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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지구촌의 한인들(LA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정용봉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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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국군포로송환위 정용봉 회장.
사진제공-LA 국군포로송환위

 

미국에서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발로 뛰는 이가 있다. 바로 1958년 미국에 유학 와 S.I.U. (Southern Ill. University)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단보다는 실물경제에 뛰어든 실업가 정용봉 박사다. 정 박사는 625 당시 육군 소위로 임관과 동시에 최전방에서 전투 중 양구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수도 육군병원 (당시 마상에 주돈)에서 약 1년 치료 후 명예제대와 동시에 미국 유학 온 한국전 참전용사이다. 정 박사가 국군포로 송환에 발 벗고 나선 것은 1994년 국군포로로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도착해 귀환보고를 하는 조창호 소위를 TV에서 보고 그가 ‘북한에는 아직도 많은 국군포로들이 억류되어 있다’는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그 많은 억류되어있는 국군포로들 중에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보호해준 부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여러 전사 자료들을 읽고 북한에 많은 국군포로들이 아직도 많이 억류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2004년에 ‘LA 국군 포로 송환위원회’를 발족 시겼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국군포로 송환에 앞장서는 LA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정용봉 회장의 이야기로 함께한다.

정용봉 씨는 625전쟁 참전용사이다. 그는 625가 일어나자 미 25사단 보급창에서 통역으로 일하다 육군총합학교에 8기생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용봉: 한 두 달 훈련받고 최전방에 육군 소위로 배치됐는데 8사단에 배치되어 소대장 하다가 1950년 12월 29일경 부상 당했어요. 부상이 너무 심해서 사단 의무대에서 도무지 치료 못 하겠다고 해 후방에 후송되어 수도 육군 병원에 1년 가까이 치료하다 제대했어요. 전부터 미국에 유학 가는 것을 준비 중이었어요. 그래 제가 제대 후에 영어 공부를 더 해서 유학시험을 치르고 1958년에 미국에 유학 왔습니다.

정용봉 씨는 1994년 어느 날 한국 TV를 보니까? 어떤 노인이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육군 소위 조창호 지금 기대함을 보고 합니다.’라는 뉴스를 들었다고 한다.

정용봉: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들어보니까 625 때 포로가 됐다가 그분이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와서 귀환보고를 하는 거예요. 북한에 국군포로가 많이 억류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래 제가 알기에는 정전 당시에 포로교환이 있어서 남북간 포로들이 다 교환되었는데 아직도 억류된 포로들이 있다니.

정용봉 씨는 지난 2004년에 본격적으로 국군포로에 관해 조사를 시작한다.

정용봉: 로스앤젤레스 재향군인회 서부 지회장을 만났어요.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요. 포로가 아직 남아 있다는데 포로 교환 다 했는데 왜 포로들이 잡혀 있느냐고 했더니 북한이 포로를 많이 잡아놓고 안 보내고 있다고 하면서 서류를 가뜩 줘요. 잃어보는데 대개 한국 국방부에 자료에요. 제가 미국학자들이 쓴 한국전에 관한 많은 책들과 많은 미 국방부의 자료들을 읽어본 결과 북한에 많은 포로들이 억류되어 있는 증거를 발견했어요. 그래 2004년에 제가 한국에 나갔습니다. 나가기 전에 우리 송환위원회의 사무총장 변홍진 씨에게 내가 한국에 나가 탈북 국군포로들을 직접 만나서 실상을 알아봐야 하니 그들 전 탈북 국군포로들에게 모이도록 연락을 해달라! 그때 57명의 탈북자가 한국에 있었어요.

2004년 11월 서울에서 탈북국군포로들의 북한에서의 인권 학대에 관한 증언을 수집했으며 2005년에는 미연방의사당에서 탈북 1호 국군포로 조창호 중위를 초청해 최초로 북한에서의 국군포로 참상에 대해 고발을 했다.

