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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고 있습니까?”-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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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3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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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고 있습니까?”
(Are You Seeking?)
--마태복음 2:1-12

      (김 영봉 목사)

1.

Happy New Year!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2009년 한 해 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미국과 전세계를 깊은 수렁 속으로 몰고 들어간 경기 침체로 인해, 어떤 분들은 쉴 사이 없이 헉헉대며 뛰셨고, 또 어떤 분들은 아슬아슬하게 하루 하루 지내 오셨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예상하지 않는 건강 문제로 인해 혹은 가정 불화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지내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문제로 인해 혹은 직장 문제로 인해 가슴 졸이며 새 해를 맞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고 버텨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2010년을 맞는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과 긴장감이 서려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불길한 예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전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새 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은 뭔가 예기치 않은 은총과 축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설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29:11)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미래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 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2010년도에도 그럴 것입니다. 내 직장에, 내 가정에, 내 건강에, 내 믿음에, 내가 사는 나라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것은 모르지만, 그 모든 일이 결국은 나를 복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혹은 일어날 일들의 외형을 보고, 우리 자신의 기준에 따라 ‘불행’이니 ‘재앙’이니 ‘저주’니 하는 이름을 붙이지 마십시다. 그것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매우 섣부른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미래의 빛에서 보아야 합니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만, 이제 저도 저의 경험을 통해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불행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중에 보면 행복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흔히들 행운이라고 하는 것들이 나중에 보면 재앙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아도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면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그 외형이 재앙처럼 보이든 축복처럼 보이든,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Epiphany)입니다. 한자로 ‘주님’의 ‘주’(主)자와 ‘나타나다’라는 뜻의 ‘현’(顯)를 합하여 만든 말입니다. 영어의 Epiphany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왔는데, ‘드러남’(appearance) 혹은 ‘밝혀짐’(manifestation)을 뜻합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동방 박사들을 통해 인류에게 당신의 모습을 처음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1월 6일을 동방 박사의 방문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까지 주현절은 지속되며,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동방 박사의 방문 이야기는 신비와 의문에 쌓여 있습니다. 가장 먼저 마주치는 질문이 “동방 박사가 누구냐?”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마고스’라고 부르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깔끔하게 정리된 정설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시대에 이 말이 쓰인 용례(usages)를 검토해 볼 때, 점성가들(astrologers)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아도 그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방’이라는 말은 팔레스틴의 동쪽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점성술이 꽤 발달해 있었던 페르시아, 즉 오늘의 이란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란에 조로아스터교라는 종교가 있었는데, 이 종교에서 점성술은 매우 중요한 계시의 수단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새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찾기 위해 이 점성가들이 겪어야 했을 고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이 살던 곳에서 베들레헴까지 적어도 3개월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아마도 여러 명이 떼를 지어 캐러반 여행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아기 예수를 찾아온 동방 박사가 세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오늘 본문에 보면 그냥 복수로만 되어 있습니다. 몇 명인지 알 수 없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동행했을 것입니다. 겨울에 그 길을 여행한다는 것은 상당한 희생과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 짐승으로부터의 위험, 강도와 도둑으로부터의 위험이 곳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여행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생사를 건 모험과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거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새로 태어나신 아기를 만나기 위해 그 모든 위험을 무릎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아기를 찾아 만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떤 경위로 그같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태어난 아기가 ‘유대인의 왕이 되실 분’이며 동시에 온 인류의 빛이 되실 분임을 믿었습니다. 온 인류의 빛이 되실 분이므로 바로 자신들에게도 빛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감수하고, 모든 일을 뒤로 하고, 그 아기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 험한 길을 그들은 걷고 또 걸었습니다. 만일 태어난 아기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옳다면, 그 아기를 꼭 보아야 했습니다.

3.

오랜 길을 걸어 그들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태어나신 아기가 유대인의 왕이 되실 분이므로, 유대인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 봅니다. 혹시 유대인의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난 것을 아느냐고. 그 아기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하지만 이게 웬 일입니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셨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고, 이방인 점쟁이들이 그분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동방에서 온 점쟁이들로 인해 예루살렘 주민들 사이에는 일순 놀라움과 흥분의 감정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가 내세운 꼭둑각시 왕 헤롯은 순수한 유대인 혈통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적인 유대인들은 이방인이나 다름 없는 헤롯을 왕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왕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 했습니다. 메시야가 나타나서 로마를 뒤집어 엎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순수 유대인 혈통의 왕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런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흔들렸겠습니까?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이 혈통 문제로 인해 왕으로서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늘 불만이었고, 그로 인해 또한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헤롯에게는 매우 불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정통성 있는 유대인 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헤롯 왕이 어떻게 반응할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입니다. 장차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두려움에 질려 모두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다급해진 헤롯 왕은 성경 전문가들을 불러 놓고 새로운 왕이 태어날 곳을 찾아내도록 명령했습니다. 성경의 예언들을 샅샅이 연구한 끝에 그들은 베들레헴을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지명했습니다. 헤롯 왕은 점성가들에게 베들레헴으로 가 보라고 지시하고는, 그 아기를 찾으면 자신에게도 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8절)라고 말하지만, 속셈은 그 아기를 살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의 의도는 불순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성가들이 그 아기를 찾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4.

