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짜 : 07/02/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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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를 배우는 미국 어린이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한미우호 증진을 도모하기 위한 태권도 포럼이 7월 1일 주미한국대사관 코러스 하우스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버지니아 포토맥 폴스 소재 타이거덴 소속 태권도 사범과 어린 수련생들이 참석, 태권도의 본고장 한국의 전통 문화와 역사에 대해 배웠습니다. 포럼에서는 한국 사회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은 ‘다이나믹 코리아’ 등 다양한 동영상이 상영돼 코러스 하우스를 찾은 어린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특 히 이들은 한국 만화영화 백곰, 전통견 삽살개 사진, 비보이 그룹 ‘라스트 포 원’의 역동적인 동작을 담은 동영상 등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 만화영화 ‘백곰’을 보고서는 배꼽을 잡으면서 웃었으며, 힘차고 역동적인 태권도 발차기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한국을 미국 사회에 알리고 한미 양국 우호 관계를 증진하기 위한 태권도 포럼은 계속됩니다. 태권도 포럼에 관심 있는 태권도장은 코러스하우스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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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5 (김 영봉 목사)
“하늘로 솟으라”(Fly to Heaven)
--고린도후서 12:1-10
(김 영봉 목사)1.
“무엇 때문에 교회 다니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신앙 생활을 함으로써 어떤 변화 혹은 유익을 얻게 되기를 기대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분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섭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교회가 이런 저런 잡음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해 이런 기대감을 가지는 분이 아직도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아이들이 싫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주일마다 교회에 데리고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상, 우리가 사는 사회에 그 어디에서도 이제는 ‘바른 생활’을 가르치는 곳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학교조차도 이제는 ‘바른 생활’이 아니라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본분에 대해 가르치고 덕성을 길러주며 선하고 바르게 살도록 인도하는 데 있어 교회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실로, 종교의 문제는 한도 끝도 없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가장 탁월한 주제입니다. 종교적인 질문들은 보통 확실한 대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질문들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질문들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인류사에서 수 많은 천재들이 종교적인 문제들과 씨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굳이 천재가 아니라 하더라도, 종교적인 질문들은 우리의 지성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요즈음 한국 교회의 강단이 교인들과 소통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도 위기감을 가지고 매 주일 설교에 임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지성을 사로잡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지만, 지성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번잡한 세상을 뒤로 하고,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세상에서 듣지 못하던 이야기들을 들으면 마음에 휴식이 들어 찬다고, 그래서 좋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요즘처럼 교회가 야시장처럼 번잡해진 상황에 이렇게 느끼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도 참 감사하고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위치나 예배당의 분위기 그리고 예배 분위기 때문에 찾아오는 분들이 마음과 영혼에 깊은 평화를 맛 볼 수 있다고, 그 점에서 특징이 있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참 다행한 일입니다.
반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로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민 사회에서는 사람 만나러 교회 오는 분들도 계시고, 더 많은 사람들을 알아 두어 사업 상의 유익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 음식점이 없는 지역에 있는 교회의 경우, 일 주일에 한 번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희 어릴 적에는 자연스럽게 같은 또래의 이성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을 굳이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유학 생활 중에 일 주일에 한 번 김치 먹고 싶어서 교회에 나왔다가 하나님을 만나 참된 신앙인으로 변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교우 중 어떤 분은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교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한시적으로 교회를 나가 ‘주다가’, 그만 하나님에게 발목이 잡힌 분도 계십니다. 연애하고 싶어서 교회에 나왔다가 하나님과의 연애에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본질적인 이유로 교회에 나오더라도 그것을 굳이 막을 일은 아니다 싶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언제까지고 비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것은 본인에게도 좋지 않고, 교회에게도 폐를 끼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안에 모인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구하려고 교회에 나오고 있는가? 과연 내가 추구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일치하는가? 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가?
2.
