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의 한국인

지구촌의 한인들(북 남은 가족 찾는 알칸소대 김경수 교수)

방송듣기 오디오오디오 (다운받기)

 

미국 알칸소 주 알칸소 주립대학(농과대학) UA (University of Arkansas) 에서 한국인 최초로 대학교수가 돼 40년 가까이 교수로 미국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금은 은퇴하신 김경수 씨, 그는 한국전쟁 중 북한땅 고향 원산에 그리운 어머님과 동생 셋을 두고 남하했으며, 아버지와 위로 누님과 형님은 서울에 살아 만나게 됐지만, 그리운 어머님과 동생 셋은 지금도 북녘땅 어느 곳에 사는지 63년 동안 만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지금도 애타게 찾는 가족들은 당시 북한땅 강원도 원산시 석우리 189번지에 주소를 둔 1907년생 이순임 어머님, 여동생 74살의 김의수 씨, 여동생 69살의 김은수 씨, 남동생 64살의 김시수 씨이다. 김경수 교수가 북한에 가족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을 애타게 찾는 재미동포 전 알칸소 농과대학 교수의 이야기로 함께한다.

 

먼저 김경수 씨가 해방 전 살던 곳과 생활형편에 대한 이야기 들어보자! 고향은 경기도 개성시 고려동 228번지이고 형님 김해수 박사는 당시 송도 중학교 졸업, 누님 김창수 씨는 호수돈 여고, 아래로 여동생 둘은 고려 국민학교 학생, 김경수 씨도 고려 국민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김경수 교수: 고향은 개성이에요. 개성서 살다가 우리 아버지께서는 의사셨어요. 원산에서 개업하셔서 우리가 해방되자마자 원산에 갔어요. 우리 형님 누님은 그 당시 서울에서 학교 다녔으며, 누님은 서울 약대를 형님은 의과 대학을 다니게 돼서 서울에 남겨 놓고 저희들은 원산에 갔어요. 원사서 살면서 625까지 있었지요.

김경수 씨는 나이 많은 아버지가 북한군에 징집되면서 남은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 이야기다.

김경수: 제 나이가 15살인가 16살이었는데 그때 어머님을 모시고 누이동생 둘, 새로 갓난아이 막내동생이 젖을 먹고 있었는데 손수레를 사서 거기다가 쌀하고 어머니와 막내를 싣고서 덮어놓고 시외로 빠져 가는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다들 가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동네 사람들을 따라서 간 곳이 강원도 두메골 박천이라는 촌에 정착하게 됐지요.

김경수 씨는 얼마 안 있으면 전쟁이 끝나고 서울에서 학교 다니시는 형님과 누님과 같이 평화스럽게 살겠다 싶었는데, 그때 마침 중공군 개입으로 우리 국군이 평양 압록강까지 점령한 것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고 들려준다.

김경수 박사: 국군과 유엔군이 원산까지 후퇴해 왔는데 사실인가! 꿈인가! 그래서 하도 무서워서 원산 시민의 제가 생각키로는 원산 시민의 거의 70-80%가 해안가로 가서 미군 군용배(LST)가 우리를 피난시킨다고 하여 그 배를 탄다고 해안가로 갔지요. 보니까? 해안가 멀리에 배가 두 대가 있어요. 그 당시 하도 혼란하니까? 우리 국군 헌병이 공중에 총을 쏘면서 우리는 절대로 피난 안 가니까? 집에 들어가서 편히 있으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 밤 12시가 가까워서 우리는 부두에 나왔다가 우리 어머님하고 동생 셋하고 다시 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는데 라디오에서도 동네 사람들도 시끌시끌하고 해서 마음을 못 놓고…

당시 어머니는 중공군 개입으로 어려움이 닥칠 것을 생각해 김경수 씨에 남한으로 내려가도록 종용했다고 한다. 미군 흑인 상사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한다.

