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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한미여성재단 준 도슨 고문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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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7

사진제공-한미여성재단

2009년 12월 워싱턴 DC 한미여성재단 기금모금행사에 참여한 회원들(왼쪽 첫 번째 준 도슨여사).

지난 1963년 워싱턴에서 발족한 한미여성재단은 처음 7명의 국제 결혼한 한인 여성들이 시작했다.
이 재단은 1984년 미 정부에 비영리단체로 등록해 그동안 한국 혼혈아 입양 후원자 역할, 양로원
봉사, 건강세미나, 홈리스(Homeless) 급식제공 등의 활동으로 47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특히
한인 피해여성들을 위해 24시간 핫라인 전화와 '희망의 집'을 운영해 교포사회로부터 칭송 받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한인사회 구석구석에서 봉사자로
활동해온 한미여성재단 준 도슨 고문의 미국 정착 이야기를 함께한다.

올해로 미국생활 58년째인 준 도슨 씨, 그의 고향은 부산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일제
억압과 6 .25 전쟁 등으로 한국에서 어려운 시기를 지내게 된다. 그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부산으로 다시 내려와 유치원 보모를 하다 6 25전쟁
여파로 직장도 잃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준 도슨: 부산 수정동이에요. 부산에서 여학교(중학교)까지 나오고 서울에 와서
진명여고를 2년 다녔어요. 아버지가 서울로 유학을 보내줘서(대학진학을 위해)
진명여고를 2년 다니다가 집에 부도가 나서 부산으로 내려와 유치원에서 일하려고
시험 치르고 유치원에 들어가 보모를 일하던 중 6 25전쟁이 나서, 피난민들이
내려와 학교를 비워주는 바람에 유치원 보모 일을 못해 직장을
잃었습니다.

준 도슨 씨는 친척의 도움으로 군부대 ANKARA(앙카라)에 취직이 돼서 일하게 된다.
준 도슨 씨는 앙카라에서 일하면서 미국군인 이였던 MR. DAWSON 씨를
만나게 된다.

dawson_couple-200.jpg
JUNE DAWSON 씨와 남편WILLIAM DAWSON 씨의 젊은 시절.
 
준 도슨: PX(군대매점)에서 한 1년 2개월 일하다가 MR DAWSON 씨를 만나서 미국에
왔어요. 데이트는 부대 안에서만 하지, 밖에서 나와서는 못 하지요. 미스터 도슨 씨가
너무 나를 따르니까 도슨과 결혼하고 미국에 왔어요.

준 도슨 씨는1950 당시 한국사회에서 외국인과 교제나 결혼은 금물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외국인과 데이트는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MR DAWSON(도슨)
씨와 데이트는 어떻게 했을까?

준 도슨: 부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절대 못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서류를 꾸미려고
대사관 다니잖아요. 그러면 텐트 있는 자동차(지프차) 있잖아요. 그걸 타고 미스터
도슨이 나를 데리고 갔어요. 신속히 들어갔다 나오는데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아는 사람 만나면 미국대사관에 왜 들어갔다 나오느냐고 물어봐요. 그러면 나 미국에
유학 간다고 이렇게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때 결혼 한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 지 아시잖아요. 미스터 도슨하고 밖에 나가는
것은 서류 때문에 미국대사관에 갈 때나 같이 가지 부대 안에서만 만나는 거예요. 일하는
데 와서 이야기하고요.
별로 데이트하고 그러질 못했어요. 그 당시 집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언니만 알았고요.

준 도슨 씨가 미국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부모님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준 도슨
: 네가 여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먼저 돌아가셨어요. 아버니만 살아 계셨는데
아버지는 사업하시니까. 많이 돌아다니셔요. 그 당시 저는 언니 집에서 직장을 다녔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몰랐지요.

그 당시는 비행기로 미국 오기가 어렵지 않았나 생각되어 어떻게 미국에 왔느냐고 물었다.
준 도슨 씨는 부산에서 미국 버지니아까지 왔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준 도슨: 그때만 해도 부산에서 미국사람과 결혼했다고 하면 큰일 나잖아요. 우리가 부산
토박이니까 아는 사람도 많고 가족들도 있고 해서 우리 언니가 도와줘서 결혼했어요.
아버지 몰래 도장 찍어주고 해 가지고 그래서 도망 오듯이 배를 타고 왔어요. 그때만
해도 미국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와서 시모노세키에서 기차를 타고 요코하마까지
왔어요. 그때 한국의 밤은 전쟁 때이니까 캄캄했잖아요. 시모노세키에 내리니까 얼마나
좋은지 불이 반짝반짝하고 바나나가 있고 야시장에 별것이 다 있었어요.
그래 바나나를 사서 먹고는 체해서 요코하마에서 병원에 입원을 하곤 했어요.
그게 생각이 납니다.
그래 거기서 비행기를 탔어요. 군인 비행기를 타고 화와이와서 캘리포니아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버지니아까지 왔어요.

미국에 도착한 부산 아가씨는 캘리포니아에서 버지니아로 가는데 미국 구경을 위해
버스여행을 원했다고 한다.

준 도슨: 한 일주일 걸렸어요. 그때는 그레이 하운드 버스가 유명했어요. 그때 버스
화장실은 돈을 넣고 사용했는데 한번은 돈을 넣는 것을 몰라서 기다리다가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니 5센트 동전을 넣고사용하던 때였어요. 그 당시 내가 너무 긴장해 있었잖아요.
언니에게 미국에 금세 갔다 오겠다고 왔는데 미국이 너무너무 먼 거라! 너무 멀고 너무
지쳐서 구경한다고 버스를 탔는데 자꾸 잠만 자서 구경한 생각이 안나요 지금.