이성 친구를 만나기 위해, 혹은 김치를 먹고 싶어서, 혹은 사업 상의 이유로 교회에 나오는 것보다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혹은 종교적 질문들을 해결받기 위해, 혹은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훨씬 차원이 높고 고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커다란 의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까? 과연, 그것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본질에 속합니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로 솟아 오르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초월자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기에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안에 머물러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고 그분과의 관계를 추구하며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삶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소망이어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시편 강해에서 읽은 시편 27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4절)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기를 소원한다”는 말은 “항상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인생의 모든 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데서 시작된 것임을, 따라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부터 풀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오직 하나의 소원, 즉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습니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이같은 갈망이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고는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를 잊어버린 어린 아이의 마음 상태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가 상실됨으로 인해 생긴 공허감입니다.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느냐, 부인하거나 외면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이면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이같은 영적 갈망에 시달릴 때, 우리는 때로 시편 저자처럼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42:1)
인간이면 누구나 이같은 갈증을 느끼는데, 그 갈증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누구를 찾고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 제각기 생각이 다릅니다. 시편 42편의 저자처럼, 영혼의 갈증이 하나님과 분리된 까닭임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오직 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내 존재가 비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는 내 인생의 집의 토대가 무너져 내릴 것을 알기에, 하나님 없이는 내 모든 몸부림이 의미 없는 것임을 알기에,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그분을 찾아 하늘로 솟아 오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과 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과 재결합하여 그분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줄 수 없는 것, 오직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이 ‘영적 발돋움’입니다.
교회에 오면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평화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 되려면 하나님과 통하여 생겨난 평화여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우리가 알고 싶은 종교적인 질문들을 해결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통하여 그분의 계시로써 깨닫는 것이 아니면, 그 대답은 오히려 우리를 오도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님으로 인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뿌리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에 있지 않다면, 별로 희망이 없습니다.
3.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붙드십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만날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죄의 담장을 십자가를 통해 허물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힘 입어 담대히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늘로 솟아 오를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읽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힘 입어 하늘로 솟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십 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올라갔던 (2절)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이 일곱 층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영적인 차원에 대한 경험은 보통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관의 틀 속에 투영됩니다. 바울이 체험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바울 자신도 그것을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오해만 불러 일으킬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하늘로 솟아 올라 영적인 세계 즉 초월적인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표현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4절에 보면, “이 사람이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라고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경험을 말하면서 일인칭의 표현 즉 “나는……”이라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말하듯 “그는……”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수동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솟아 오른 것이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바울에게는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크고 작은 영적 경험들을 거치면서 그는 늘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과 함께 동행함으로써 그는 이 땅에 살았지만 동시에 하늘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늘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서 그리고 기독교에서 ‘하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말은 비유적인 언어입니다. 영어에서 heaven이라는 말과 sky라는 말이 서로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듯이, 우리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창공’ 혹은 ‘대기권’이라는 말과 ‘하늘’이라는 말은 다른 뜻을 가집니다. 영어의 heaven과 우리 말의 ‘하늘’은 대기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신이 활동하는 영역’(the abode of deity)이라는 뜻도 가집니다. 하나님이 활동하는 영역은 우주선을 타고 멀리 멀리 가야만 닿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그곳에도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시지만,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선 이곳에서도 그분은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로 솟아 오르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슨 장치나 도구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늘’이라는 단어가 비유적인 것이듯, ‘솟아 오르다’라는 말도 비유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는 막을 뚫고 그분과 통하는 것이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까? 죄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 막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또 다른 벽도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과 물질에 익숙한 존재인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에 늘 활동하고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일에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엷지만 잘 뚫리지 않는 막, 뚫렸다가는 다시 봉합되는 막, 그런 막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형편입니다.
