 시작했으며
드디어 2005년 12월에 미국연방의회의 인준을 받게 됐다고 정 씨는 전해준다.
정세권: 미주 한인 이민자들이 지나간 1세기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 법률,
교육, 체육, 예술, 국방 등에 한인들이 이바지한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한인
이민선이 미국에 도착한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로 기념하게 돼서 5회째로
기념행사를 했는데요. 미국에 270여 소수민족 가운데 이렇게 자체 기념일을
가진 것은 미주 한인이에요.
워싱턴 한인사 영문판은 미주 한인재단 워싱턴지부 이규원 번역위원장의
역할이 컸다. 이규원씨는 2008년 1월 초 번역을 시작해 하루 3-5시간 번역
작업에 임하면서 부담도 많았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적지 않아 사명감으로
일했다고 전한다. 2009년 9월 드디어 영문판이 출간됐다고 정세권 씨는
자랑스러워 한다.
정세권: 영문판이 연방국회 도서관에도 배치가 되어 있고 앞으로 점차 공공
도서관에도 배치할 계획인데, 우리 한인 후세들이 우리의 뿌리를 아는데 좋은
자산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세권 씨는 지난 2009년 미주 한인재단 전국총회장을 맡게 된다.
미주 한인재단의 가장 큰 목적중의 하나가 한인 2세들의 정치력 향상이다.
그래서 정치 지망생을 위한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세권: 전국적으로 현재 28개 지회가 있습니다. 미주 한인재단의 중점적
사업이 차세대들이 어떻게 미 주류사회에 진출할 수 있느냐, 예를 들어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직에는 많이 진출하여 있는데 정계에는 아직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 이민 1세로서 김창준 연방하원을 지낸 분도 계시고 또 오래곤 주의 임용근
의원, 그리고 신호범 의원 등 몇 분 이외에는 각 지역에서 시의원 한다든지 시장도
몇 분 계시지마는 정계진출은 미약하기 때문에 정치력 신장을 위해서
정치지망학생들을 위한 장학제도를 좀 더 활성화 시켜 많은 우리 후세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정 씨는 한인 이민자도 앞으로 반세기 내에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큰 희망으로
한인 2세, 3세들을 돕자고 제안한다.
정세권: 지난해 버지니아 주 하원으로 1.5세인 마크 김이 당선됐는데요. 버지니아
주 의회 400년 역사에 처음으로 아시안 출신 의원이 탄생됐습니다.자라나는 한인
1.5세 2세들은 미국 국가 건설에 이바지 할 Korean American입니다. 앞으로
마크 김 같은 2 3세들이 나오고 또 연방 하원 상원이 되고 앞으로 반세기 내에
한국계 미국 대통령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지원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큰 희망을 안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 워싱턴 일원에서 지난 27년여 동안 한인들과 피와
땀이 있는 현장에서 뛰며 봉사해온 한인 ‘정세권의 워싱턴 삶의 현장 2부’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있는 현장에서 발로 뛰며 봉사해온 한인 ‘정세권의 워싱턴 삶의 현장 2부’를 함께한다.
미국 워싱턴 DC 일원 한인사회에서 정세권 씨는 일명 발로 뛰는 ‘억척스런 봉사자’로
불리며 현재는 2세들의 정치력 신장에 힘쓰는 미주 한인재단 전국 총회장으로 봉사
하고 있다. 정 씨는1992년 워싱턴지구 한인회장에 당선된 이후 본격적인 봉사를
시작하게 된다. 그가 한인회장에 당선된 이후 지난 1986년 한인회장 선거
후유증으로 3개 단체로 파생된 한인회를 하나로 합할 수가 없을까 고심했다.
정 씨의 당시 이야기다.
정세권: 왜냐하면, 우리야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필요한데, 그래서 제가 시작한
일이 한인들에게 한인회의 역할, 이것을 알려주고 한인회에서 하는 일을 전해주기
위해서 한인회보를 발간하게 됐지요.
정세권 씨는 당시 한인회보를 발간하면서 한인들로부터 호응을 받기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워싱턴 한인들의 이민역사의 귀중한 자료를 찾고, 한인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이것이 바로 워싱턴 한인들의 이민 역사가 담긴 워싱턴 한인사로 발전해 가게 된다.
정세권: 한인 이민역사의 자료 확보는 회보를 통해 알려줘서, 각 사람이 가진 자료
수집하면 워싱턴 한인사를 발간할 수 있지 않느냐 해 당시 회보 담당으로 언론에
종사했던 채영창 씨가 제의 해 기꺼이 그렇게 합시다.
정세권 씨는 한인회보로 한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귀중한 이민사인
워싱턴 한인사의 발간을 하게 됐다고 설명해 준다.
정세권: 한인회보를 3개월에 한 번씩 내면서 한인회비 납부 명단이 회보에 나가고
해서 한인사회와 한인회가 굉장히 가까워 지게 되고, 이민 역사 책이라 할 수 있는
워싱턴 한인사를 그 당시 발간하게 됐지요.