아기를 만났을 때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3개월 동안의 피로가 한 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었고, 그렇게 해도 전혀 아깝지 않았을 것입니다. 쥐면 아스라질 것 같은 그 여린 아기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온 인류에게 구원이 될 혁명적인 사건이 세상의 가장 자리, 그 허름한 외양간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고, 그들은 얼마나 큰 신비감에 젖었겠습니까? 그들은 어쩌면 전 재산일지도 모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 선물은 모두 왕에게 어울리는 혹은 왕을 상징하는 선물입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얼마를 지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음에 흡족할만큼 아기 예수님과의 만남을 즐긴 후, 그들은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헤롯의 속셈을 몰랐던 그들은 그의 말을 곧이 들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꿈 속에서 그들은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12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서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마치 새 세상을 걷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왕은 아직 간난 아기의 상태에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그 임금이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에 살고 있는 듯했을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들이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기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하고 난 그들은 더 이상 점쟁이로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더 이상 근심에 눌리고 두려움에 질려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을 알던 사람들은 모두 궁금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여행 중에 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변했을까?’

저는 이 점성가들의 여정을 주목합니다. 그들이 새로운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고 그 험한 길을 떠난 것, 모든 것을 걸고 그 아기를 찾아나선 것, 그 아기를 찾아 만나기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에 주목합니다. 그 아기를 만나 마음을 다해 경배한 것, 그 아기를 만나고 나서 다른 길을 통해 자기 나라로 돌아간 것을 주목합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짐작으로 아는 분명한 사실, 즉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좁고 험한 길을 기뻐 뒤며 걸었을 것을 주목합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과거에 붙들려 있던 헛된 종교와 관습과 습관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을 것을 주목합니다. 아기 예수를 만났던 감동을 마음에 품고 설레는 희망을 안고 살았을 것을 주목합니다.

이것을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걷는 믿음의 여정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긴가 민가 하고 의심도 되고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그 소문에 진실이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듭니다. 2천년 전에 유대 땅에 살았다가 죽은 그 청년 예수가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이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너무도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진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고민합니다. ‘그 소식을 믿고 믿음의 길에 나서 볼까?’ 그것은 마치 동방의 점성가들이 천체에 나타난 이상한 징조를 보고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나설지를 두고 망설이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5.

얼마 전, 한 교우의 소개로 믿지 않는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찾는 사람’(seeker)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유는 ‘믿기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아직 믿을지 말지 ‘결정을 하지 않아서’라고 하셨습니다. 왜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느냐고 여쭈었더니,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할 지 몰라서 아직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지어낸 교리 중에 가장 허튼 소리처럼 들리고, 어떻게 보면 허튼 소리처럼 들리기에 더욱 더 진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소식이 진실이라면 모든 것을 걸어볼 만한데, 과연 그 길에 나설지 말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금 더 고민하고 연구해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진지한 구도심에 감탄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분의 마음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진지한 구도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씨름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결국 결단의 문제입니다. 동방의 점성가들에게도 결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100%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떠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도 그들이 본 사실에 대해 반신반의했을 것입니다. 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씨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결정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 고민하고 씨름한 것을 바탕으로 결단을 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가 있으며, 그 아기가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될 것이며, 바로 자신들의 삶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헤롯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의 학자들도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기를 직접 만나 경배한 사람은 그 점성가들뿐이었습니다. 그 아기를 찾아 만나기까지, 그들은 많은 고난을 참아야 했습니다. 끝도 없는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한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아기가 자신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기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간절하고 끈질긴 노력이 마침내 열매를 맺었습니다. 드디어 그 아기를 만나고 경배하는 황홀한 순간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우리 영적 여정의 절정이요 또한 전환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되려면 누구에게나 이 거룩한 ‘에피파니’의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뵙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피파니’라고 부르고, ‘주현의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누구에게는 그것이 강력한 사건으로 일어나고, 누구에게는 일순간의 깨달음으로 오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우리의 영적 여정의 절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뵙는다는 것이 죽을 것처럼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죽는다 해도 그분을 만나고 싶은 열망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간절한 열망을 품고 그분을 추구하는 것이 영적 여정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였다는 프랑스의 사상가 블레즈 파스칼(Blase Pascal)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의 웃옷의 두꺼운 부분에서 접혀진 조그만 앙피지 종이 한 장과, 그 속에 들어있는 또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종이 위에는 자신이 겪은 강력한 신앙 체험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하나님 체험을 다음과 같이 암호처럼 그곳에 적어 놓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옷 안쪽에 꿰매 놓았습니다. 그 일은 1654년 11월 23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약 두 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기록에 보면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라는 단어들이 적혀 있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이라고 적어 놓기도 했습니다.