믿음 생활의 초점은 바로 이 막을 뚫고 하나님의 성령과 통하고 그 성령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는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통하고 그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고, 그 결과로 인해 인격이 변화하고 마음에 평화를 얻으며 종교적 질문들을 해결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와야 할 것이 분명히 먼저 와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교회가 너무나도 비지성적이고 반지성적이라는 점에 대해 안타까이 느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가 영성적으로는 뜨거운데 그것이 인격과 덕성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지적대로 “주여, 주여!” 부르짖는 열성은 강한데, 주님의 뜻 대로 살아가는 삶의 질은 한 참 떨어진다는 점에 대해 뼈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목회와 설교를 보면, 지성을 강조하고 덕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통하는 것이 근본이며 우선이며 뿌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늘로 솟아 오른 적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하나님의 세계와 통하는 체험이 있었습니까? 성령께서 마음을 만지시는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그런 체험을 통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경험을 하셨습니까? 그러한 체험을 통해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 2:20)라는 고백이 진실임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어떤 것이어도 좋습니다.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간 것 같은 영적 체험이어도 좋고, 왠지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이어도 좋습니다. 말씀을 읽으며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수도 있고, 성령께서 나를 압도적으로 사로잡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밖을 내다 보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눈물 짓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방언이나 신유같은 특별한 경험일 수도 있고, 찬양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것이 있습니까?
만일 그같은 체험이 있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깊은 영적 체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선물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구하고 찾으시기 바랍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주신 은혜에 머물러 있지 말고, 더 깊은 차원을 맛볼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십시다.
동시에, 균형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무엇인가 된 것 같이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체험이 자신을 즉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자신을 더 깊이 변화시킬 수 있도록 그 은혜를 깊이 숙성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풍겨나게 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설득력이 느껴지도록 해야 합니다. 영적 체험이 많은 사람들을 몰상식하 만들거나 일방통행을 하게 하거나 자기 중심적이 되도록 만드는데, 우리는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바울 사도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신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 모릅니다”(7절). 그 많은 이적과 계시와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지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즉 이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간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예상 밖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9절). 바울은 자신이 교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이같은 겸손한 태도 때문에, 바울은 성령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살았으며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그를 통해 드러났지만, 그로 인해서 자신이 뭔가 된 것처럼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깨어지기 쉬운 그릇임을 알았고, 자신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겼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자중하여 그리스도의 덕이 자신에게서 숙성되도록 힘썼고, 성령의 계시를 추구하며 그것에 따라 가르쳤습니다. 바울같은 분도 그랬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자중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은혜가 꽃을 피우고 열매 맺도록 힘써야 하겠습니까? 이렇듯, 성령의 역사는 결코 자랑하거나 선전하거나 경거망동할 일이 아닙니다.
반면, 그러한 체험이 없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추구하는데도 아직 뚜렷한 체험이 없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아예 그같은 세계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아놓고 사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을 단지 인격 수양의 도구로만 여기거나 지적인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영적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들처럼 될까 무서워 성령을 구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정한 경계선 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모든 것을 걸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립니다. 그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 고상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 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선택하고 그렇게 믿는 것은 모두 개인의 자유에 속합니다. 그같은 이유로라도 교회에 나오고 신앙 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미심쩍어 보이지만, 바울 사도가 오늘 자서전적인 고백에서 말한 바, 그 ‘하늘의 경험’에 한 번 마음을 열어 보시라는 것입니다. 굳게 팔짱을 끼고, 내가 가진 체로 모든 것을 걸러, 받을 것만 받는 경계심을 한 번 내려 놓고, 팔짱을 풀고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까지 수용하고 그 세계에 나를 열어 보라는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늘의 세계와 통하는 경험을 추구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 나 아닌 누군가가 살아 움직여 나를 이끌어 가는 경지를 경험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5.
이 지점에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장막을 뚫고 하늘로 솟아 오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육신과 물질의 장막을 뚫고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때때로 성령의 강력한 덮어씌움을 입어 이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늘을 살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깊은 영적 체험을 하고 있는 후배 목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 성령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중에, 그 목사님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주시는 것 같은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항상 성령님과 함께 살면서 그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고백을 들으며, 그것이 분명 성령께서 주신 메시지라고 느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들려지는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를 통해 깨달아지는 말씀에 순종하고, 양심을 통해 들려오는 말씀에 순종하라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 고집, 내 판단, 내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그것을 거스르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것만큼 성령이 활동하시는 공간이 커집니다.