정세권 씨가 워싱턴지구 한인회장으로 있을 당시 한인들이 많이 사는 LA지역에
폭동이 일어나자 워싱턴에도 폭동의 여파가 미칠 것을 염려해 긴급히
한인안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정세권: 그때 1992년도에 4.29 LA 폭동이 일어났어요. 4 29폭동 이후에
이쪽(워싱턴)에도 우연한 일치인지는 모르지만은 흑인들의 한인상가 강도, 그때
한해에 10여 명 가까이 권총 강도로 인해서 목숨을 잃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한인안전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DC 시장 경찰국장하고 한 달에 한 두 번씩 안전을
위한 회의를 하고.
정세권 씨는 당시 언론에 LA폭동이 한-흑 갈등으로 비춰지는 것을 우려해 강력히
항의 했다고 전한다. LA 폭동에 이어 워싱턴에서도 위기의 순간이었다고 당시를
증언해 준다. 정 씨의 이야기다.
정세권: 한인들이 계속해서 피해를 당하는 것이 언론에 보도되고 하니까 이것이
한-흑 갈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그래서 언론에서 그런 방향으로 몰고 나가려고
해 ‘그것이 아니다.’ 왜냐면 한국사람들이 스몰 비지니스를 많이 하다 보니까
‘그렇지’ 그리고 한국사람들 정말 열심히 일하는데, 안전을 지켜줄 당국에서 그런
안전장치를 안 해 줬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 아니냐? 경찰에 항의하고,
시장실에 가서 어떻게 강도들이 설칠 수 있도록 방치하느냐! 또 실업자들이 먹고
살길이 없어서 그런 짓을 하는데 왜 직장도 안주고 그리고 거리에서 그들이
활보할 수 있도록 나 두었느냐! 경찰은 뭐 하느냐! 이런 식으로 언론에도 그런
점을 주입시켜서 이것이 한 흑 갈등이 아니라 잘못된 정책 때문에 일어난 일로서,
자칫 한-흑 갈등으로 비춰져 서로 대결하는 식으로 나갔다면 이민자(한인)들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그런 그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정 씨는 워싱턴 한인사가 워싱턴 일원의 한인들의 뜨거운 사랑과 참여로
발간되어다고 이야기한다.
정세권: 처음에 한인사를 만든다고 하니까 별로 관심을 안 뒀어요. 처음에는 미미
했는데, 이제 그 자문단을 구성하고 원로급들 그 당시 생존해 계신 최제창 박사,
박원규씨 등 정말 원로 분들이 자기들 생존할 때 한인역사를 담은 책이 나온다면
자기들이 가진 자료들을 기꺼이 내주겠다 이렇게 해서 그분들이 많이 후원해주고
또 기부금을 내는 분들의 명단을 그 당시 워싱턴 한국일보가 유일하게 일간지로
배달 됐는데 한국일보의 협력을 받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한인사 발간 기금 내신
분들의 명단이 나감으로써 많은 분들이 동조를 많이 했어요. 아! 이런 분도
50-100불 내는데 나도 내야지 그래서 아주머니들도, 나이 드신 분도, 젊은 분도
참여해줘서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기부금이 모였습니다.
워싱턴 한인사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120년간의 워싱턴 한인 이민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설명해준다.
정세권: 워싱턴은 1883년 9월 15일에 보빙 사절단이 민영익 단장을 중심으로
해서 보빙 사절단이 처음으로 워싱턴에 도착한 날부터 해서 1993년까지 한인들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겼는데요. 그때에는 정식으로 이민 온 것은 아니지만,
한미외교가 1882년에 수립이 되어서 1883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이민
온 것은 그 뒤 20년 후인 1903년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 이민이
이민의 공식적인 이민인데 그 당시 하와이로 왔지마는) 워싱턴 지역에는 간혹
정부에서 외교관계로 오신 분들 그다음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사실 유학생도
많지 않았지요) 그렇게 해서 한인들이 살았는데, 해방되기 전에 일제하에 있을 때
독립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곳이 하와이를 비롯해서 워싱턴 구미위원부(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미외교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외교담당기관)도 여기 있고 해서 지난 120여 년 동안에 어떻게 오늘의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는지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정세권 씨는 2001년 3월 동경에서 해외 한민족 대표자 회의에 참석해 하와이에서
이민 100주년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워싱턴에서도 100주년 행사를 위해
준비를 한다.
정세권: 이민 100주년이 2003년인데요. 저희가 발기인 대회를 열고 원로들의
의견을 들어보니까 워싱턴에도 100주년이 되면, 기념행사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이뤄져 워싱턴 1세라고 할 수 있는 90대 이상 되신분을 비롯해 젊은
1.5세 포함해 워싱턴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만들었지요. 그때 회장으로 박윤수
박사님을 모시고 그 당시 최제창 박사님, 김웅수 교수님, 정규섭 대사님 등
원로들이 전부 고문으로 참여해 2003년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10대 사업을
선정했고, 우리 한인들의 위상이 100주년을 맞이해 비로소 주류사회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정 씨는 당시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2003년 100주년 기념 전국만찬 행사를 하게
되고 또 10대 사업을 선정해 이민자로서 새로운 도전자로서 기틀을 마련해 가기로
한다. 정 씨의 이야기다.
