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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6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세계 참전 용사들은 이제 80에 노령의 나이로 지금도 한반도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반도가 참된 민주주의 속에 통일되기를 또한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LA 한국문화원과 한인역사박물관이 공동주최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가진 6 25전쟁 회상 세미나의 현장 소식으로 함께합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민병용 LA 한인 역사박물관장은 한국인에게 2010년은 아주
큰 의미가 있는 해라면서 한국인은 어디에 살든 ‘희망’을 갖자고 했습니다. 바로
6 25전쟁 60년을 회고하는 것은 더 나은 한국을 만들어가는 참뜻이 담겼다고
개회사를 했습니다.
민병용: 한국전쟁이라는 우리 민족 5천 년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일도 있었고,
하지만 오늘은 또 다른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왔고,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큰 역사는 여기에 계시는 저희가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10월 평양 비행장에 태극기를 꽂은 김봉건 대위의 이야기는
당시의 참전용사들의 굳건한 나라 사랑의 참뜻을 알게 됩니다.김봉건 회장
(자유 대한 지키기 운동본부)은 한국전쟁 때인 1950년 1사단 11연대 11중대장으로
참전했습니다. 예비역 대령 출신으로 재향군인회 미 서부지회장을 지낸 김봉건
회장은 6 25전쟁의 수훈으로 미 국토방위군 지원사령부 예비역 준장으로 승진하는
기쁨도 맞았습니다. 당시 김봉건 대위가 인민군 정찰대 기마대를 습격하던
당시를 회고해 줍니다.
김봉건: 저는 그때 당시 육군 대위로서 1사단 11연대 11중대장으로서 대구 북방
낙동강선 다부동전투까지 밀려 내려 갔을 때에 마침 인민군 정찰대 기마대들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기마대의 말을 빼앗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우리 중대원 1개 분대 12명으로 말을 빼앗야겠다. 먼저 들어가서 인민군들
숙소에다 한 사람 한발씩 12발의 수류탄을 일제히 던졌습니다. 그래 12발의
수류탄이 들어오니 벼락을 맞았지요. 거기서 부상당한 놈, 죽은 놈, 산 놈은
꼼짝을 못하고 엎드려 있는 거지요. 내 목적은 말을 탈취하는 겁니다. 거기서
27필을 탈취해 왔습니다. 노획했어요. 27필을 노획해서 돌아와 보니 말들이
파편에 맞아 다리를 절고 해서 쓸만한 말이 11마리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농가에
돌려주고, 11마리를 부동서부터 끌고 인천 상륙잔전으로 전세가 역전돼서 진격해
가는 거지요. 저는 그때 뭘 생각했느냐면 평양을 들어가는데 이 말을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봉건 대위는 기마부대 특공대(말 11필)로 1950년 10월 19일 평양 비행장에
태극기를 꽂고 비행장을 점령했던 당시를 회고해 줍니다.
김봉건: 그래 평양 들어가는데 이 말을 써먹어야겠는데 이걸 그 누구도 착안을
못 하는 거예요. 백선엽 사단장이 전선에 자주 나오시거든요.’ 제가 사단장님 평양을
먼저 들어가야 하지요. 하니까.’ ‘ 들어가야지.’ 하셔서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하니까
그래 어떡해! 말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좋다 좋은 생각이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편성하라 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 대대에 있는 중, 상사급은 다 모여라. 그중에서
10명을 선발했어요. 말 1마리는 제가 타고, 나머지 10명을 선발해서 말을 태웠습니다.
그랬는데 말을 탈 줄 알아야지 말이 띄면 떨어지는 거라! 그걸 기압을 너면서 어디서
떨어진단말이냐! 반동을 주면서 떨어지지 말라고 교육했어요. 그렇게 한 반나절
교육했더니 다 말 타는데 선수가 되었어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걸 문산서부터
논두렁길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전 명령입니다. 미 1군 단장이 작전 명령을 각 사단장에게 주는데
1사단은 기동력도 없고 해서 해주로 해서 잔적을 처리하면서 올라오라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백선엽 장군이 큰일 났거든! 아니 대통령께서는 평양 점령은 한국군이 먼저
해야 한다. 한국군이 먼저 점령해야 되는데 미군이 먼저 점령하면 어떻게 되느냐.
한국군 사단장들 정신 차려라. 그래서 백선엽 장군이 1군단장에게 눈물로 호소했어요.