둘째, “성결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정결하지 못한 것들을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본성에 있어서 거룩한 분입니다. ‘거룩’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구별하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악으로부터, 부정한 것으로부터, 음란한 것으로부터, 거짓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거룩입니다. 영이라고 해서 다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 부정한 영, 어두운 영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악과 어둠과 거짓 가운데 있으면 악한 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내 안에 머무시려면, 내 삶이 거룩하고 성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께서 더 깊이, 더 충만히 내 안에 거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싫어하실 일들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셋째, “나에게 우선 순위를 두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사귀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목마른 사슴에게 있어서 시냇물을 찾는 것이 유일의 관심사이듯,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 머물러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와 기도와 말씀 묵상과 찬양과 영적 교제와 사랑의 봉사를 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과 더욱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자리를 잡고 그 통치권을 점점 넓혀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제하고 우리 마음대로 부릴 방법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마음껏 활동하실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 그분을 사모하며 기다릴 따름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며,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것을 결코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영역 안에 살고 있습니다. 마치 공기에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그 공기를 호흡하며 살고 있듯, 성령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우리는 그 성령을 영적으로 호흡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의식하든 안 하든,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듯,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피할 방법이 우리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분의 임재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무감각하게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느끼신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무감각해진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더욱 열고 맡기고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가 때로는 손에 만져지는 것처럼 분명할 정도로 그분과 깊이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우직하게 순종하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도록 힘쓰고, 신앙 생활에 우선 순위를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찾을 때, 그분께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와 은혜가 우리 안에서 지성으로, 덕성으로, 인격으로, 그리고 우직한 실천으로 숙성되도록 겸손히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어 맡기면 됩니다.
모든 것은 성령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께 우리를 온전히 맡기면 됩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우리보다 우리 주님 예수님이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더욱 간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나늘에 계신 하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9, 13)
기도
아멘, 주여!주실 줄 믿습니다.
저희를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성령의 아름다운 은사와 열매가
우리 삶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 주여!
2009.6.28(김 영봉 목사)
“아침을 빚고 계시는 하나님”
(Our God Who Is Forming Morning)
--시편 130:1-8
(김 영봉 목사)1.
“바닦을 치다!”(to hit the bottom)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돌 바닦을 치다”(to hit the rock bottom)라고 표현되곤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비유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에 빠져서 몸이 속절없이 가라앉을 때의 그 기분을 아십니까? 순간, 절망감이 압도합니다. ‘이렇게 죽는가보다!’라고 생각하는데, 발끝에 무엇이 걸립니다. 눈을 감고 두드려 보니, 돌바닦입니다. ‘이젠 됐다!’ 싶어 그 바닦에 발을 딛고 힘껏 몸을 솟구칩니다. 살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바닦을 치는 경험입니다.
침체 상태에 빠진 경제가 바닦을 쳤을까? 아직도 더 빠져 들어가야 하나? 많은 분들이 알고 싶어하는 질문입니다. 빨리 바닦을 치고 솟아 올라야 가정 경제도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강의 문제, 관계의 문제, 재정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등이 삶을 짓누를 때, 우리는 무력하게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압도 당합니다. 때로는 꿈에서 그런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바닦은 언제쯤 나올까? 과연 바닦은 있는 것일까?’
오늘 읽은 시편 130편이 바로 그런 경험 가운데 쓰여진 것입니다. 이 시편은 ‘데 프로푼디스’(De Profundis)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라틴어 성경에 나오는 첫 문장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깊은 곳에서”가 됩니다. 우리 성경에는 1절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영어 성경은 주로 Out of the depths, I cry to you, Lord!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을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Help, GOD?the bottom has fallen out of my life! “하나님, 도우소서. 바닦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깊이 빠져도 바닦이 닿지 않는 것 같은 느낌, 혹은 발을 딛고 선 바닦이 갑자기 허물어 내리는 느낌, 그것이 시편 130편의 저자가 느끼는 절망감입니다. 기도자가 무엇 때문에 그런 느낌에 빠져 있는지, 시편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 시편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어떤 종류의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든 이 시편을 통해 바로 ‘자신의 기도’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진 사람도,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악화되기만 하는 사업의 문제에 허덕이는 사람도 이 기도에서 자신의 기도를 발견할 것입니다. 도대체 해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정 문제가 혹은 직장 문제가 꼬여 있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건강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그런 상황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들도, 언젠가 당했던 어려움을 생각하며 이 기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시편 130편은 즉시로 ‘나의 기도’가 됩니다.