정용봉: 털북자가 50여 명이라는데 나타난 사람은 겨우 6명밖에 안 왔어요. 제가 만나러 갈 때 당시 김문수 국회의원(현 경기지사)과 수잔 솔티 씨 등과 같이 갔어요. 여섯 분을 만났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부인과 같이 있었고, 한 분은 자기 아들이라고 해서 그래 모두 국군포로 관련된 사람들이 8분이었어요. 우리 쪽에 일곱 사람, 15사람이 저녁을 먹으면서 왜 못 오느냐! 왜 안 오느냐!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 어떤 일을 했느냐! 이런 질문들이었어요. 수잔솔티씨가 많은 질문을 했어요. 제가 통역을 해주고요. 답은 한결같이 자기들은 포로가 되어서 강제 노동을 했고 그리고 여섯 명 중에서 다섯 사람이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고 그래요. 한 사람은 딴 광산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그분 이름은 기억이 잘 안나요. 그 여섯 사람이 다 탄광이나 광산에서 강제 노동을 했는데 그 사람들은 다 일반 사회와는 완전히 격리되어 뭐 휴전이 있었는 포로 교환이 있는지 세상 돌아가는것을 전혀 몰랐다는 거예요. 나중에 이 사람들이 나이가 많아서 탄광에서 나와서 그때 비로소 이 세상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탈북을 결심했다는 그런 이야기였어요.

북한에 남겨진 국군포로들은 전부가 다 격리되어 으며 감시 속에서 살았다고 증언해 줬단다.

정용봉: 그 사람들 전부 다 격리되어서 연락이 안 되니까? 실제로 국군포로가 얼마나 있는지 자기들도 알 수가 없고, 항상 감시를 받고 있었고 그러다 1956년에 김일성이가 북한에는 포로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선포했데요. 그래서 1956년에 공민증을 발급받았데요. 여기 같으면 영주권이나 시민권이겠지요. 공민증을 받았는데.

국군포로들의 강제 결혼이야기도 들어보자! 부인들은 모두 감시병이라고 한다.

정용봉: 강제 결혼을 시켰데요. 조창호 씨도 그때 결혼했어요. 조창호 씨는 아들 둘, 딸을 하나 낳고 그런데 부인이 하루아침에 없어진 거예요. 나중에 알아봤더니 이 부인들이 당에다 한 달에 한 번씩 상황보고를 하게 되어 있었데요. 자기 남편이 어떻게 한다는 것을 말하자면 일종의 감시병이지요. 그런데 살다 보니까 정이 들고 하니까 부인이 보고를 안 한 거에요. 그러니까 당에서 잡아 가 버린 거에요. 그래 하루아침에 부인이 없어졌어요.

정 씨는 국군포로 50여 명이 남쪽에 정착하고 있지만, 북한에 남겨진 가족 때문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설명해준다.

정용봉: 이 사람들이 도망올 때는 협조자(도우미)가 없으면 도망 올 수가 없데요. 왜냐면 중국을 통해 와야 되고 지리도 모르고 말도 안통하고요. 야튼 고생해서 생명을 걸고 내려온 사람들인데 50여명이 되는데 사람들이 왜 다 안 모이느냐고 했더니 그 사람들이 만일 신분이 노출되게 되면 북한에 가족들이 다 있는데 가족들이 위해를 받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은 나오는 않는 거예요.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해요. 제가 그분들께 이야기했어요. 한국정부에서 데려올 수가 없으니까 내가 세계 여론화시켜서, 우선 미국 국회에라도 가 이 이야기를 해서 이런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 해야지 이게 말이 되느냐고요. 제가 하여튼 미국 의회에 가서 이야기 할 때 만일 증언자 나오라고 하면 증언이 필요한 대 여기서 누가 증언해 줄 사람 있느냐고 물었더니 다 고개 숙이고 안 하겠다고 해요.

정용봉 씨는 2005년에 미국 의회에서 포로문제에 관한 포럼을 갖고 북한에 국군포로가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들려준다.