내 고향은 내가 찾아야 하는데 왜 저에게 선두 주자를 주지 않습니까 하고 눈물로
호소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밀번 장군이 감탄을 했어요. 그러면 평양탈환을 할 수
있겠느냐! 해서 할 수 있습니다. 1사단은 트럭이 몇 대 있느냐 40대 있습니다. 40대
가지고 어떻게 기동력을 가지느냐 말이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였든
주십시오. 어떻게든 합니다. 거기에 감탄해서 1사단이 한번 해봐라. 미 1기갑사단
좌측에 세워 놨어요. 공격 주축에 올려 놓은 거지요. 미 제1 기갑사단은 전차 장갑차
트럭 등 천여 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40대의 트럭을 가지고 어디에 들이밀겠습니까?
그래서 그것도 안 된다는 것을 결론 내리고 제가 말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은
백 사단장도 기대 못 한 것 같아요.
사실은 그러나 저는 용감하게도 말 11필을 이끌고 논두렁길로 올라 뛰고 이 전차
장갑차는 나가다가 자꾸 지체되는 원인은 지뢰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 지뢰를
제거하면서 올라가야 하니까 생각보다 빨리 못 갔단 말이에요. 그러나 저하고
장갑차하고는 약 15분 차의 거리를 두고 우리가 올라갔습니다. 제가 태극기를
평양비행장에 올라가서 꽂고, 그다음에 잔적 소탕을 하는 거예요. 잔적 소탕하는데
기가 막힌 일이 있어요. 평양비행장에 들어갔더니 여기저기서 총알이 날아오는데
가만히 보니까 호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거예요. 지하에서요. 그래서 박 상사 너는
우측 호 너는 좌측 호 너는 중간호 지금부터 수류탄 가지고 가서 제압해라!
기어가서 수류탄을 다 집어넣었던 말입니다. 그랬더니 뒤에서 하얀 깃발을
흔들어요. 입고 있던 러닝셔츠를 찢어서 흔드는 거예요. 저기 또 뭐 있구나!
가보자 박 상사를 데리고서 살살 기어갔어요. 살살 기어가 보니까 하얀 기를
계속 흔들어요. 손들고 나오라고 하니까 못 나와요.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도 못
나와요. 왜 못나오느냐고 물으니 발에 쇠사슬이 묶였다는 거예요. 그래 가보니까
기관총을 끌고 나와야 하는데 수랭식 기관총 알지요. 수랭식기관총에 묶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권총으로 다리에 묶어진 철사를 쏴서 끊었어요. 그리고 나왔어요.
나오라 하니까 나왔어요. 또 다른 병사가 있느냐고 했더니 저기 몇 명 또 있습니다.
안내를 받아서 철사를 다 끊어서 포로 5명을 잡았습니다. 작전 소탕하는 시간이
한 40분 걸렸습니다. 그 당시 백선엽 준장에게 보고 했습니다. 보고하고 우리
연대장 김동빈 대령한테 보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수고했다. 하셨어요.
그야말로 우리 1사단의 명예이지요. 그 명예를 지켰지요. 평양비행장을 다
점령하고 나서 조금 있으려니까 전차 소리가 나고 미 제1기갑사단이 들어오는
거예요.
김봉건 대위가 평양을 탈환하기 위해 소지한 무기는 수류탄과 칼빈 소총이었다고
들려줍니다.
김봉건: 저도 말에다가 수류탄을 30발과 M2 칼빈 소총 탄창 30개씩 넣고
그 짐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올라가면서 조금 의심스럽다 하면 수류탄 1발 2발
던지는 거예요. 그러면 인민군들이 있다가도 막 도망가는 거예요. 한 번도
저항받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 무식한 놈한테는 (도깨비한테는 몽둥이가 최고더라.)
같은 무식함이 필요하더라. 저는 그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평양을 점령한 것입니다.
여류수필가 정옥희 여사는 6 25동란 체험기 ‘보라빛 가지에 내 생을 걸고’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습니다. 서울 한복판, 그리고 서울 근교에서 일시적인 소녀 가장이 되어서
6 25동란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처절한 자신의 체험담을
진솔하게 적었습니다. 정옥희 여사가 들려주는 6 25 전쟁의 이야기 그리고 한국
젊은이에게 주는 충언입니다.