2.
지난 주, 정말 ‘깊은 곳에’ 빠져 있는 친구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 동생이 전화를 했습니다. 이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형이 살고 있는 서부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 때문에 인사 차 전화를 했습니다. 그 친구는 교회에서 저와 중고등부 생활을 같이 했고, 미국에 와서도 잠시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후에 저와 같은 교단의 목사가 되었는데, 얼마 전, 건강 문제로 휴직을 했다 하여 그의 근황이 궁금했었습니다. 전화를 받자 마자 형의 안부를 물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유전적인 질환으로 인해 몸의 근육이 점차로 약화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현재로는 치료 방법이 없답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에 그 친구의 막내 동생에게도 똑 같은 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병은 여성에게는 발병이 되지 않고, 남성에게만 40대 이후에 발병한다고 합니다.
세 형제 중에 두 형제가 이유도 알 수 없고 치료 방법도 없는 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점점 약해지다가 가는 병입니다. 제게 전화를 건 동생은 두 형제를 옆에 두고 돌보기 위해서 이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동생과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나서 사무실에 멍하니 한 참 동안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인생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가!’ 생각해 보니, 이 병이야말로 ‘바닦이 없는 병’입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 쳐 볼 여지가 없습니다. 몸을 혹사해서 자초한 병도 아니요, 무슨 죄를 범하여 생긴 병도 아닙니다. 유전적인 요인 때문에 애꿎게 당하는 질병입니다. 나에게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자녀들 중에 누구에게 언제 발병할지 모릅니다.
도대체 이렇게 황당하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요즈음 이 형제들에 대해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아립니다. 끝도 없이 내려가는 ‘바닦 없는 구덩이’에 빠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아야 하는지, 직접 당하지 않은 저로서는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사자는 얼마나 더 할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사자는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를 위한 기도에 힘이 실렸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랜 만에 전화를 통해 듣는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평안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결 위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같은 상황에서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요? 죽은 사람도 살리셨던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실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런 기적적인 치유가 오늘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고, 또한 그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기적적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그 희망은 ‘현세’와 ‘육신’과 ‘이생’의 건너편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바닦도 없는 구덩이에 속절없이 빠져 버렸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 입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자, 이 대목에서 “아멘!”으로 응답하고 싶은 분도 계시겠지만, 정반대의 느낌을 가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결국, 당신도 그렇게 쉽고 빤한 대답으로 문제를 얼버무리는군요. 그것이 기독교의 한계지요!” “그러니까 종교는 마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반응하는 분들에게는 실상 유구무언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육신의 눈을 감고 영의 눈을 떠 보지 않고는 실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 눈을 뜨고 보면, 이 땅이 전부가 아니며, 이 육신이 전부가 아니고, 현세가 전부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것 모두를 포함하지만 또한 그것 모두를 초월하는 세계가 있으며, 그러한 존재가 있고, 그러한 삶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을 소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을 말로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구축된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를 말로 설명하여 납득시킬 도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이버 스페이스를 알려면 그 세계와 접속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알려면 그 세계와 접속되어야만 합니다.
3.