정용봉: 조창호 씨가 증언하겠다는 거에요. H이라는 분이 자기가 이름을 바꿔주면 자기도 증언하겠다고해요. 2005년 4월 22일에 수잔솔티(Suzanne Scholte) Defense Forum(미 인권 단체) 씨의 도움으로 미국 국회에서 포럼이 있었어요. 포로문제에 대해서요. 그때 제가 이야기를 하고 나머지는 조창호 씨하고 또 다른 한 분이 북한에서의 체험담을 증언했어요.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미국인 한 분이 전쟁이 끝나고 60년이 다 됐는데 지금도 포로로 남아 있다니 이 지구상에서 말이 되느냐면서 이야기해준 것이 기억이 나요. 여하튼 그때 처음으로 북한에 국군포로들이 많이 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제가 한 이야기의 요지는 우리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투했는데 다른 유엔군은 다 돌아 왔는데 한국국군포로만 못 돌아 왔는데 다 같이 전투를 했고 자유를 위해 싸웠는데 이분들이 돌아오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박수를 치더라고요. 어쩌든 처음으로 북한에 국군포로가 있다는 알리는 큰 동기였어요.

정 회장으로부터 2005년의 미국 의회에서의 청문회에 대한 이야기 계속된다.

정용봉: 2005에 4월에 미국 의회를 방문해 외교분과위 헨리 하이드 위원장이 국군포로 문제에 굉장히 많은 힘을 썼어요. 국군포로에 관한 포럼을 한 뒤에 즉시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포로하고 납북자를 석방해야 된다는 결의서를 만들었어요. 2005년 5월이었어요. 2006년에 탈북한 국군포로들을 청문회에 세웠어요. 조창호 소위가 증언했는데 그 당시도 끝나고 난 후 또다시 결의서를 냈는데 내용은 탈북 국군포로 증언에 의하면 부당하게 국군포로들이 억류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이 인도적으로나 전쟁포로에 관한 협정에도 위반된다고 해서 이 사람들을 석방해야 된다는 결의서를 냈어요. 그리고 금년 봄에 뉴욕주에 찰스 랭글 하원의원 있잖습니까? 국군포로 석방에 대한 결의서를 올려서 하원에서 3번이나 통과됐어요.

국군포로송환위는 북한을 상대로 작년 2월과 4월에 ‘국제형사재판소(ICC)와 유엔인권이사회(UNHRC)에 각각 고소장과 진정서’를 냈다면서 정 회장은 ‘국군포로 문제는 남북한 정부가 서로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고, 한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재미동포들이 국제기구에 호소하게 됐다’고 말한다.

정용봉: 작년에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북한정권 전쟁범죄자로서의 김정일하고 군부에 대해서 고발을 했어요. 그다음 해 4월에 UN에다가 내용을 달리해서 북한에 국군포로가 남아 있으니까 송환하도록 도와달라는 진정서를 냈어요.

정 회장은 북한이 국군포로를 석방해야 할 근거를 설명하면서 유엔의 역할을 강조한다.

정용봉: 탈북한 사람들의 증언과 모든 증거에 의하면 그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억류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은 1929년의 제네바 협약이(전쟁포로, POW)에 관한 협약) 있습니다. 북한도 1949년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도 이 협정을 준수할 의무가 있는 것이고 인권적으로도 이것이 말이 안 된다. 따라서 UN에 국군포로가 돌아오게끔 도와달라는 진정을 했어요. UN에서 적극적으로 포로석방에 관해 이야기돼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유엔에서 남북 간의 협상을 위해 조정해 주던지 안되면 결의서를 만들어 북한을 압박하든지 해야지 이제는 시간이 없습니다.

정용봉 회장은 남은 생애 국군포로송환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국군포로송환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용봉: 어느 나라든지요. 그 나라에 안보가 유지되지 않으면 나라가 유지 안 됩니다. 나라가 없어 지면은요. 뭐가 필요하겠어요. 안보가 굉장히 중요한데 안보를 담당하는 게 군인 아니겠어요. 군인들이 정말 미국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나라를 위해서 싸우겠다는 애국심이 생기도록 해야지요. 한가지 한국국민 전체가 그 당시 전사자와 포로들에게 다 빚을 지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어디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어요. 그런데 빚을 지고 있다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국군포로 송환에 앞장서는 LA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정용봉 회장의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