정옥희: 6 25가 나 가지고 얼마 있다가 저희는 죽을 먹기 시작했어요. 감자를
먹었어요. 나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가지를 먹고 지냈어요. 그때 우리 보는
데서 인민재판을 해서 그 자리에서 사람을 쏴 죽이는 것을 봤어요. 용산에 폭격이
됐는데 조폐공사가 용산에 있었거든요. 거기가 폭격이 되니까 밤만 되면 인민위원회
에서 그냥 잡으러 다니는 거예요. 또 여자들은 다 불러서 앉혀놓고 미 제국주의가
이렇게 폭격을 해서 불바다가 됐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고생을 했어요. 그때
여자분들이 90% 가까이 생리가 멈춰 버렸어요. 모두 모두 영양실조가 되어서요.
그렇게 어려웠어요.
그렇게 3개월을 지났는데 한 달 반 되니까 중공군이 넘어왔어요. 중공군이 아무
소리 없이 30만이 넘어왔는가 봐요. (그 당시 한국전 참가 장병들이 1950년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내자고 했는데) 신의주 압록강에서부터 두만강 쪽으로
그래 다 포위를 해서 미군과 유엔군들이 (생전 눈도 보지 못한 군인도 있었는데)
다 얼어 죽었어요. 가다가 쓰러져서 얼어 죽었어요. 이것을 우리 젊은 세대가
어떻게 알겠어요. 제가 전쟁 당시 부산에 내려가서 있었던 이야기를 책으로 썼어요.
부산에 내려가서 우리가 피난한 사이에 얼마나 많은 우리 군인들이 죽었는지
몰라요. 6 25때 고생한 이야기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합심해야
하는데 왜 그래요. 너무너무 답답해요. 대통령이 잘못 가는 점이 있더래도
대외적으로는 우리가 합심해야 돼요. 단결해야 돼요. 46명이나 죽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이예요. 누가 우리나라를 세계 경제 대국으로 키워줬어요.
우리가 했어요. 여기에 계신 여러분도 했어요. 젊은 사람들 저 요즈음 텔레비젼
안 봐요. 너무 기가 막혀요. 어쩌면 그렇게 잘 살아요. 밤낮 춤춰요. 술을 그렇게
마셔요. 저는 너무너무 답답해요. 우리 한국사람들 정신 차려야 해요. 안에서는
싸우더래도 밖에 나와서는 나라 흉을 보는 것 아니거든요. 여기 계시는 모든 분이
나라 사랑하는 길 별거 있어요. 합심해서 도와주고 사랑하는 길이에요.
김익창 박사는 6 25전쟁 때 서울대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습니다. 그 당시
참전 미군부대에서는 전쟁통역을 맡아줄 대학생 50명을 선발했습니다. 김 박사는
세브란스 의대에 다니던 현봉학 박사와 함께 통역관으로 선발되었고 흥남전선에
파견되었습니다. 미군이 철수할 때 흥남지역주민 10만 명이 미국 용선과 화물선으로
거제지역으로 피난을 나왔는데 그때 피난민의 통역을 담당했습니다. 김 박사의
학창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김익창: 저희도 신의주에서 살았는데 8 15해방 된 날 정주 오산중학교에 재학
중인데 그전에 일 년 동안 평양 무기 공장에서 1년 동안 일하다가 그다음에는
신의주로 돌아가서 신의주 학생사건에 참여했어요. 신의주 학생사건 때 길에
나가서 시위하다가 소련 비행기가 폭격해서 제 친구가 죽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 서울에 와서 서울 의대 의예과에 합격하고 제가 1학년을 끝마치고
2학년에 올라가는 때인데 그때 이북에서 온 사람들을 공산당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 많이 잡아가서 저는 마루 밑에 숨어 있었는데 제 어머니께서는 납치
당하셨어요. 그래서 첩보 요원으로 지원해서 힘든 영어 시험도 보고 100명중
20-30명 합격한 한사람으로 통역관으로 평양에 갔습니다. 약 10일동안 흥남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유엔군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과 북한군에 의해 많은 참전군인들이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흥남철수
작전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철수 작전이었습니다.
김익창 박사는 흥남철수 작전에서 10만 명의 피난민이 거제도로 오기까지의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김익창 박사가 고령으로 말하기가 어려워 그레이스 김 여사가
대신해 설명합니다.