준 도슨 씨의 초창기 미국생활은 참으로 외로웠다고 한다. 아기를 낳고 미역국을 먹지
못해 많이 울었다고 증언해 준다.

준 도슨: 버지니아에 1952년 6월 더울 때 도착했고, 남편 직장 있는 부대 인근에
살았는데 한국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시아계는 일본 사람이야, 일본의
국제결혼사람들이 있었어요. 한국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어요. 한국말 할 사람이
없으니까 거기서 큰딸을 낳았는데 너무 슬픈 게 뭐냐면 아이를 낳으면 미역국을
먹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부모님이 옆에 있곤 해야 되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까 후라이 치킨(튀김 닭)을 주는
거예요. 그걸 먹지도 않고 내가 이걸 먹으면 죽는다는 기분만 들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남편이 일 끝나면 오는 것밖에 없어요. 옆 산모를 보면 꽃도 가져오고,
가족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그래서 우리 가족들 생각이 나서 매일 같이 우는 거야,
우니까 의사가 하는 말이 네가 매일 같이 우느냐! 너의 남편이 잘 못해주는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아니라고… 그때 외롭고 슬픈 것은 말도 못해요. 그때의 말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요. 한국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래서 남편이 린치버그 대학에 가서 미스터
윤이라는 한국분을 집에 데려왔어요. 그 당시 그분이 린치버그 대학에 공부하러
오신 분이예요. 그분하고 한국말을 하고 후라이 치킨(튀김 닭)도 해준 기억이 나요.

준 도슨 씨는 1952년 이후 8번이나 남편을 따라 이사했다고 한다.

준 도슨: 제 여권번호가요. 한국에서 927번이에요. 1000명 안에 내가 외국에 나간 거예요.
그 이후 독일로 갔어요. 남편이 먼저 독일에 가 계시고 나중에 아이 데리고 독일로 갔어요.
독일에서 살다가 프랑스로 갔어요. 프랑스에서 아이 둘을 더 낳고 살다가 하와이로
갔습니다. 하와이 가니까 한국사람들이 있잖아요. 한국사람이 있으니까 내 세상 같아.
너무너무 좋아 거기에 가니까 옛날 할머니들 계신 잖아요. 그 할머니들이 저에게
너무너무 잘해 주시고 하와이 있을 때 너무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다시 조지아로
가게 됐는데, 1952년에서 1960년까지 우리가 8번 이사를 했어요. 1960년 버지니아로
와서부터 직장도 다니고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은 너무너무 외로우니까
한국사람보면 아주 좋은겁니다.

준 도슨 씨는 1960년대 워싱턴 인근에 한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준 도슨: 그때는 국제결혼한 분들이 많았고 유학 온 사람도 있고 이민 온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대사관에 초대받아 가면 국제 결혼한 분들이 많이 갔어요. 60년 중반에 여성재단에서
활동할때만 해도 우리 회원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전부 외로우니까 우리가 모일 때
회장 집 아니면 우리 집에서 모두 군인 가족이니까 음식 준비해서 같이 먹고 하니까
사람들이 참 많이
모였어요.

준 도슨 씨는 한인사회 초창기 한미여성재단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해 준다.

준 도슨: 우리가 그때 한인사회에서 활동했는데 참 큰일들을 많이 했는데 그때 있었던
분들은 나이가 들어 다 돌아가시고 우리 역할이 참 컸어요. 1970년에 어쩌면 그렇게
가난했는지 몰라요.
대사관에서 무슨 문제가 있으면 우리한테 전화해요. 그럼 우리는 포토맥까지 가요.
그 사람 다 도와주고 오고 재단에서 하는 일이니까 다 했지요.

준 도슨 씨는 버지니아에 정착하면서 크고 작은 사업으로 한인들과 함께 했다고 한다.

준 도슨: 저는 가발 가게하고 미장원 했어요. 미장원 3개하고 가발 가게 2개 그래서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어요. 그래서 한국사람들 많이 썼지요.

한미여성재단이 어려움을 당하는 여성들을 위해 운영하는 희망의 집 이야기도
들려준다.

준 도슨: 한미여성재단 창립 20년에 ‘희망의 집’을 열었어요. 희망의 집 운영과 함께
한인 여성들을 위해 도움의 전화를 놓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전화가 와서 부탁하면
해결해 주지요. 거쳐 할 곳이 없는 사람을 돕고요.

준 도슨 씨는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한국의 피가 흐르니까 한국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준 도슨: 그럼은요.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도 한국사람이 이기는 것이 좋고 나는
한국사람이에요. 그런데 네가 미국에서 더 오래 살았고 한국에서는 21년 살았지만,
그래도 한국사람이에요. 피가 한국인이니까.

준 도슨 씨는 지난 58여 년간 미국 생활 가운데 한인들의 구석구석 봉사의 손길을
펼쳐왔다. 그러나 더 많은 봉사활동을 못해 아쉽다고 이야기한다.

준 도슨: 외로운 일도 많았지만 보람되게 살았던 것 같으면서도 어떤 때는 내가 뭘 했는지
아쉬워요. 그래서, 정년퇴직하고 알렉산드리아 병원에서 봉사 했어요. 뭔가 더 해주고
싶어서 한국사람도 도와주지만, 미국 사람에게도 봉사하고 싶어서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무엇을 하고 보냈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하나하나 생각하면 다른 사람보다
좀 많이 한 것 같기도 하고요.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한인사회 구석구석에서 봉사자로 활동해온
한미여성재단 준 도슨 고문의 미국 정착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