저는 제 친구가 그리고 그 가족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들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달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미래를 믿음 안에서 희망하게 되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재가 달라 보입니다.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덧 없는 것인지 알게 됩니다. 진실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이고, 겉으로는 가치있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거짓된 기쁨이 무엇이고,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진 생명을 감사히 여기고, 순간 순간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 삶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대단한 역설입니다. 저 세상에 눈을 떠야 이 세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눈 떠야 지금 내게 있는 목숨이 제대로 보입니다. 영원에 눈 떠야 순간의 값을 알고 촌음을 아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살면서 참된 희망을 얻으려면, 하나님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건강해지는 것도 필요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가져다 주는 희망은 며칠 가지 못하며, 우리 삶에 깊은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저 조금 더 편리해질 뿐입니다. 전보다 편리해졌다고 전보다 행복 지수가 높아집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뜰 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생명을 경험할 때, 오직 그 때에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찾을 수 있고, 그런 희망만이 우리의 삶을 속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지금 ‘바닦이 없는 수렁’으로 빠져가고 있는 제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싶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눈 뜨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생명을 누림으로써, 목숨보다 더 큰 생명을 소망하고, 이 세상보다 더 큰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믿음이 좋은 친구였으니, 그럴 줄로 믿습니다. 그 믿음이 분명하다면, 제 친구는 앞 날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겨 놓고, 살아있는 동안, 매일 ‘오늘’이라고 하는 날이 주어졌을 때, 하루 동안의 행복을 누리며, 그 안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제 친구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제 친구처럼 ‘바닦 없는 수렁’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도 이 믿음이 필요하고, 분명히 바닦은 있는데 언제 그 바닦이 나타날지 몰라 두려워하는 분들에게도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은 또한 평탄한 곳에 서 있는 분들이나 높은 곳에 서 있는 분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이 믿음이 있으면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며, 평탄하고 번영할 때 이 믿음이 있으면 교만해지거나 타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데일 카아네기가 말했듯이, 인간은 고난보다 번영을 이겨내기가 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깊은 물에 빠졌을 때나 흔들리지 않는 바위 위에 서 있을 때나, 우리는 늘 주님을 바라보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은 어려울 때에만 부르고 형편이 나아지면 잊는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지속적으로, 시시때때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과 깊은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울 때 그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시편 130편을 쓴 기도자는 분명 평소에 꾸준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저의 경험 상 그렇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지 못한 사람은 어려움에 처해서도 참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평소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지 않은 사람도 어려움에 빠져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다급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된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절박하니까 부르짖는 비명일 뿐입니다. 그 위기가 지나가는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운이 좋았거나 상황이 달라진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늘 하나님과 사귐을 나누는 사람은 어려움에 직면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고 있음을 믿으며, 그 손으로 결국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4.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진실하게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안절부절하는 기다림입니다. 그 사람이 올지 안 올지 몰라서, 혹은 그 일이 이루어질지 어떨지 몰라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기다림입니다. 마치, 차를 가지고 나간 아이가 밤 늦은 시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 집 안을 서성대며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의 기다림과 같은 것입니다. 불안한 기다림입니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런 확신이 없습니다.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내가 바라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그 일이 현실로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또 다른 기다림은 평안한 기다림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기다림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의 기다림입니다. 이런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안정시켜 줍니다. 결국 올 것이 올 줄로 믿고 그 때를 기다리며 주어진 일에 전심하게 만들어 줍니다. 밤 늦게 자식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 아이를 믿는 부모라면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습니다. 출장을 간 남편이 기약한 날짜에 올 것을 믿는 아내는 그 동안 자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깊은 물에 빠진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행동을 기다릴 때, 그 기다림은 두 번째의 기다림, 즉 평안한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평소의 사귐을 통해 체험했기 때문에 그분이 구원해 주실 것을 압니다. 그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든든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자는 먼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죄를 지켜 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3-4절)
……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은
그에게만 있다.
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7-8절)
믿는 사람들은 어려움에 빠지면 거의 본능적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혹시,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그럴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문제나 질병 혹은 관계에 큰 문제가 생길 때, 먼저 하나님 앞에 잠잠히 앉아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은 아주 지혜로운 일입니다. 혹시나 자신의 죄로 인해 환난을 얻은 것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단 진실하게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바라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샅샅히 조사하여 벌 줄 구실을 찾는 분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살피시고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벌을 주시더라도 그 벌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진 뜻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5.