그레이스 김: 흥남철수 작전에 참여는 함흥에서 한 열흘 동안 근무하던 부대가
기다렸답니다. 첩보원으로서 명령이 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갑자기 중공군이 쳐
내려온 거예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해산 하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흥남에 갔더니 200여 척의 배가 기다리고 있고
피난민들 10만 명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서서 보다가 나는
첩보원으로 왔으니까 저 배를 타고 갈 수 있겠지 했는데 마치 미군 장교가
지나가더래요.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 미군 장교가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데 우리 저 배에 선장이 통역이 필요하니 통역을 맡아달라고 그래
조그마한 배를 타고 그 배에 들어갔습니다. 갔더니 선장이 너무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거기 한국 피난민들이 잔뜩 있고, 한국 군인도 있고, 미국 군인도 있는데
선장이 지시를 내리거나 주의사항을 이야기할 때 누가 통역을 안 하면 대화가 안
되거든요. 그래 상당이 반가워서 그때부터 선장실에서 통역하면서 피난을 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피난민 10만 명이 유엔군을 환영했기 때문에 거기에 남아 있으면
살지 못하지요.
그런데 그때 유엔철수작전의 지휘관은 처음에 피난민들을 배에 싣는 것을
반대했답니다. 우리의 적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들을 믿고 우리 철수하는 배에
싣겠느냐고! 반대했어요. 당연하지요. 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데 그래
반대를 했는데, 그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께서 여러 계통을 통해서 명령하셨답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 동족이고 북한에서 고생하다가 북한을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두고 오지 말라고 해 여러 길을 통해서 대통령이 명령하셨고,
그다음에는 함경도 지역에 한국군 작전을 책임지고 있던 1군단 사령관 김백일
장군께서도 피난민을 함께 철수해야 한다고 아몬드 장군에게 부탁 했답니다.
그다음에는 아몬드 장군의 고문으로 계시던 현봉학 박사께서 강력하게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아몬드 장군은 우리 군인도 다 태울 수 없는데 하고
주저하다가 마지막에 승낙을 하셨답니다. 그래 여기저기 10만 명의 피난민들이
100척의 배에 나누어 탔지요.
흥남철수 작전은 세계 어느 전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작전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레이스 김: 여기 저지 않을 자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갑판까지 콩나무
시루같이 서서 자유를 찾아서 남한으로 나올 수가 있게 됐습니다. 그래 정말
기적이었지요. 군사 역사상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답니다. 이렇게 갑자기
철수하면서 모든 군인과 군사물자와 10만 명의 피난민까지 그러니까 군인도
10만 명 피난민도 10만 명이었어요. 역사적으로 볼 때 자주 볼 수 없는 철수
작전이었다고 미국이나 유엔군에게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0척의 배 중에서
SS 메리디스 빅토리라는 배가 있었어요. 그 배는 1,400명밖에 타지 못하는 배인데
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태웠어요. 그때 선장으로 있던 라루라는 분이 열심히 피난민
들을 태웠어요. 그냥 더 태워야 한다고 저 사람들을 놔두고 가면 안 된다고, 어떻게
사람을 많이 태웠는지 정말 움직일 수도 없게 태웠답니다. 그 배가 사흘 동안
거제도로 가는 동안에 아이가 5명 낳았어요. 다행히도 그 배에 산파 한 분이
계셨어요.( 함경도에서 오신)갑자기 아이를 낳으니까 미군들이 당황했는데.
미국 칼스테이트 대학의 오문성 석좌교수는 6 25 참화 후 60년의 세월 속에 오늘의
IT 산업 강국, 경제교역 10대국으로 급성장한 한국경제를 주제로 한국전 때와
오늘을 비교 발표했습니다.
오문성: 한국의 경제성장이 빠르고 잘 나가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면 제 생각에는
높은 교육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6년에 OECD에서 국제학생평가를 한 적이
있는데요. 한국학생들이 문제 해결하는데 일등을 했습니다. 수학에서 3등 과학에서
11등을 했습니다. 이렇듯 한국학생들이 상위권에 있습니다. 한국의 땅이 미국의
인디애나주 정도 밖에 안 되고 남한의 인구가 5천만 명 밖에 안되니까 이것은
세계에서 50번째 되는 인구인데 그런 조건에서 이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LA 한국문화원과 한인역사박물관이 공동주최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6 25전쟁 회상 세미나의 현장 소식으로 함께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세계 참전 용사들은 이제 80에 노령의 나이로 지금도 한반도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반도가 참된 민주주의 속에 통일되기를 또한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LA 한국문화원과 한인역사박물관이 공동주최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가진 6 25전쟁 회상 세미나의 현장 소식으로 함께합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민병용 LA 한인 역사박물관장은 한국인에게 2010년은 아주
큰 의미가 있는 해라면서 한국인은 어디에 살든 ‘희망’을 갖자고 했습니다. 바로
6 25전쟁 60년을 회고하는 것은 더 나은 한국을 만들어가는 참뜻이 담겼다고
개회사를 했습니다.