김경수: 제 어머니가 마지막 하신 말씀이 얘! 경수야 너는 나이가 16살로 지금 중공군이 들어와서 북한이 다시 들어오면 너는 틀림없이 인민군에 끌려갈 테니까 어떻게든지 부두에 다시 한 번 가서 현지사정을 보라고! 그래서 어머니한테 한번 그래보지요 하고 제가 부두에 나가 보니까 부두에 조그마한 미군 쾌속정들이 와서 부두에 서 있는 사람들을 LST로 싣고 가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 동네사람들이 피난하는 게 틀림없구나. 그러나 집에 갔다 다시 부두에 나온 사람들도 역시 넘치게 많아서 배를 타는데 아비규환이에요. 이루 형용할 수 없고 아이 잃어버린 사람, 남편 잃어버린 사람, 자식들 잃어버린 사람들로 대혼란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밀려서 밀려서 바닷가에 뚝 떨어졌어요. 그래 허우적 허우적 거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내려 놓는데 미군 쾌속정 배였어요. 흑인 상사인데 이 배에 저를 태우면서 자기 외투를 덮어주면서 큰 배(LST) 가서 히터 있는 곳에서 말려 주더라고요.

김경수 씨는 부산에 와 인민군에 끌려가신 것만 알았던 아버지를 뜻밖에 만나게 된다.

김경수: 배가 부산에 도착했지요. 부산에 도착하니까? 부산 부두에서 우리를 피난민 수용소로 가도록 안내한데요. 그래 내리고 있는데, 아!아! 뜻밖에도 우리 아버님이 거기 기다리고 계시더라고요. 뉴스에서 원산서 배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배가 부산항에 도착한다는 것을 들으시고 혹시나 하고 와 계신 거예요. 그래 아버지를 붇잡고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 아버님은 인민군이 보낸 전선 일선이라는 곳이 개성 근방이었데요. 외가 쪽이지요. 외가댁에 들어가셔서 장모님(우리 외 할머님)한테 설명하고는 거기서 인민군 복을 태워버리고 민간 사복으로 입고 나오셨어요. 나오셔서 자유를 찾은 거지요.

그래 남한에서 아버님은 개업하시고 형님도 군의관, 누님은 서울약대를 나와 약제사로 넉넉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2주일 후면 온 가족이 합칠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알칸소 대학으로 유학오게된 이야기다.

김경수: 저는 대구에서 피난지 고등학교를 나오고 거기서 피난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군에 지원 입대해서 병역의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온 게 1960년, 그러니까? 419 직전에 제가 한국을 떠났어요. 그래 미국에 오자마자 알칸소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제가 알칸소 대학에 오게된 경위도 어머니가 개성 홀스톤에서 교편생활 하실때에 미국에서 오신 선교사가 계셨는데 그분이 미스 다어라(Dyer)고 알칸소에 계신 분이에요. 그분이 권유를 해서 알칸소에 오게 된 거예요.) 그래 알칸소에 와 보니까? 벌써 내 책상위에 이북에서 책자가 와 있어요. 그만큼 북한은 남한 동정을 자세히 알고 내가 도착해보니까? 사이언틱 관련 이라는 과학 서적인것 처럼 가장해 보내와 내 책상위에 있더라고요. 그래 열어보니까? 김일성 사진이 든거고 북한이 잘 산다는 선전 책자를 받은 기억이 나요. 그게 1960년도에요.

김경수 씨는 1960년에 미국에 와 알칸소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를 하고, 1964년에 누나의 소개로 결혼했으며, 역시 부인도 미국에서 공부해 지금은 두분 다 정년 퇴직해 알칸소 주에 살고 있다. 그러나 63년여 동안에 가족 찾기에 나섰으며 각종 이산가족 상봉 단체에 희망을 걸고 가족 착기에 나섰단다.

김경수: 이제까지 저는 북한에 있는 어머님과 동생들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벼라별 일을 다 했어요. 60년 이후에 온 후로 아직까지 한국 신문을 보고 있어요. 신문을 보는 이유 중의 하나가 혹시 이북에 있는 이산가족을 찾을 수 있는 소식이 있지 않을까? 해 신문을 보고 있는데 그 여러 신문에 뉴욕, 캐나다, 로스앤젤레스 등 여러곳에서 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라는 조직을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 활동했어요. 그래 제가 전화를 걸어 내 사정을 이야기 하면, 가족의 자세한 내용 어머님과 동생 셋의 생년월일 어디서 살았고 언제 헤어졌고, 나는 미국에서 뭘하고, 내 주소는 어디고 자세하게 적어 보내달라고 해 그걸 수십장 수백장 만들어서 이산가족 관련 기관에 전했지요. 그 기관들에서는 지금 찾고 있노라!라는 연락을 여러번 받았어요. 그러나 결국은 마무 곳에서도 찾았다는 연락은 못 받았어요.