파스칼이 두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뭔가 견딜 수 없이 뜨거운 것에 사로잡혔고, 그로 인해 세상 모든 것을 잊고, 한 없는 기쁨에 잠겨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경험으로 인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이 발견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신비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 체험이 파스칼을 인류의 사상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하도록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모두 이와 같지는 않습니다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는 우리의 믿음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점만큼은 변개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6.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참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진정한 희망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점성가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나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헤롯 왕을 만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가리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길’이라는 말이 제게는, 점성가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나서 걸었던 삶의 길,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의 길을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면, 인생의 길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대면하기를 꺼리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없이 나 혼자 택해 걸어온 길에 과연 희망이 있습니까? 그렇게 살아 결국 얻을 것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진정한 희망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다른 길’에 있다는 생각에 부딪혀 본 적이 없습니까? 앞에서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이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한 해,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로 인해 과거와는 다른 길을 걷고 계신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자, 과거에 익숙했던 것이 불편해졌고 과거에 좋았던 것이 싫어졌습니다. 이같은 영적 변화가 우리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올 해, 2010년도에는 더 많은 영적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사귐과 섬김’의 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수요일까지 중고등부 수양회가 있었습니다. 저희 집 두 아이가 카운슬러로 참여하고 왔습니다. 수양회를 다녀 와서 대화를 나누는 중에, 최근에 뚜렷하게 변화된 우리 교회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아이가 서로 “그 아이, 진짜 많이 변했어!”라고 말하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데?” 그랬더니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옷차림도 바뀌었고, 화장하는 것도 달라졌고, 얼굴 표정도 달라졌다는 겁니다.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가 겉 모습에서 보이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영적 여정의 여러 단계 중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는, 제가 만났던 그분처럼 아직 믿음의 여정에 나서기를 결단하지 못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몸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믿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어서, 탐색하는 마음으로 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 탐구와 탐색을 결코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너무 결단의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래도록 망설이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많은 시간, 오랜 길을 걸으신 분들도 계십니다. 이쯤 걸었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실만도 한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답답해 하실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때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오랜 방황과 걸음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환히 드러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놀라운 에피파니의 순간이 필경 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 영적 여정에서 쉬지 마시기 바랍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도움이 될만한 사람들에게 물어가면서 길을 찾아 가십시다.

여러분 중에는 그 신비로운 에피파니의 경험을 하시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외딴 산골에 기도원을 차려 놓고 거기서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그럴 필요도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다시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곳에 가서 전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그렇게 살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정도에 만족하고 안주하시 마시기 바랍니다. 더 깊은 영적 차원을 향하여 계속 걸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7.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내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2010년, 새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송구영신 예배에 오신 교우께서 제 아내에게 그러시더랍니다. “내가 이제 송구영신 예배를 몇 번이나 올 수 있겠어요? 그래서 만사 제쳐 놓고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시간, 우리가 새 해라고 부르는 이 시간은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값비싼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감사하게 받아서 금쪽같이 써야 하겠습니다.

2010년을 맞으면서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가 더 많은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저 무덤덤하게 새 해를 맞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을 돌아 보십시다. 우리가 영적 여정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돌아 보십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하나님을 진실로 만났다면,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는 우리에게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 산다면, 무덤덤하게 하루 하루를 맞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재앙이 아니라 번영을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매일 주어지는 날들을 감사와 감격으로 맞아들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실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며 마음이 설레여야 마땅합니다.

이 시간, 새 해를 맞는 나의 마음은 어떠한지 살펴 보십시다. 아기 예수를 찾으러 길을 떠났던 동방 박사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분을 찾기 전까지는 찾을 것에 대한 기대감에 설레고, 만났을 때는 황홀한 만남에 감동하고, 만나고 난 후에는 그 만남의 감흥에 젖어 새 세상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같은 기쁨이 영적 여정에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나에게는 그 신령한 기쁨이 있습니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설레임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영적 여정에서 끊임없이 진보하여 더 신령한 기쁨, 더 든든한 평안, 그 밝은 희망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구원의 길을 내시고
그 길의 안내자가 되시는 주님,
저희를 인도하소서.
저희가 선 자리로부터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더 깊이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과거의 둥지에 숨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영적 진보로써
매일 새로움을 맛보며 살게 하소서.
영적 진보로써
저희의 빛이 더 밝아지게 하시고
저희의 짠맛이 더 진해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