민병용: 한국전쟁이라는 우리 민족 5천 년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일도 있었고,
하지만 오늘은 또 다른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왔고,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큰 역사는 여기에 계시는 저희가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10월 평양 비행장에 태극기를 꽂은 김봉건 대위의 이야기는
당시의 참전용사들의 굳건한 나라 사랑의 참뜻을 알게 됩니다.김봉건 회장
(자유 대한 지키기 운동본부)은 한국전쟁 때인 1950년 1사단 11연대 11중대장으로
참전했습니다. 예비역 대령 출신으로 재향군인회 미 서부지회장을 지낸 김봉건
회장은 6 25전쟁의 수훈으로 미 국토방위군 지원사령부 예비역 준장으로 승진하는
기쁨도 맞았습니다. 당시 김봉건 대위가 인민군 정찰대 기마대를 습격하던
당시를 회고해 줍니다.
김봉건: 저는 그때 당시 육군 대위로서 1사단 11연대 11중대장으로서 대구 북방
낙동강선 다부동전투까지 밀려 내려 갔을 때에 마침 인민군 정찰대 기마대들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기마대의 말을 빼앗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우리 중대원 1개 분대 12명으로 말을 빼앗야겠다. 먼저 들어가서 인민군들
숙소에다 한 사람 한발씩 12발의 수류탄을 일제히 던졌습니다. 그래 12발의
수류탄이 들어오니 벼락을 맞았지요. 거기서 부상당한 놈, 죽은 놈, 산 놈은
꼼짝을 못하고 엎드려 있는 거지요. 내 목적은 말을 탈취하는 겁니다. 거기서
27필을 탈취해 왔습니다. 노획했어요. 27필을 노획해서 돌아와 보니 말들이
파편에 맞아 다리를 절고 해서 쓸만한 말이 11마리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농가에
돌려주고, 11마리를 부동서부터 끌고 인천 상륙잔전으로 전세가 역전돼서 진격해
가는 거지요. 저는 그때 뭘 생각했느냐면 평양을 들어가는데 이 말을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봉건 대위는 기마부대 특공대(말 11필)로 1950년 10월 19일 평양 비행장에
태극기를 꽂고 비행장을 점령했던 당시를 회고해 줍니다.
김봉건: 그래 평양 들어가는데 이 말을 써먹어야겠는데 이걸 그 누구도 착안을
못 하는 거예요. 백선엽 사단장이 전선에 자주 나오시거든요.’ 제가 사단장님 평양을
먼저 들어가야 하지요. 하니까.’ ‘ 들어가야지.’ 하셔서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하니까
그래 어떡해! 말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좋다 좋은 생각이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편성하라 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 대대에 있는 중, 상사급은 다 모여라. 그중에서
10명을 선발했어요. 말 1마리는 제가 타고, 나머지 10명을 선발해서 말을 태웠습니다.
그랬는데 말을 탈 줄 알아야지 말이 띄면 떨어지는 거라! 그걸 기압을 너면서 어디서
떨어진단말이냐! 반동을 주면서 떨어지지 말라고 교육했어요. 그렇게 한 반나절
교육했더니 다 말 타는데 선수가 되었어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걸 문산서부터
논두렁길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전 명령입니다. 미 1군 단장이 작전 명령을 각 사단장에게 주는데
1사단은 기동력도 없고 해서 해주로 해서 잔적을 처리하면서 올라오라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백선엽 장군이 큰일 났거든! 아니 대통령께서는 평양 점령은 한국군이 먼저
해야 한다. 한국군이 먼저 점령해야 되는데 미군이 먼저 점령하면 어떻게 되느냐.
한국군 사단장들 정신 차려라. 그래서 백선엽 장군이 1군단장에게 눈물로 호소했어요.