김경수 교수는 학술대회 참석차 중국을 방문했을때 베이징에 북한대사관까지도 찾아가 자신의 가족을 찾아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김경수: 베이징에 북한대사관이 있다고 하여 이북 대사관을 한 번 찾아가보자! 는 계획을 하고 중국에서 가이드 해주던 저의 제자 동생부부가 베이징에 살고 있어 이들과 의논하여, 저희 부부가 북한대사관에 갈때, 혹시나 해서 밖에서 우리를 지켜달라고 해 놓고, 북한대사관에 들어가 영사부장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제가 준 이산가족 내용을 자세히 보더니 이렇게 자세히 기록했는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가족을 찾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며 자기들이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마찬가지로 몇차례 연락했지만 못 찾았노라라는 답장 밖에는 못 받았어요.

김경수 교수는 외삼촌으로부터 어머니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김경수: 북한으로 치면 우리 가족들은 일등 반동 가족이니까 어디 수용소에 갇히셨다가 돌아가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별아별 생각이 다 드는데 풍문에 우리 어머님이 원산에 계시다가 전쟁이 나고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지고 나니까 아이들을 데리고 개성 외가로 가서 사신다는 이런 풍문은 들었어요. 그러나 사실인지 모르지만, 강화에서 어떤 사람이 그래요 개성과 강화가 가까워서 비밀로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있는데 외삼촌이 그런 소식을 들으셨다고 저에게 말해 주신 적이 있어요.

김경수 교수에게 고향에 대한 이야기 들려달라고 했다.

김경수: 그래! 원산은 아시잖아요. 명사심리, 내 동생들하고 명사심리 백사장에 가서 발로 모래를 헤치면 조개가 나와요. 그 조개를 한 바켓스 가져와 국 끓여먹던 생각이 나고, 저는 어머님 생각이 그렇게 간절해요. 우리 어머님은 고생 고생 하시며 우리 6남매를 다 키워 놓으시고 지금 한창 호강하실때에 그 호강을 받지 못하시고 더 고생 고생만 하시다 가셨어요.

김경수 씨는 어머님이라고 불러보는 것이 소원이란다.

김경수: 우리 형님이 70살에 돌아가실때까지도 어머님 어머님 그저 어머님 하셨는데 저는 지금 80인데도 어머님이라고 불러보지 못했어요. 그저 엄마 였었지. 아마 지금도 만약 내가 어머니를 만나 뵌다면, 100살이 지나신 어머님을 엄마라고 부를 거예요. 그래서 내 소원은 죽기전에 엄마를 어머님이라고 한번 불러 보는 것 이었는데, 그 저의 소원을 풀어 주시지 못하시고 가셨어요. 그래서 내 생전에 내 어머님을 뵙고 어머님이라고 불러 본 일이 아직까지 없어요. 그래 저의 형님하고 저는 모든 것을 저희들 자식들을 위하여 희생하시던 어머님이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게 안타깝고 안타깝고, 그래서 그게 저희 형제들의 제일 큰 한이어서 그 어머니와 같이 살았을 때에 어머님이 손수 해 주시던 음식이 지금도 간절히 생각나고, 우리 외가는 개성이에요. 우리 어머님은 개성에서 자라셨고 학교도 그곳에서 다니셨어요.

김경수 교수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 고향 가까운 곳에 뿌려 줄것을 유언으로 남기려고 한다고 들려준다.

김경수: 우리 부부가 한국에 가서 어디를 갔느냐 하면 통일 전망대를 갔었어요. 통일 전망대를 통하여 북쪽을 보니 해금강이 보이더군요. 해금강에는 제가 북한에 있을때 원산에서 항상 방학때 놀러가던 곳이에요. 거기에는 고저라는작은 동내가 있어요. 고저에는 청석정이라는 유명한 바위도 있고, 송도 농원은 저희들 소유의10만평 과수원이 있었어요. 그래서 늘 놀러가 해금강에서 헤엄치던 곳을 볼 수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거길보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재를 해금강 우리 어머님과 내 동생들 가까이 있는 그 근처에 뿌리라고 그런 유언을 남기려고 해요.

김경수 교수는 은퇴하기 전 알칸소 대학에 장학금을 기탁하여 K. S. Kim Endowed Scholarship을 설정하여 일부 한국 농대 학생들이 그 장학금의 혜택을 받고 있고, 앞으로도 좀 더 증자하여 알칸소 대학에 오는 다른 전공자 한인 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이 갈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단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을 애타게 찾는 재미동포 전 알칸소 농과대학 교수의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