그런 분을 믿고 기다리기에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여 우왕좌왕하거나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가 당한 어려움이 기대 밖으로 길어지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를 에워싼 어둠이 더욱 짙어지기만 합니다. 때로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이 더욱 심해지기만 합니다. 때로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들이 더욱 엉클어져 갑니다. ‘언제든 바닦에 닿겠지!’ 기대했는데, 한 없이 빠져 들어가는 기분입니다. 도대체 출구가 없어 보입니다. 다른 방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시편의 기도처럼 절박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기다린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며
내가 주님의 말씀만을 바란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진실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5-6절)
저도 군에서 파수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임진강 초소에서 ‘쩌렁 쩌렁’ 얼음 깨지는 소리를 들어가며, 혹은 북한군이 내려와 졸고 있는 병사의 목을 베어간다는 비무장 지대 참호 속에서 밤을 새워 보초를 서 본 적이 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졸음과 싸워가며 보초를 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압니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거뜬히 과제를 완수하지만, 몸이 피곤할 때면 어슴프레 동 터 오는 순간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졌던지요! 어려움이 커질수록 간절함은 더욱 커집니다.
그러므로 기도자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다림을 파수꾼의 기다림에 비유한 것은 아주 좋은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가 적절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아침이 오는 것 만큼이나 분명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파수를 서는 사람은 아침이 올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침이 올 때까지 버티기 어렵기 때문에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군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시계를 정지시켜도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옵니다. 문제는 동이 틀 때까지 우리가 버티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새벽을 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의 어둠을 견디고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할 일에 대해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수평선만 바라보고 발을 동동 구르며 동이 트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는 새벽을 맞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러한 기다림은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할 뿐입니다. 배고픔과
피로와 추위 때문에 힘들고 어렵지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행할 때, 우리는 아침을 맞을 자격을 얻습니다.
그럴 때, 시간도 빨리 지나갑니다. 잘 기다리는 비결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에 전심하는 것입니다.
깊은 곳에 빠져 들어가면서 혹은 바닦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어려움에 봉착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이 오듯,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은 나의 고난에 무관심한 것도 아니고, 나를 구원하기에 무능력한
것도 아닙니다. 자식이 고생하면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프듯, 우리의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이 더 아픕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구원의 손을 펼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때와 하나님의 때가 달라서, 때로 그 구원이 너무 멀게 느껴지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는 아비로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자식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그 아이를 구해 줄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모른 체 하고 그 아이 스스로 그 어려움과 싸워 이기기를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그러는 아비의 마음이 때로 더 아프지만, 그 아픔을 견디고 버텨야만 함을 압니다. 우리의 하나님도 우리에게 같은 마음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상황과 관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며 결국은 구원하시리라고 믿습니다.
6.
천둥과 번개가 심한 어느 날 밤, 아이가 한 밤 중에 일어나 엄마 방으로 찾아옵니다. 무서움에 질려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하나님은 뭐하시기에 이렇게 시끄럽게 그냥 두시는거야?” 엄마가 아이를 꼭 안아 주면서 대답합니다. “그래, 지금 하나님이 아침을 만들고 계신단다.”
그렇습니다. 새벽이 되면 짙은 어둠이 점점 사라지고 드디어 불덩이같은 태양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침이 드디어 밝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침은 그 순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간절히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그 지루하고 힘겨운 기간 동안, 아침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요란한 밤에도 아침은 저벅 저벅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는 질병이나 환난이나 고난이 다 지나고 나면, 그제서야 “하나님의 구원이 드디어 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아침에 태양이 우리 눈에 보이는 순간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나를 향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둠의 깊은 터널 안에 있을 그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나를 향해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내가 바닦도 없어 보이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갈 때에도, 그래서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은 나의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어둠이 가장 짙어질 시간에 조차, 아침은 나를 향해 견고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믿는 믿음, 말입니다. 모두가 아무 희망이 없다고 할 때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구원을 행하고 계시다고 믿는 믿음,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건지기에 무능해 보이는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이것은 위로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한 밤중에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가 “걱정 마! 지금도 아침은 만들어지고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고 합시다. 그것이 공허한 위로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절망을 말할 때,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걱정 마! 지금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 구원을 만들고 계셔!”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이것이 ‘깊은 곳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평소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며 믿음을 일군 사람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를 흔들리지 않는 토대 위에 세워줍니다. 이 토대 위에 서면 지진이 나서 땅이 흔들려도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생활 기반이 흔들려도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질병에 걸려 삶의 기본이 흔들려도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같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 위에 서서 하루 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대면합니다.