내 고향은 내가 찾아야 하는데 왜 저에게 선두 주자를 주지 않습니까 하고 눈물로
호소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밀번 장군이 감탄을 했어요. 그러면 평양탈환을 할 수
있겠느냐! 해서 할 수 있습니다. 1사단은 트럭이 몇 대 있느냐 40대 있습니다. 40대
가지고 어떻게 기동력을 가지느냐 말이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였든
주십시오. 어떻게든 합니다. 거기에 감탄해서 1사단이 한번 해봐라. 미 1기갑사단
좌측에 세워 놨어요. 공격 주축에 올려 놓은 거지요. 미 제1 기갑사단은 전차 장갑차
트럭 등 천여 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40대의 트럭을 가지고 어디에 들이밀겠습니까?
그래서 그것도 안 된다는 것을 결론 내리고 제가 말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은
백 사단장도 기대 못 한 것 같아요.
사실은 그러나 저는 용감하게도 말 11필을 이끌고 논두렁길로 올라 뛰고 이 전차
장갑차는 나가다가 자꾸 지체되는 원인은 지뢰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 지뢰를
제거하면서 올라가야 하니까 생각보다 빨리 못 갔단 말이에요. 그러나 저하고
장갑차하고는 약 15분 차의 거리를 두고 우리가 올라갔습니다. 제가 태극기를
평양비행장에 올라가서 꽂고, 그다음에 잔적 소탕을 하는 거예요. 잔적 소탕하는데
기가 막힌 일이 있어요. 평양비행장에 들어갔더니 여기저기서 총알이 날아오는데
가만히 보니까 호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거예요. 지하에서요. 그래서 박 상사 너는
우측 호 너는 좌측 호 너는 중간호 지금부터 수류탄 가지고 가서 제압해라!
기어가서 수류탄을 다 집어넣었던 말입니다. 그랬더니 뒤에서 하얀 깃발을
흔들어요. 입고 있던 러닝셔츠를 찢어서 흔드는 거예요. 저기 또 뭐 있구나!
가보자 박 상사를 데리고서 살살 기어갔어요. 살살 기어가 보니까 하얀 기를
계속 흔들어요. 손들고 나오라고 하니까 못 나와요.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도 못
나와요. 왜 못나오느냐고 물으니 발에 쇠사슬이 묶였다는 거예요. 그래 가보니까
기관총을 끌고 나와야 하는데 수랭식 기관총 알지요. 수랭식기관총에 묶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권총으로 다리에 묶어진 철사를 쏴서 끊었어요. 그리고 나왔어요.
나오라 하니까 나왔어요. 또 다른 병사가 있느냐고 했더니 저기 몇 명 또 있습니다.
안내를 받아서 철사를 다 끊어서 포로 5명을 잡았습니다. 작전 소탕하는 시간이
한 40분 걸렸습니다. 그 당시 백선엽 준장에게 보고 했습니다. 보고하고 우리
연대장 김동빈 대령한테 보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수고했다. 하셨어요.
그야말로 우리 1사단의 명예이지요. 그 명예를 지켰지요. 평양비행장을 다
점령하고 나서 조금 있으려니까 전차 소리가 나고 미 제1기갑사단이 들어오는
거예요.
김봉건 대위가 평양을 탈환하기 위해 소지한 무기는 수류탄과 칼빈 소총이었다고
들려줍니다.
김봉건: 저도 말에다가 수류탄을 30발과 M2 칼빈 소총 탄창 30개씩 넣고
그 짐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올라가면서 조금 의심스럽다 하면 수류탄 1발 2발
던지는 거예요. 그러면 인민군들이 있다가도 막 도망가는 거예요. 한 번도
저항받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 무식한 놈한테는 (도깨비한테는 몽둥이가 최고더라.)
같은 무식함이 필요하더라. 저는 그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평양을 점령한 것입니다.
여류수필가 정옥희 여사는 6 25동란 체험기 ‘보라빛 가지에 내 생을 걸고’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습니다. 서울 한복판, 그리고 서울 근교에서 일시적인 소녀 가장이 되어서
6 25동란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처절한 자신의 체험담을
진솔하게 적었습니다. 정옥희 여사가 들려주는 6 25 전쟁의 이야기 그리고 한국
젊은이에게 주는 충언입니다.