정세권: 10대 사업을 보면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은 고종황제
때 2만 5천 달러를 주고 산 건물이 한일 합방 직전에 단돈 5달러에 일본에 빼앗긴
적이 있어요. 그래 그걸 우리가 다시 사서 우리 후손들에게 교육목적으로
재매입하자는 것과 변수가 한인으로서 처음 미국 정규대학에서 공부를 한 학생인데
메릴랜드에 묘소가 있는데 그 묘소를 미화 작업하는 것, 이민 유적지가 여기 많이
있는데 그걸 발굴 해서 우리 후손들이 알 수 있도록 발굴 추진하는 것 그리고
100주년 기념 전국만찬행사 한국에서 450명의 축하방문단 등 1,500여 명이 참석
했습니다. 우리가 2003년이 지나면 새로운 100년을 위해서 우리가 세워야 될 일들을
계속해서 해야 된다고 해서 미주한인재단을 설립하는 것 등으로 10대 사업을
선정하고 그 일을 하게 됐지요.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2003년에 워싱턴 DC에서 100주년 기념 전국 만찬을
하고 전국에서 모인 100주년 기념사업회 임원들이 모여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처음으로 이민선이 도착하는 그날을 ‘미주 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로
선정해 기념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안이 나와 그때부터 의회에 로비를 시작했으며
드디어 2005년 12월에 미국연방의회의 인준을 받게 됐다고 정 씨는 전해준다.
정세권: 미주 한인 이민자들이 지나간 1세기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 법률,
교육, 체육, 예술, 국방 등에 한인들이 이바지한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한인
이민선이 미국에 도착한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로 기념하게 돼서 5회째로
기념행사를 했는데요. 미국에 270여 소수민족 가운데 이렇게 자체 기념일을
가진 것은 미주 한인이에요.
워싱턴 한인사 영문판은 미주 한인재단 워싱턴지부 이규원 번역위원장의
역할이 컸다. 이규원씨는 2008년 1월 초 번역을 시작해 하루 3-5시간 번역
작업에 임하면서 부담도 많았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적지 않아 사명감으로
일했다고 전한다. 2009년 9월 드디어 영문판이 출간됐다고 정세권 씨는
자랑스러워 한다.
정세권: 영문판이 연방국회 도서관에도 배치가 되어 있고 앞으로 점차 공공
도서관에도 배치할 계획인데, 우리 한인 후세들이 우리의 뿌리를 아는데 좋은
자산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세권 씨는 지난 2009년 미주 한인재단 전국총회장을 맡게 된다.
미주 한인재단의 가장 큰 목적중의 하나가 한인 2세들의 정치력 향상이다.
그래서 정치 지망생을 위한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세권: 전국적으로 현재 28개 지회가 있습니다. 미주 한인재단의 중점적
사업이 차세대들이 어떻게 미 주류사회에 진출할 수 있느냐, 예를 들어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직에는 많이 진출하여 있는데 정계에는 아직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 이민 1세로서 김창준 연방하원을 지낸 분도 계시고 또 오래곤 주의 임용근
의원, 그리고 신호범 의원 등 몇 분 이외에는 각 지역에서 시의원 한다든지 시장도
몇 분 계시지마는 정계진출은 미약하기 때문에 정치력 신장을 위해서
정치지망학생들을 위한 장학제도를 좀 더 활성화 시켜 많은 우리 후세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정 씨는 한인 이민자도 앞으로 반세기 내에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큰 희망으로
한인 2세, 3세들을 돕자고 제안한다.
정세권: 지난해 버지니아 주 하원으로 1.5세인 마크 김이 당선됐는데요. 버지니아
주 의회 400년 역사에 처음으로 아시안 출신 의원이 탄생됐습니다.자라나는 한인
1.5세 2세들은 미국 국가 건설에 이바지 할 Korean American입니다. 앞으로
마크 김 같은 2 3세들이 나오고 또 연방 하원 상원이 되고 앞으로 반세기 내에
한국계 미국 대통령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지원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큰 희망을 안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 워싱턴 일원에서 지난 27년여 동안 한인들과 피와
땀이 있는 현장에서 뛰며 봉사해온 한인 ‘정세권의 워싱턴 삶의 현장 2부’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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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탈북 역경 딛고 '용기있는 국제여성상' 수상한 이애란 박사 (0) | 2010.03.14 |
[세계의 한국인] 미주 한인재단 정세권 전국 총회장 ① '워싱턴 DC의 억척스런 봉사자' (0) | 2010.03.01 |
[세계의 한국인] 시라큐스대학 ‘천지인 풍물패’ 김재우 군 (0) | 2010.02.20 |
[세계의 한국인] 볼티모어 풍물패 '한판' 박춘기 상임고문 (0) | 2010.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