아, 이같은 믿음 위에 서서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평안할 때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고 살아감으로,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에 지나치게 탐닉하지 않고, 늘 깨어 성결하고 온전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하여 때로 인생의 깊은 골짜기를 지날 때, 아침을 만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며, 그 깊은 골짜기에서조차 흔들리지 않고, 짓눌리지 않으며,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루 하루 주어진 일에 신실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믿음의 능력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죽음을 극복하는 믿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7.
이런 질문과 함께 저는 ‘바닦없는 병’을 앓고 있는 제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 친구는 이같은 참된 믿음을 가지기에 저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땅에서 바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깊은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며 비관으로 삶을 더 어둡게 만들 가능성이 더 큽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했으니, 필경 하나님을 바라보고 거기서 희망을 찾을 것입니다. 그 친구에게는 하나님이 전부로 보일 것입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친구가 처해 있는 불리한 상황은 오히려 그를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셈이 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저는 그 친구보다 훨씬 좋은 상태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나의 좋은 상황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부로 여기지 못하게 만든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더 형편이 나쁜 사람이 아닐까? 나의 건강과 축복이 나로 하여금 믿음을 장식품처럼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이 아닐까? 삶의 모든 형편이 괜찮은 까닭에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는 마음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처럼 간절하지 않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더 불쌍한 사람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는 두려워 떨며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제 믿음이 혹시 장신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닙니까? 제가 주님을,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쉬운 존재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오, 주님, 저에게 전부가 되소서. 주님만이 저의 희망이 이유가 되소서. 주님을 위해서라만 그 무엇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을만한 믿음을 주소서.”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은 나를 지으시고 구속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밖에 안 계십니다. 진실로 우리를 복되게 하실 능력을 가진 분도 하나님 밖에 안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나의 전부가 되셔야 합니다. 믿음이 장신구가 아니라 제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새삼 자각했기에 저의 기도가 이토록 간절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의 이 기도가 여러분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전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장신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여러분의 마음도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마음과 같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 보시고 기다리십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캄캄한 밤 중에 우리를 위해 아침을 빚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지금, 비록 어둡고 춥고 배고프고 힘들더라도 힘을 내십시다. 아침은 분명히 옵니다. 그 아침이 지금 빚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쳐진 어깨를 곧게 세우고, 힘 빠진 무릎을 바로 하십시다. 구겨진 인상을 펴십시다. 위축된 마음을 푸십시다. 하늘을 향해 환히 웃어 보십시다. 곧 눈 앞에 펼쳐질 찬란한 아침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도, 그리고 내일, 또 내일도, 힘차게 살아가십시다.
아침을 만드시는 하나님,구원을 빚으시는 하나님,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저희에게 믿음을 주소서.
캄캄한 밤에도 빛을 볼 수 있는 믿음,
험한 골짜기를 걸으면서도 대로를 걷는 것처럼 걷게 하는 믿음,
바닦이 없어 보이는 수렁 속에서도 솟아 오를 수 있는 믿음,
오 주님,
이 믿음을 주소서.
이 믿음으로 이 땅에서의 하루 하루를 살도록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주님이 저희의 전부가 되소서.
주님의 저희의 희망의 이유가 되소서.
아멘.
Today's KORUS House English class is an article about Chuseok, one of Korea's biggest tradi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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