정옥희: 6 25가 나 가지고 얼마 있다가 저희는 죽을 먹기 시작했어요. 감자를
먹었어요. 나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가지를 먹고 지냈어요. 그때 우리 보는
데서 인민재판을 해서 그 자리에서 사람을 쏴 죽이는 것을 봤어요. 용산에 폭격이
됐는데 조폐공사가 용산에 있었거든요. 거기가 폭격이 되니까 밤만 되면 인민위원회
에서 그냥 잡으러 다니는 거예요. 또 여자들은 다 불러서 앉혀놓고 미 제국주의가
이렇게 폭격을 해서 불바다가 됐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고생을 했어요. 그때
여자분들이 90% 가까이 생리가 멈춰 버렸어요. 모두 모두 영양실조가 되어서요.
그렇게 어려웠어요.
그렇게 3개월을 지났는데 한 달 반 되니까 중공군이 넘어왔어요. 중공군이 아무
소리 없이 30만이 넘어왔는가 봐요. (그 당시 한국전 참가 장병들이 1950년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내자고 했는데) 신의주 압록강에서부터 두만강 쪽으로
그래 다 포위를 해서 미군과 유엔군들이 (생전 눈도 보지 못한 군인도 있었는데)
다 얼어 죽었어요. 가다가 쓰러져서 얼어 죽었어요. 이것을 우리 젊은 세대가
어떻게 알겠어요. 제가 전쟁 당시 부산에 내려가서 있었던 이야기를 책으로 썼어요.
부산에 내려가서 우리가 피난한 사이에 얼마나 많은 우리 군인들이 죽었는지
몰라요. 6 25때 고생한 이야기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합심해야
하는데 왜 그래요. 너무너무 답답해요. 대통령이 잘못 가는 점이 있더래도
대외적으로는 우리가 합심해야 돼요. 단결해야 돼요. 46명이나 죽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이예요. 누가 우리나라를 세계 경제 대국으로 키워줬어요.
우리가 했어요. 여기에 계신 여러분도 했어요. 젊은 사람들 저 요즈음 텔레비젼
안 봐요. 너무 기가 막혀요. 어쩌면 그렇게 잘 살아요. 밤낮 춤춰요. 술을 그렇게
마셔요. 저는 너무너무 답답해요. 우리 한국사람들 정신 차려야 해요. 안에서는
싸우더래도 밖에 나와서는 나라 흉을 보는 것 아니거든요. 여기 계시는 모든 분이
나라 사랑하는 길 별거 있어요. 합심해서 도와주고 사랑하는 길이에요.
김익창 박사는 6 25전쟁 때 서울대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습니다. 그 당시
참전 미군부대에서는 전쟁통역을 맡아줄 대학생 50명을 선발했습니다. 김 박사는
세브란스 의대에 다니던 현봉학 박사와 함께 통역관으로 선발되었고 흥남전선에
파견되었습니다. 미군이 철수할 때 흥남지역주민 10만 명이 미국 용선과 화물선으로
거제지역으로 피난을 나왔는데 그때 피난민의 통역을 담당했습니다. 김 박사의
학창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김익창: 저희도 신의주에서 살았는데 8 15해방 된 날 정주 오산중학교에 재학
중인데 그전에 일 년 동안 평양 무기 공장에서 1년 동안 일하다가 그다음에는
신의주로 돌아가서 신의주 학생사건에 참여했어요. 신의주 학생사건 때 길에
나가서 시위하다가 소련 비행기가 폭격해서 제 친구가 죽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 서울에 와서 서울 의대 의예과에 합격하고 제가 1학년을 끝마치고
2학년에 올라가는 때인데 그때 이북에서 온 사람들을 공산당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 많이 잡아가서 저는 마루 밑에 숨어 있었는데 제 어머니께서는 납치
당하셨어요. 그래서 첩보 요원으로 지원해서 힘든 영어 시험도 보고 100명중
20-30명 합격한 한사람으로 통역관으로 평양에 갔습니다. 약 10일동안 흥남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유엔군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과 북한군에 의해 많은 참전군인들이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흥남철수
작전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철수 작전이었습니다.
김익창 박사는 흥남철수 작전에서 10만 명의 피난민이 거제도로 오기까지의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김익창 박사가 고령으로 말하기가 어려워 그레이스 김 여사가
대신해 설명합니다.
그레이스 김: 흥남철수 작전에 참여는 함흥에서 한 열흘 동안 근무하던 부대가
기다렸답니다. 첩보원으로서 명령이 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갑자기 중공군이 쳐
내려온 거예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해산 하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흥남에 갔더니 200여 척의 배가 기다리고 있고
피난민들 10만 명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서서 보다가 나는
첩보원으로 왔으니까 저 배를 타고 갈 수 있겠지 했는데 마치 미군 장교가
지나가더래요.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 미군 장교가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데 우리 저 배에 선장이 통역이 필요하니 통역을 맡아달라고 그래
조그마한 배를 타고 그 배에 들어갔습니다. 갔더니 선장이 너무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거기 한국 피난민들이 잔뜩 있고, 한국 군인도 있고, 미국 군인도 있는데
선장이 지시를 내리거나 주의사항을 이야기할 때 누가 통역을 안 하면 대화가 안
되거든요. 그래 상당이 반가워서 그때부터 선장실에서 통역하면서 피난을 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피난민 10만 명이 유엔군을 환영했기 때문에 거기에 남아 있으면
살지 못하지요.
그런데 그때 유엔철수작전의 지휘관은 처음에 피난민들을 배에 싣는 것을
반대했답니다. 우리의 적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들을 믿고 우리 철수하는 배에
싣겠느냐고! 반대했어요. 당연하지요. 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데 그래
반대를 했는데, 그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께서 여러 계통을 통해서 명령하셨답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 동족이고 북한에서 고생하다가 북한을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두고 오지 말라고 해 여러 길을 통해서 대통령이 명령하셨고,
그다음에는 함경도 지역에 한국군 작전을 책임지고 있던 1군단 사령관 김백일
장군께서도 피난민을 함께 철수해야 한다고 아몬드 장군에게 부탁 했답니다.
그다음에는 아몬드 장군의 고문으로 계시던 현봉학 박사께서 강력하게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아몬드 장군은 우리 군인도 다 태울 수 없는데 하고
주저하다가 마지막에 승낙을 하셨답니다. 그래 여기저기 10만 명의 피난민들이
100척의 배에 나누어 탔지요.
흥남철수 작전은 세계 어느 전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작전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레이스 김: 여기 저지 않을 자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갑판까지 콩나무
시루같이 서서 자유를 찾아서 남한으로 나올 수가 있게 됐습니다. 그래 정말
기적이었지요. 군사 역사상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답니다. 이렇게 갑자기
철수하면서 모든 군인과 군사물자와 10만 명의 피난민까지 그러니까 군인도
10만 명 피난민도 10만 명이었어요. 역사적으로 볼 때 자주 볼 수 없는 철수
작전이었다고 미국이나 유엔군에게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0척의 배 중에서
SS 메리디스 빅토리라는 배가 있었어요. 그 배는 1,400명밖에 타지 못하는 배인데
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태웠어요. 그때 선장으로 있던 라루라는 분이 열심히 피난민
들을 태웠어요. 그냥 더 태워야 한다고 저 사람들을 놔두고 가면 안 된다고, 어떻게
사람을 많이 태웠는지 정말 움직일 수도 없게 태웠답니다. 그 배가 사흘 동안
거제도로 가는 동안에 아이가 5명 낳았어요. 다행히도 그 배에 산파 한 분이
계셨어요.( 함경도에서 오신)갑자기 아이를 낳으니까 미군들이 당황했는데.
미국 칼스테이트 대학의 오문성 석좌교수는 6 25 참화 후 60년의 세월 속에 오늘의
IT 산업 강국, 경제교역 10대국으로 급성장한 한국경제를 주제로 한국전 때와
오늘을 비교 발표했습니다.
오문성: 한국의 경제성장이 빠르고 잘 나가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면 제 생각에는
높은 교육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6년에 OECD에서 국제학생평가를 한 적이
있는데요. 한국학생들이 문제 해결하는데 일등을 했습니다. 수학에서 3등 과학에서
11등을 했습니다. 이렇듯 한국학생들이 상위권에 있습니다. 한국의 땅이 미국의
인디애나주 정도 밖에 안 되고 남한의 인구가 5천만 명 밖에 안되니까 이것은
세계에서 50번째 되는 인구인데 그런 조건에서 이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LA 한국문화원과 한인역사박물관이 공동주최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6 25전쟁 회상 세미나의 현장 소식으로 함께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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